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0-05-18 10:04:03 ]
바울이 실라.디모데 더불어 전도한 곳...
수많은 핍박과 환난 중에 교회 세워져
데살로니가에는 비잔틴 시대에 세워진 20여 개의 교회가 남아있다. 위의 사진은 대표적인
교회가 데메트리우스가 순교한 장소에 세워진 성 데메트리우스 교회인데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기 직전에 순교한 자들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데살로니가는 아테네에서 북쪽 약 530km, 빌립보에서 남서쪽으로 약 200km 지점의 데르마익 만(Thermaic-灣)에 위치한 전략상 요충지로 지금은 그리스 제2의 도시이며 항구도시이다. 이 도시는 본래 온천 때문에 데르마(Therma, 뜨거움)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지금은 데살로니키(Thessaloniki)라고 불리고 있다. 성경에는 데살로니가로 기록되어 있다.
데살로니가는 마케도니아와 역사적으로 깊은 관련이 있는 도시이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20세 약관의 나이에 왕이 되어 가장 젊은 나이로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한 왕이 되었다. 그후 애석하게도 33세의 짧은 인생을 마쳤다.
그는 자기가 정복한 땅에 알렉산드리아라는 자기 이름을 붙인 도시를 70개나 건설하여 그리스 문화의 거점으로 삼았고 헬레니즘 문화 형성에 큰 구실을 하였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여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시킨 새로운 헬레니즘 문화를 이룩하여 그가 죽은 뒤 대제국 영토는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의 세 지역의 나라로 갈라졌다.
주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갑자기 죽게 되자 왕위 계승은 알렉산더 4세(재위 주전 323~310년)와 아리다오스(알렉산더 대왕의 이복동생)의 공동 통치가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이때에 총독 안티파트로스는 종전과 같이 섭정을 하는 가운데 여러 장군 사이의 권력투쟁이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그 결과 총독 안티파트로스의 아들인 카산더(Cassander) 장군이 승리하여 알렉산더 대왕의 이복 누이동생 데살로니케와 결혼하고 왕위에 올랐다.
주전 317년에 카산더는 자기에게 반기를 들었던 알렉산더 대왕의 대비인 올림피아, 왕비인 록사나, 알렉산더 4세, 아리다오스 등을 모두 살해하여 왕통이 단절되었다. 카산더는 그 수습책의 하나로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에게 해로 진출하는 가장 큰 항구도시를 건설하여 새 도시 이름을 자기 처의 이름인 데살로니케를 따서 데살로니가라고 부르게 했다.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잔인무도했지만 데살로니가 항구도시 건설은 역사적으로 빛나는 치적이었다. 데살로니가는 로마제국 시대에는 마케도니아 지역의 정치적 중심의 수도였으며 그 후 비잔틴 시대에는 콘스탄티노플 다음가는 도시로 발전했다.
사도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에 올랐을 때 실라와 디모데를 데리고 네압볼리 항에 상륙 후 빌립보에 도착하여 전도활동을 마치고 나서 데살로니가에 도착하였다(행17:1~4, 빌2:22). 그곳 유대인 회당에서 3주 가까이 복음을 전하게 되자(행17:3) 불신 유대인들은 바울을 시기하여 폭동을 일으켜 핍박하였다. 바울은 베뢰아로 피하여 거기서 다시 전도를 시작하였다.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은 다시 베뢰아까지 따라와서 바울을 축출하므로 그는 고린도에 가서 1년 반 동안 머물게 되었다(행18:1~11). 데살로니가교회 설립의 역사인 바울의 2차, 3차 여행은 여러 점으로 보아 데살로니가 전서에 기록된 내용과 일치한다. 데살로니가교회는 수난 중에 전도되었고 환난 중에 설립되었다.
데살로니가에는 비잔틴 시대에 세워진 20여 개의 교회가 남아있다. 그중 대표적인 교회는 성 데메트리우스교회이다. 이 교회는 데메트리우스가 순교한 장소에 세워졌으며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기 직전에 순교한 자들을 기념하기 위한 교회이다. 주후 410년에 세워졌으나 1917년에 대(大)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복원했는데 지하부분은 원형이 남아있다. 이 교회의 많은 모자이크 성화는 높이 평가되는 작품이다.
베뢰아(Veria)는 데살로니가에서 아테네로 가는 도중 약 68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유적으로 12세기에 건축된 사도 바울 기념교회와 바울이 강론했던 강단이 있다. 데살로니가를 순례하고자 하면, 데살로니가 공항을 이용하든가, 육로와 철도를 이용할 수 있다.
위 글은 교회신문 <193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