등록날짜 [ 2010-03-23 07:29:47 ]
밀레도 대규모 야외 원형극장.
밀레도(Miletus)는 소아시아 서해안의 무역항구로 이오니아에서 에베소 다음가는 중요한 도시로 번성했다. 고대에는 마이안도로스 강이 흘러나오는 만내(灣內)의 돌출한 곶(串)에 건설된 항구도시였으나, 지금은 해안에서 내륙으로 9km 지점에 위치한 폐허의 유적지로 남아 있을 뿐이다. 이곳은 에베소에서 육로로 출발하여 1시간이 소요되는 거리인데 성지 순례자들의 발길이 뜸한 곳이기도 하다.
바울은 마지막 전도여행을 하는 중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하여 이곳에 기착하였다. 이때에 에베소 장로들을 청하여 권면하였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행20:24~25).
이 같은 마지막 고별인사를 한 다음 모인 성도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니 모두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인해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전송하였다(행20:13~38)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밀레도의 성지순례를 마친 후 성경에서 바울의 밀레도의 고별사를 읽을 때에 누구든지 밀레도의 유적들이 눈에 선하게 보이면서 눈시울이 적셔질 것이다.
밀레도는 주전 8~7세기까지 이오니아의 중심지로 해외 무역이 번성했고 동 지중해와 흑해 연안에 70여 곳의 식민시를 두기도 했다.
동방무역의 활성화로 오리엔트의 풍부한 경험적 지식정보를 받아들이므로 이오니아 자연 철학자를 탄생케 하여 최초의 기하학을 정립한 철학자 탈레스(Thales)를 비롯하여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 아낙시메네스(Anaximenes), 헤카타이오스(Hekataios) 등 밀레토스 학파의 철학자를 배출하여 문화의 중심지를 이뤘다.
밀레도는 주전 6세기 중엽 페르시아의 지배 하에서 번영이 되기는 했으나 주전 499년 이오니아 반란의 중심이 된 것이 원인이 되어 주전 494년 페르시아인에게 함락되고 주민은 노예가 됐다. 주전 479년 페르시아 전쟁의 마지막 전투가 있은 후 도시가 재건되었다. 그간의 역사적 흐름 속에 헬레니즘시대에 이어 로마, 비잔틴, 오스만 터키 시대를 거쳐 1920년에 터키의 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1955년 대지진으로 완전히 폐허가 됐다.
밀레도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야외 원형극장이다. 헬레니즘시대에 세워진 것을 로마시대에 2만 5,0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대규모 원형극장으로 확장하였다. 당시는 항구도시였기 때문에 바닷가에 야외 원형극장이 위치하여 눈 아래로 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는 아름다운 경관을 고려하여 세워졌다. 그 외의 유적으로 규모가 엄청난 공중목욕탕, 유대인 회당, 주전 2세기의 항구 기념비, 스타디움, 아고라, 시장 문, 체육관, 이오니아식 석주거리, 미가엘교회 등의 많은 유적과 밀레도 박물관이 있다.
위 글은 교회신문 <185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