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0-07-19 23:02:06 ]
로마 콘스탄틴 황제 때 건축… 파괴와 재건 반복
제10지점-성묘교회(聖墓敎會)
골고다 언덕에 있는 성묘교회는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마지막 장소로서, 예수님이 처형당한 곳에 세운 교회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한 곳은 ‘해골’(골고다/갈보리)이라 하는 곳이다(눅23:33).
‘해골’은 히브리말로 ‘골고다’(요19:17)라고 성경에 기록하였으나, ‘골고다’는 예수님 당시에 사용하던 아람어고, 헬라어로는 ‘크라니온(Kranion)’이며, 라틴어로는 ‘칼바(Kalva)’인데 이에 연유하여 영어로 ‘갈바리(Calvary)’라 불렸다. 우리말로는 ‘갈보리’라 부른다.
당시 이곳은 성문 밖 지역으로 유대인들의 처형장소다.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신 예수님은 당시 유대 부자이며 공회의원인 아리마대 요셉(Joseph of Arimathea)이라는 사람의 무덤에 안장되었다(눅23:50~56).
예수님의 장례는 전형적인 유대인 장례법 절차에 의해 행해졌다(요19:40). 유대인 장례법에 시체는 부정하므로 죽은 후 바로 장례를 치르도록 하였다. 그러나 안식일에 죽은 자는 안식일이 지난 후 장례를 치렀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가까워져 오기 때문에 서둘러 장례를 치른 것이다(요19:31, 눅23:54). 시체를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싼(요19:40) 후,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인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었다(눅23:53, 요19:41). 그리고 한 사람이 움직이기에 어려운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을 막아놓고(마27:60, 막16:4) 장례를 끝냈다.
유대인 전통적인 장례법에 의하면 무덤에 시체를 넣고 밀봉을 한 후 약 6개월 또는 1년이 지나 시체가 썩어 뼈만 남으면 무덤을 열고 들어가 뼈를 모아 돌함에 넣고 무덤 내에 지정한 다른 방에 쌓아둔다. 그래서 최초 시체를 넣었던 무덤은 계속 사용하게 된다. 예수님의 무덤은 아직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새 무덤이었다.
성묘교회 역사적 배경은 이스라엘 역사와 맥락을 같이한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사건이 일어난 역사적 현장이 골고다 언덕과 예수님이 묻힌 무덤이다. 바로 이곳은 기독교회 시작과 함께 가장 거룩한 성지가 되었다.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은 그 장소를 정확히 기억하였고 그들이 찾아와 기도하는 장소가 되었다. 그러던 중 132~135년에 로마통치에 항거하는 유대인 2차 반란이 일어났다. 당시 로마제국 하드리안 황제는 반란을 진압한 뒤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에서 추방해 버렸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완전히 로마식 도시로 변형하고 기독교 유적도 파괴해 버렸다. 골고다 언덕 위에는 로마인들이 사랑과 미의 여신을 섬기는 비너스(Venus) 신전을 건축하고 성전산에는 주피터 신전을 세웠다.
200년 후 역사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자 콘스탄틴 황제 어머니 헬레나는 성지순례 길에 올랐다. 비너스 신전이 세워진 골고다 언덕 내 물 저장소에서 예수님이 매달린 나무 십자가를 발견하고 아들 콘스탄틴 황제에게 부탁하여 335년에 성묘교회를 세웠다.
성묘교회가 세워진 지 약 300년 후 페르시아 군대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자 파괴(614년)되었다가 재건되었다. 또다시 모슬렘교도인 아랍인들에게 파괴(1009년)되었다가 비잔틴 시대에 재건되었다. 그 후 1099년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50년간에 걸쳐 1149년에 완전히 재건하였다. 오늘날 성묘교회는 십자군시대에 재건한 모습 그대로다.
현재 성묘교회는 1808년 화재로 많이 파괴한 것을 1868년에 희랍정교회가 복구했으나 이때에 십자군시대 라틴식 장식이 많이 제거되었다. 그 후 1927년 지진으로 한쪽 부분이 위험성이 있어 1935년에 수리했다. 또 1949년 화재로 중앙 둥근 부분이 파괴하여 1958년에 수리해 현재까지도 계속 수리 중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201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