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1-10-27 03:26:36 ]
다윗과 밧세바 사건에 등장하는 암만 지역
로마시대 주요 유적 곳곳에서 볼 수 있어
암만(Amman)
암만은 요단 강에서 동쪽으로 약 75km 지점, 아라비아 고원 서쪽 끝 해발 약 800m 지대에 있다. 암만은 현재 요르단(Jordan)의 수도다. 요르단은 남한 크기와 비슷하다. 면적이 9만 1000㎢로 인구는 475만 명에 불과한 나라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1945년 아랍연맹에 가입했으며, 1946년 요르단을 수도로 하여 트랜스(동) 요르단 하심왕국으로 독립했다.
<사진설명> 요르단 암만 시내 중심가에 있는 원형을 그대로 보존한 로마식 야외 극장.
암만은 주전 5세기경부터 있던 옛 도시다. 성경은 암만을 ‘랍바’라 기록하고 있으며(삼하12:27), 랍바는 암몬의 왕성(王城)이었다.
다윗은 이스라엘 암몬 성을 공격하는 동안 하나님께 큰 죄악을 범했다. 해가 돌아와서 왕들의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 신복(臣僕)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저희가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에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었다.
저녁때에 다윗이 그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보니 한 여인이 목욕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였다. 다윗이 사람을 보내어 그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보게 하였더니 고하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였다. 다윗이 사자를 보내어 저를 자기에게로 데려 오게 하고 더불어 동침하매 저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여인이 잉태하매 보내어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잉태하였나이다 하였다(삼하11:2~5).
다윗은 그녀의 잉태를 감추기 위하여 전선에 나가 있는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에게 3일간 특별휴가를 주어 아내와 같이 침상에서 시간을 보내게 하려고 불렀다. 그러나 우리아는 전투 기간에 금욕생활의 전통을 지키고 전선의 바깥들에 있는 요압과 왕의 신복들을 생각해서 아내와 침상에 눕는 것을 거절했다. 한마디로 충성스러운 군인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우리아에게 편지를 주어 요압에게 보냈다. 그 편지는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죽게 하라”는 것이었다(삼하11:15).
요압은 다윗의 명령대로 행하여 우리아는 적진에서 다윗의 의도대로 전사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나단을 보내어 행인과 부자의 비유로 다윗을 심히 책망했다. 간음하여 잉태된 첫 아이는 출생 후 7일 만에 죽어버렸고 그 후에 태어난 아이가 바로 솔로몬이다. 다윗이 범한 밧세바 간음사건을 분기점으로 다윗 왕의 윤리적, 정치적 갈등이 시작되었다.
암만은 헬레니즘 시대에 이집트 프톨레미 왕조 필라델푸스 2세가 도시를 재건했고 그 후 로마 비잔틴 시대에 필라델피아(Philadelphia)라고 부르기도 했다. 로마시대 유적으로는 5000명을 수용하는 원형극장과 헤라클레스 신전 유적이 있고, 고대 성채(城砦)는 고고학 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다.
제라쉬 유적
제라쉬(Jerash)는 암만에서 북쪽으로 약 50km 떨어진 가까운 거리에 있다. ‘동양의 폼페이’, ‘리틀 팔라마’라고 불리는 제라쉬에는 그리스와 로마 지배시대에 그 문화와 건축 양식의 영향을 받은 웅장한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사진설명> 제라쉬의 열주대로. 암만에서 북쪽으로 45㎞ 떨어진 제라쉬(Jarash)는 ‘1000개의 기둥 도시’라는 명성에 어울리게 폐허 속에 셀 수 없을 만큼 수많은 건물 기둥이 흩어져 있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건설한 ‘동양의 폼페이’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도시다.
특히 제라쉬에는 비잔틴 시대인 주후 529년과 533년에 세운 교회 유적 두 군데가 있다. 요르단에 가면 성지순례자들이 이곳에 대부분 들른다. 로마시대 웅장한 유적을 바라보며 무엇인가 깊이 생각에 잠길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263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