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땅을 가다(52)] 예수님 당시 천대받던 지방, 사마리아

등록날짜 [ 2011-01-27 10:08:49 ]

헤롯 왕에게 참수당한 침례 요한 기념교회 유적 있어


<사진설명> 사마리아 지방 유적(왼쪽) 침례 요한 기념교회 유적(오른쪽)

사마리아는 예루살렘에서 약 72km, 세겜 북방 약 12km 지점, 해발 440m 언덕 위 동산에 사방이 계곡으로 싸인 곳인데 현재 세바스티아(Sebastia)라는 보잘것없는 옛 마을이 되었다. 사마리아 성을 포함하여 중부 산간 지방 전체를 사마리아 지방이라고 부른다.

아합 왕 아버지 오므리 왕(주전 886~875년)은 12년 재임 중 북이스라엘의 수도를 디르사(6년)에서 사마리아(6년)로 옮겼다. 사마리아란 명칭은 오므리 왕이 세멜이라는 사람에게  은 두 달란트를 주고 부지를 산 후 그 소유주 이름을 따서 히브리어로는 ‘소므론’, 희랍어로는 ‘사마리아’로 부른 것에서 유래한다(왕상16:23~24).

사마리아 지방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할 당시 12지파 가운데 에브라임, 단, 므낫세 반 지파에게 준 땅이 곧 예수님 당시 사마리아 지방이다(수16장~18장).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아 북이스라엘 왕들이 250여 년간 사마리아 지방을 통치하였으나 주전 722년 앗수르 왕 살말에셀에게 멸망했다(왕하17:3~6).

그 후에 마케도냐 알렉산더 대왕이 점령하여 사마리아인을 축출하고 자기 백성을 사마리아 지방에 들어오게 하니 자연히 2차에 걸친 외침으로 혼혈족이 됐다. 그때부터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이방시하였다. 또 유대인들이 포로 생활하던 바벨론에서 귀환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할 때 사마리아인이 방해하였으나 일방적으로 그리심 산에 성전을 건축하였다(스4:1~6).

이 두 가지 원인으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간에 반목질시가 지속하여 상종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갈 때 가까운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멀리 요단 강변 길로 돌아다녔다. 그러나 스데반 순교 후 사마리아 지방에도 들어가 빌립, 베드로, 요한 등이 교회 설립의 기초를 만들었다(행8:1~25).

사마리아 성은 오므리 왕과 아합 왕을 거쳐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는 기간 중 가장 전성기였으며, 주전 722년 앗수르에게 멸망할 때 파괴되었다(왕하18:10~12). 사마리아 지방이 로마 통치 아래 있던 주전 30년경에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는 이 땅을 헤롯 대왕에게 주었으며 헤롯 대왕은 이곳에 헬레니즘과 로마 시대 건축양식을 살려 웅장한 건축물을 많이 구축했다.

사마리아 성 왕궁이 얼마나 화려한가는 겨울 궁, 여름 궁, 상아 궁, 큰 궁 등 엄청난 규모를 보아도 알 수 있다(암3:15;6:4;왕상22:39). 오늘날 남아 있는 유적은 오므리 왕과 아합 왕 시대 방탄벽과 상아 궁 일부가 남아 있으며 3세기경 희랍시대 둥근 탑, 로마시대 원형극장 등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헤롯 대왕이 이곳에 성을 건축(약 3700m)하고 사마리아 여인을 넷째 부인으로 삼아 낳은 아들이 아켈라오와 안디바다(마2:22, 14:1~12). 침례 요한은 헤롯 안디바가 동생 빌립의 아내와 불륜으로 결혼한 것을 강력하게 비난하다가 감옥에 갇혀 요르단 사해 부근 마캐루스 요새 안 궁전에서 헤롯 안디바의 생일 파티 때 비참하게 참수됐다(마14:1~12;막6:14~29). 그 후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예수께 가서 고했다(마14:12).

침례 요한의 시체를 매장한 장소는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는데 사마리아에 4세기경부터 침례 요한의 무덤이 있다고 전해지고 기념교회도 세웠다. 십자군 시대에 큰 규모로 개축하였으나 1187년에 아랍 사람들이 파괴하여 교회 일부는 이슬람 사원으로 변모하여 오늘에 이른다. 그러나 침례 요한 묘소는 역사적으로 신빙성이 희박하고 고증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위 글은 교회신문 <227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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