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1-06-21 15:00:08 ]
선한 사마리아인이 들렀던 여관, 현재 교회 세워
예수께서 가나안 입성 후 첫 할례 행한 길갈 지역
<사진설명> 선한 사마리아인이 들렀던 여관으로 추정하는 곳(왼쪽). 여관 근처 여리고 쪽으로 700m 정도 가다 보면 해발 고저가 수평인 지점에 시 레벨(Sea Level) 지표 석이 있다.(오른쪽).
선한 사마리아인의 여관(The inn of the good Samaritan)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중간 지점 오른편 도로변에 선한 사마리아인 기념교회가 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험한 길은 강도가 많은 장소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현장을 빗대어 이웃 사랑에 관한 말씀을 하셨다. 강도를 만난 사람이 거의 죽을 지경에 있을 때 제사장과 레위인은 보고도 피해 갔으나, 당시에 천대받던 사마리아인은 죽어가는 이를 간호해 주고 주막에 데리고 가서 자비를 베풀었다(눅10:25~37).
사마리아인이 들렀던 여관(주막) 터라고 알려진 곳에 처음 교회를 세운 것은 비잔틴 시대다. 교회 주변에 남아 있는 돌 울타리는 십자군 시대 것이다. 또 마당 가운데 오래된 우물 하나가 있다.
교회에서 큰길을 건너 언덕 위에 망대가 있는데 비잔틴 시대 수도사들이 교회를 지키려고 세운 망대 유적이다. 이곳 여관을 나와서 여리고 쪽으로 700m 정도 가다 보면 해발 고저가 수평인 지점에 시 레벨(Sea Level) 지표석이 있다.
길갈(Gilgal)
성경은 여리고 동편에 길갈이 있었다고 기록한다(수4:19). 이곳은 현재 여리고 북동쪽 키르벳 엔 니틀렙(Khirbet en Nietleb)으로 추정한다. 지명 유래는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수5:9)” 하면서 그곳 이름을 오늘날까지 길갈(‘구르는’이라는 뜻)이라 부른다.
이스라엘 백성은 40년이란 긴 세월을 유리(遊離)하다가,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서면서 이곳 길갈에서 할례를 받았다. 할례는 애굽에서 노예생활, 시내 광야에서 우상을 섬기던 수치를 굴려버리고 벗어버렸다는 의미로 행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평지에서 첫 유월절을 지킨 것은 매우 의미 있다(수5:12). 이곳에서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었다(수5:12).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점령하려고 맨 처음 길갈에 진을 치고, 이스라엘이 요단 강을 마른 땅으로 밟고 건넌 것을 기념하려 했다. 열두 지파 수대로 각기 돌 한 개씩을 요단 강에서 취하여 어깨에 메고 온 후 열두 돌을 길갈에 세웠다(수4:19~20). 그러나 오늘날 찾을 수는 없다. 여호수아는 이곳에서 가나안 땅을 제비뽑아 두 지파(유다, 에브라임)와 반 지파(므낫세)에 분배하고(수14:2) 작전 기지로 정했다(수4:19, 5:10, 9:6, 14:6).
또 길갈은 사무엘이 사사 직을 수행하면서 순행한 곳이고(상삼7:16), 사울 왕 즉위식을 이곳에서 행하였다(삼상10:8;11:15). 사울 왕 2년, 사무엘이 정한 기한 대로 사울 왕이 7일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자 사울 왕 스스로 번제를 드렸다(삼상13:8~9). 늦게 도착한 사무엘이 그 사실을 알고 탄식하면서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말했다.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라고 예언하고 사무엘이 일어나 길갈에서 떠나 베냐민 기브아로 올라갔다(삼상13:14~15).
사울이 범한 잘못은 제사장만이 드릴 제사를 왕이 친히 드렸을 뿐 아니라 사무엘을 무시하여 기다리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신성한 제사법을 무시한 그의 불신앙이며 교만이었다.
사울 왕 시대 이후 길갈에서 압살롬이 죽었다. 또 길갈은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 유다 백성이 마중 나가 맞이한 곳이기도 하다(삼하19:15~40).
위 글은 교회신문 <246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