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1-07-20 14:15:38 ]
2000년 이상 보관된 옛 구약 문서 등 다수 발견
<사진설명> 사해사본이 발견된 쿰란 동굴(왼쪽), 쿰란 공동체 사람들은 사해사본을 항아리에 보존하여 훼손을 방지했다.(오른쪽)
쿰란은 사해(死海) 북단에서 해안 길을 따라 남쪽으로 약 5km 지점까지 내려가면 오른편 언덕에 있다. 쿰란은 주전 13세기경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유다 지파에 분배한 성읍 중에 염성(鹽城)이라고 하는 지역이다(수15:62).
주전 150년경에 유대교 3대 종파 중 한 분파인 엣세네인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쿰란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그들은 자기들만이 선민(選民)이라고 믿어 종말론적 신앙공동체를 이루었으며, 이들의 생활은 사유재산이 인정되지 않고 율법에 엄격했으며 가장 경건하고 금욕적이었다.
주전 31년에 지진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이 공동체는 주후 68년 로마에 멸망했다. 그들은 멸망 당시에 그들이 사용하던 중요한 문서들을 질그릇 항아리(높이 65~75cm, 지름 25cm정도)에 담아 근처 여러 동굴에 숨겨 놓았다.
쿰란이 유명하게 된 것은 1947년 2월 어느 동굴에서 쿰란 공동체 사람들이 숨겨둔 항아리 속에서 ‘에스더기’만 제외한 구약 모든 옛 사본이 여러 종류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더우기 그 사본들은 주전 2세기에서 주후 1세기에 속하는 사본들로서 마소라(구약성서의 올바른 헤브라이어(語) 본문을 전하기 위한 주해(註解) 체계) 본문보다 천년 이상이나 더 옛 것일 뿐 아니라, 구약 본문이 확정되기 이전 본문 상태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발견한 성경 사본을 ‘사해사본’ 또는 ‘쿰란사본’이라고 부른다.
이 사본이 질그릇 항아리 속에 약 2000년 이상 보관됐어도 썩거나 많이 훼손하지 않은 것은 사해 주변의 건조한 기후가 끼친 영향이다.
사해 사본을 최초로 발견한 경위는 다음과 같다. 1947년 2월 쿰란 광야에서 베두인 소년 한 명이 잃어버린 양을 찾고 있었다. 어느 동굴 안에 양이 있는지 확인하려고 돌을 던졌을 때 그릇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고 호기심으로 들어가서 항아리 8개를 발견했다.
그곳에는 아마포(亞麻布)에 잘 싸인 가죽 두루마리가 들어 있는 항아리가 있었다. 그 얼마 후 베들레헴 골동품상 칸도(Kando)에게 넘어가 여러 골동품 상인을 거친 후, 그 항아리에 들어 있던 두루마리 중 4개를 시리아의 예루살렘 정교회 대주교 마르아타나시우스 사무엘이 샀으며 나머지 3개는 베들레헴의 아랍상인에게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 ‘수케닉(Sukenik)’ 교수가 구입했다.
수케닉 교수가 1953년 사망한 후, 이스라엘 군 총사령관을 지낸 그의 아들 ‘야딘(Yadin)’ 이 아버지의 대를 이어 교수이자 고고학자가 되어 1954년 사무엘 대주교에게 두루마리 4개를 사들였고 1967년에 두루마리 1개를 추가 구입하여 사해 사본 두루마리 총 8개를 보유했다. 현재 그 사본들은 이스라엘 국립 박물관 성서의 전당에 보존되어 있다.
사해 사본의 중요성은 발견된 후 오늘날까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오늘날 성경 원본은 남아있지 않고 필사본만이 남아 있는데 사해사본이 발견되기 이전까지는 주후 10세기 때 사본이 가장 오래된 사본이었다. 그러나 쿰란에서 주전 2~1세기경, 지금부터 약 2000년 전 최고 사본이 발견된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귀중한 것은 이사야서 66권 전권으로 길이가 72m, 너비가 25.9cm인 두루마리다.
1948년 이스라엘 독립전쟁으로 동굴 조사 작업이 중단되었고, 1949년 2월 15일부터 3월 5일 사이에 요르단 고고학자 R. 드보가 발굴 조사하여 이때 성경의 사본과 외경 그리고 700점이 넘는 여러 문서가 발견되었다. 그후 1951~1956년까지 6년간 고고학자들은 쿰란 주변 동굴 11곳에서 두루마리 책 약 800개의 일부와 작은 조각들을 발견했다.
쿰란 주위에는 공동묘지 3개와 무덤 1200기가 있으며, 그중 무덤 50기를 발굴했는데 모두 남자의 것이었다.
쿰란 유적으로는 그들의 주거지역에서 책임자의 방, 성경을 기록하던 방, 정결례 목욕탕, 항아리 빚던 곳, 집회소, 식당, 물 저장소, 부엌, 마구간 등 공동체를 이루며 생활한 흔적을 볼 수 있다.
위 글은 교회신문 <250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