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의 요충지이자 국제적 상업의 중심지
도덕적·신학적 문제 딛고 바울이 교회 세워
고린도는 그리스 아테네에서 남쪽 80km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각종 신당과 제사가 성행하였고 음란의 도시이기도 했다. 사진 뒤편의 산 위는 아르데미스 주격신의 제사터. 고린도는 고대 고린도와 현대 고린도로 구분된다. 옛 고린도는 주후 1858년 지진으로 파괴되어 현재는 폐허로 유적만 남아 있다. 옛 고린도에서 북서쪽 5.6km 지점 고린트만 기슭에 새로운 고린도를 건설하였다. 지금은 코린트라고 부른다.
성경의 기록은 옛 고린도에 관련된 내용이다. 고린도는 아테네에서 남쪽으로 약 80km 지점, 아테네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잇는 길목에 자리하여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국제적 상업의 중심지였다.
고린도는 정치, 경제, 문화, 예술이 아테네를 압도했으며 호화스러운 도시였다. 고린도의 아크로코린투스에 비너스 신전이 세워져 그곳에서 매춘이 이루어졌으며 산성에 무녀가 무려 1000명이나 되고 부도덕한 행위가 성행하여 ‘고린도인’이라고 하면 곧 음행과 방탕의 대명사가 되었다.
주전 146년 로마의 뭄미우스 장군은 이 도시 전체를 파괴한 후 주민들을 추방했다. 그리하여 소수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그후 100년 동안 재건되지 못한 상태로 유지되었다. 주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지정학적으로 군사적, 상업적인 중요성을 인식하여 고린도를 재건하고자 자유민으로 구성된 식민이민단을 끌어들였다. 이때 그리스인, 로마 제국의 이방인들, 그리고 유대인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고린도는 부흥, 발전하면서 과거와 다름없는 번영된 도시가 되었다. 유대인들은 로마에서 2차에 걸쳐 일시적으로 추방하는 칙령(주전 41년과 19년)에 의해 고린도에 들어와 이후 그 수가 증가하여 공동체를 이루었다.
주전 27년 고린도는 로마속령 아가야 지방의 수도가 되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를 방문한 시기는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 때 갈리오가 주후 51년 7월 아가야 지방의 총독으로 부임한 후 고린도에 주재하면서 통치하고 있을 때였다.
바울은 아테네를 떠나 혼자서 고린도를 방문했으며 마케도니아에서 온 실라, 디모데와 얼마 후에 합류했다(행18:5).
바울은 글라우디오 황제의 칙령에 의해 로마로부터 추방됐던 아굴라의 집에서 함께 살면서 그와 더불어 천막 제조업에 종사하는 한편,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했다(행18:1~10).
바울이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동안 전도사업을 활발히 전개시키자 유대인들은 그에게 적대감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바울을 총독의 재판자리로 데리고 갔다. 그러나 총독 갈리오는 그러한 일에 관여하기를 거절했고 법정에서 물러가게 했다. 이후에 바울은 고린도에서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한 후 겐그레아에서 서원대로 머리를 깎고 아굴라, 브리스길라(브리스가, 롬16:3)와 함께 배를 타고 에베소로 갔다.
고린도교회는 신학적 갈등과 도덕적인 문제로 적지 않은 고통이 있었지만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기초를 세웠다. 또한 주후 52년경 고린도에서 데살로니가 전후서의 편지를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보내어 믿음을 견고케 하였다.
바울은 고린도를 떠난 후에도 고린도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에베소에서 편지, 곧 고린도전후서를 보내기도 했다. 또한 제3차 전도여행 시에도 들렀다. 그리고 주후 57년경 바울이 이곳에서 로마서를 써서 겐그리아교회의 여집사 뵈뵈를 통해 로마에 보내기도 했다.
고대의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오늘날에는 고린도 운하가 건설되었기 때문에 반도가 아닌 펠로폰네소스 섬이 되었다.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를 이어주는 개미허리처럼 잘록한 고린도 지협(地峽)이 1893년 운하로 개통되었다.
고린도의 유적으로 유대인들이 바울을 끌고 갔던 재판자리인 비마, 회당의 돌기둥, 여러 신전의 돌기둥들, 강당(Stoas), 공중목욕탕, 샘, 체육관, 야외 원형극장, 아고라, 박물관 등을 돌아볼 수 있다.
위 글은 교회신문 <191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