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땅을 가다(61)] 폐허가 된 도시의 옛 영광과 좌절

등록날짜 [ 2011-04-06 09:28:19 ]

예수 멸시한 거라사, 화산지대 고라신, 사울 왕 무덤 있는 벧산 지역

<사진설명> 거라사에 있는 비잔틴 시대 교회 유적(왼쪽), 현무암을 깎아 만든 고라신 지역 유적(오른쪽)

거라사(Kursi)
거라사는 갈릴리 해변 북동쪽 해안에 있으며 현재 이름은 쿠르시(Kursi)다. 거라사가 다른 곳이라는 주장을 따르면 주후 31년 대지진 때 무너진 ‘움케이스(Umm Qeis)’라는 폐허(갈릴리 바다 남동쪽에 흐르는 야르묵 강 남쪽지역)라고 하는데, 현재 그 산하에 유황 온천장이 있다.

거라사(가다라, 마8:28~33) 지역에서 예수는 귀신들린 사람 속에 있는 군대 귀신을 명하여 2000마리나 되는 돼지 떼에 들어가게 했고, 그 돼지 떼가 물속으로 들어가 몰사했다(막5:1~15;눅8:26~39).

현재 쿠르시에 있는 교회 유적은 비잔틴 시대 것이다. 건물은 주후 5세기 중엽에 지은 것으로 동쪽 끝에 제단 부분이 있고, 남쪽 작은 방은 주후 584년부터 침례 받는 곳으로 쓰였으며, 남쪽 또 다른 방은 기도처였다. 교회 북쪽 방에는 기름 짜던 틀이 있고, 교회 내부에는 비잔틴 시대 모자이크가 몇 군데 남아 있다.

고라신(Korazim, Chorazin)
고라신은 가버나움에서 북쪽으로 약 4km 지점인 산 위에 있다. 하솔로 올라가는 육로로 돌아가면 약 12km 지역이다. 고라신에 사람이 처음 거주한 것은 주전 6000~4000년경으로 추정하는데, 그 시대 고인돌 약 300여 개가 이를 고증해주고 있다.

이곳은 화산지역으로 산 전체가 현무암이고, 현무암을 깎아 만든 건물 유적도 그대로 남아 있다. 유적은 가버나움에 있는 유대인 회당과 같은 연대에 지은 것이다. 이 회당 정면 왼쪽 방향이 예루살렘 쪽이고 장식들도 아름답다.

회당 유적 중에는 ‘돌 의자’가 있는데 이것을 ‘모세 의자’라고 한다. 그 당시 회당 상석에 ‘모세의 자리’가 있었다는 것이 예수의 말씀에도 나타난다(마23:1~2). 예수께서 말씀도 전하고 많은 권능을 베풀었지만, 여러 고을은 회개하지 않았다. 고라신은 벳새다, 가버나움과 함께 예수께 책망받은 곳이다(마11:20~24).

벧산(Beth-Shean)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120km, 여리고에서 85km, 갈릴리 호수에서 남쪽으로 약 30km 떨어진 요단 강에 인접한 서쪽 지점이다. 벧산은 이스르엘 계곡 동쪽에 있는 도시로 교통 중심지다. 고대에는 요단 강 동쪽에서 벧산을 거쳐 이스르엘 계곡을 따라 므깃도 지역을 경유, 해변도로를 이용해 애굽으로 왕래했다.

성경에는 벧 스안(수17:11;왕상4:12), 벳산(삼하21:12)이라고 기록했으나 벧산(삼상31:10)과 같은 곳이다. 벧산 쪽으로 약 10km 뻗은 길보아 산 북서쪽 계곡에서 하롯 샘물이 흘러나와 벧산을 거쳐 요단 강으로 흐른다.

벧산에 처음으로 도시를 형성한 것은 주전 3000년경으로 추정한다. 1921년부터 발굴 작업을 시작한 이래, 18차례나 도시를 지은 역사적 사실이 유물들로 고증되고 있으며, 유물들은 예루살렘 록펠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벧산은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할 당시 므낫세 지파에 분배한 지역이나, 철 병거를 가진 이 도시를 정복하지는 못했다(수17:11;삿1:27). 이후 사울 왕은 불레셋 사람들과 전투를 벌이다 패하고, 블레셋인들은 사울 왕 시체와 그의 세 아들 시체를 벧산 성벽에 못 박기도 했다(삼상31:1~13). 솔로몬 왕 시대에는 이스라엘에 열두 관장을 두어 일 년에 한 달씩을 맡아 식물을 예비하게 했고, 아힐룻 아들 바아나가 벧산 지역을 관장하면서 왕과 왕실에 식물을 댔다(왕상4:7~12).

주후 200년경에 약 5000명을 수용하는 대규모 로마 원형극장을 ‘사울 왕 거리’에 지었다. 이 원형극장에서 건너다보이는 언덕지대가 텔 벧산이며, 그 밑으로 하롯 시내가 지나간다. 벧산은 비잔틴 시대에 대규모 도시로 발전했다.

현재 진행 중인 고고학 발굴 작업은 이곳이 로마-비잔틴 시대 대규모 도시임을 확인해 주고 있다. 극장과 목욕탕, 거리와 화려한 모자이크를 비롯한 수많은 유물이 벧산이 당시 매우 아름다운 도시였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위 글은 교회신문 <236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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