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1-03-23 17:24:31 ]
수많은 병자를 고친 가버나움과 오병이어의 이적
<사진설명> 가버나움 회당 유적(왼쪽) 오병이어교회(오른쪽)
가버나움(Capernaum)
갈릴리 호숫가 북서쪽에 있는 가버나움은 다메섹에서 지중해 방면으로 가는 해변 길(사9:1)로 왕래하는 통로로서 어촌이었지만 상업이 번창하여 예수 당시에는 가장 번화했으며 유대인 회당(눅7:5)과 로마 병영(마8:5) 그리고 세관(막2:14)이 있었다. 현재는 마을이 없고 유적만 남아 있다.
가버나움은 예수께서 나사렛을 떠나 공생애 첫 활동을 하신 곳이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제자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마태를 부르셨다(마4:13~22). 또 예수께서 유대인 회당에서 사람을 가르치시기도 했고,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와 그 형제 안드레가 살던 집이 이곳에 있어 자주 들르셨다.
가버나움에서 예수는 많은 병자를 고치는 이적을 일으키셨다.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 주셨고(막1:21~28;눅4:31~37), 베드로 집에 들어가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 것을 보고 손을 잡아 일으키니 나았다(마8:14~15;막1:29~31;눅 4:38~39). 그 밖에도 중풍병자의 병을 고쳐 주셨고(막2:1~12),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시어 오른손 마른 사람의 손을 고쳐 주셨으며(마12:9~13; 막3:1~6;눅6:6~11). 백부장 하인의 병도 고치셨다(마8:5~13;눅7:1~10).
현재 가버나움에는 2~3세기 때 사용한 유대교 회당 유적과 베드로 집터 위에 세운 8각형 형태 건물을 볼 수 있다. 또 유물은 회당을 지었던 터에 남아 있는 벽과 돌, 돌에 조각한 바퀴 달린 법궤, 메노라, 다윗 방패 그리고 검은색 현무암으로 만든 기름틀과 맷돌들을 볼 수 있다.
오병이어교회
예수께서 오병이어(五餠二魚)로 5000명을 먹인 이적을 일으키신 것을 기념하려고 세운 교회가 오병이어교회다.
“날이 저물어 가매 열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 있는 여기가 빈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는 할 수 없삽나이다 하였으니 이는 남자가 한 오천 명 됨이러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렇게 하여 다 앉힌 후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 앞에 놓게 하시니 먹고 다 배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 열두 바구니를 거두니라”(눅9:12~17).
1930년대 초 티베리아에서 북쪽으로 약 12km 떨어진 지점에서 독일 고고학자들이 타브가(Tabgha)라는 곳을 발굴했다. 그때 비잔틴 시대 교회 유적과 바닥에 오병이어 모자이크를 발견했다.
두 마리 물고기 사이에 둥근 모양의 떡들을 그린 작품은 예수께서 이적을 베풀었던 오병이어를 묘사한 모자이크로서 여러 가지 색깔을 띤 자연석들을 사방 1cm 정도 크기로 잘라서 조각들을 짜 맞추어 만든 예술작품이다.
오병이어 모자이크를 발견하자 독일 가톨릭교회에서 이 교회 유적 터 위에 1936년 기념교회를 건축했으며, 현재 있는 교회는 1982년에 새로 세운 교회다.
예수께서 오병이어 이적을 일으키신 사실은 복음서에 기록돼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5000명을 먹이신 오병이어 이적을 행하신 후에 4000명을 먹이신 칠병이어(七餠二魚) 이적은 마태복음(15:32~39)과 마가복음(8:1~10)에만 기록돼 있다. 무리를 먹인 이적을 행하신 장소가 벳새다인 것은 마가복음(6:45)과 누가복음(9:10)에만 기록했다. 이 벳새다는 분봉 왕 빌립이 재건해 그 당시 번성한 어촌으로 아우구스투스(Augustus)의 딸을 기념하고자 그녀의 이름을 따서 붙인 벳새다 줄리아스(Bethsaida Julias) 마을이다.
또 복음 사가(史家)들의 주장을 따르면 오병이어 이적을 행하신 장소는 갈릴리 호수 서편이 아니라 동편에 가까운 어느 곳일 것이다. 실제 4복음서를 대조하여 읽어보아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주후 3~4세기경 성지순례가 불가능했던 동편 지역을 피하여 현 타브가 지역에 기념교회를 세웠을 불가피성을 이해할 수 있다.
위 글은 교회신문 <234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