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땅을 가다(76) - 애굽 땅에 남아 있는 그리스도의 흔적

등록날짜 [ 2011-08-16 13:19:55 ]

예수가 태어나기 전 요셉이 피난 갔던 헬리오폴리스

카이로는 이집트 수도로 인구 1200만인 아프리카와 중동지역 최대 도시다. 5000년 전, 이집트의 최초 왕국은 현 카이로에서 남서쪽으로 25km 지점에 있는 멤피스(Memphis)에 수도를 두었다. 그러나 힉소스 족(族)의 침범으로 점차 수도를 남쪽으로 이전함에 따라 중왕국과 신왕국 사이 주전 2133년경에 현재 카이로에서 730km 남쪽 테베(Thebes, 현 Luxor)를 수도로 삼았기에 멤피스는 잊혔다.

이집트 바로가 멸망한 후, 희랍 프톨레미 왕조는 주전 322년에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삼았다. 그러나 주전 30년 마지막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자살함으로써 프톨레미 왕조는 끝이 났다. 그 후 로마 아우구스투스(Augstus) 황제가 현재 구 카이로(Old Cairo) 지역에 바벨론 성채를 건설하여 로마 통치시대의 카이로 역사가 시작되었지만 그때는 카이로라는 지명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벨론 성채를 중심으로 거대한 지역이 형성되어 번영일로에 들어갔다.

그 후, 주후 641년 다마스카스에 도읍을 둔 이슬람제국 아무르(Amur) 장군이 바벨론 성채를 함락했다. 아무르 장군은 로마의 잔재인 바벨론 성채를 파괴하고 여기에서 조금 떨어진 푸스타트에 새로운 이슬람 도시를 형성하여 번창했다. 주후 969년에 현재 이슬라믹 카이로 지역인 푸스타트를 이슬람제국 수도로 삼고, 이슬라믹 카이로는 천년 동안 수도로 발전해 왔다. 그러나 영국 통치시대에 접어들어 새로운 도시 계획에 따라 현재 있는 신시가지로 옮겼다.

현재 카이로는 (1)로마 통치시대 구 카이로(Old Cairo), (2)이슬람 통치시대 이슬라믹 카이로(Islamic Cairo), (3)영국 통치시대 신시가지 카이로(New Cairo)라는 3개 지역으로 크게 구분된다. 카이로에는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국립박물관, 마가교회, 예수피난교회, 헬리오폴리스 등 기독교인들이 순례할 곳이 많이 있다.

헬리오폴리스(HelioPolis)
성경과 카이로의 관련은 요셉부터 시작한다. 애굽에 종으로 팔려간(주전 1898년, 17세)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몽해 주고 바로에게 사브낫바네아(하나님께서 말씀하심, 유대인들은 비밀을 드러내는 자라 함)라는 이름을 받고 총리직(주전 1885년, 30세)까지 올랐다.

요셉은 온(On)이라는 도시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했다. 온(On)은 당시 고센의 수도였다. 온은 태양신을 섬기던 도시로 신전이 있었으며, 그 후 희랍인들은 태양의 도시라는 뜻으로 헬리오폴리스(HelioPolis)라고 불렀다. 그러나 현재 카이로 북동쪽 카이로 공항 근처에 있는 헬리오폴리스는 옛 온(On) 땅이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
모세도 헬리오폴리스에서 주전 1527년에 출생했다고 전해오고 있다. 최근에 옛 헬리오폴리스는 현재 엘 마타리아 들판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엘 마타리아는 현재 헬리오폴리스에서 북서쪽으로 약 5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엘 마타리아에 가면 옛 유적을 볼 수 있다. 제19왕조 때 바로인 세티 1세 태양 신전 터와, 제12왕조 때 바로 세소스트리스 1세 방첨탑(方尖塔, Obelisk)이 옛 헬리오폴리스를 입증해 주고 있다.

또 엘 마타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족이 애굽으로 피난했을 때 와디 엘 나투룬에서 와서 잠깐 쉬셨던 곳이기도 하다. 2000년 전 예수의 가족이 이곳에 오셨을 때 이곳은 폐허인 들판이었고, 거기에 뽕나무 한 그루가 있어 그 그늘에서 예수의 가족이 함께 쉬었다고 전해온다.

엘 마타리아 역에서 멀지 않은 시가지 울타리 담장 안에 뽕나무가 보존되어 있다. 또 이곳에는 예수가족방문기념교회를 가톨릭에서 세웠고, 교회 벽에는 예수의 피난 배경을 생생하게 그린 대형 화폭 액자를 여러 장 부착해 놓았다.


<사진설명> 예수가족방문기념교회

위 글은 교회신문 <253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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