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이 태어나고 자란 고대도시로 유명
직물이 유명하여 직조업·천막제조업 등 성행
<사진설명> 클레오파트라 문(왼쪽), 사도 바울의 생가에 남아 있는 ‘바울의 우물’(오른쪽)
원래 다소는 이스탄불에서 남동쪽으로 약 900km 지점 지중해 해변에 있는 항구도시였으나, 지금은 지중해 해안에서 15km 내륙에 있다.
다소는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인 사도 바울이 태어나고 성장한 곳이다. 사도 바울의 출생 연대는 분명치 않으나, 예수께서 탄생하신 몇 년 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하며 주후 67년에 로마에서 순교했다. 바울이 신약성경에서 예수 다음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는 신약 27권 중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13권이 사도 바울과 관련해 기록되었다는 사실이 뒷받침한다.
그는 세 번에 걸친 전도여행에서 험한 산을 넘고 태산 같은 파도를 헤치며 때로는 감옥에 갇히면서도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하고 사도의 길을 충성스럽게 걸었다. 또 신체적 불치병을 지니고도 세계 복음화를 위하여 국경과 인종을 초월하여 이방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다.
그의 학식 또한 기독교의 기초를 굳히는 데 크게 공헌했는데, 기독교 신학은 바울에 의해서 틀이 잡혔으며 후세에 끼친 영향도 절대적이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고향 땅을 밟는다는 것은 어느 성지 못지않게 의미가 있다.
바울은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성의 시민이다”(행21:39) 하고 말한다. ‘…소읍(小邑)이 아닌…’ 구절은 다소가 결코 평범한 도시가 아니며, 무시해서는 안 되는 도시임을 암시한다. 다소의 현재 인구가 약 8만인데, 그 당시는 인구 50만 명을 자랑하는 도시로서 지중해 지역 어느 도시도 다소보다 크지 않았다.
다소는 로마시대 길리기아 지역의 정치적 수도요, 소아시아의 학문과 문화 그리고 군사적 중심지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 고장 사람이 일반 학문을 공부하는 데 있어서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를 능가하는 대학도시였다. 또 지중해에 있는 떠들썩한 상업 도시이자 분주한 왕래가 일상이던 항구도시였다. 천연 요새인 다소 항은 키두누스 강이 지중해로 흐르고 북쪽은 타우러스 산을 포함하여 산맥으로 둘렀다. 풍부한 광물자원과 목재 또한 무역항으로 성장하는 데 좋은 조건을 제공했다. 특산물은 아마(亞麻) 원자재와 염소 털로 짠 직물이 유명하여 직조업과 천막제조업이 성행했다. 당시 천막제조업은 바울을 통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행18:3).
클레오파트라 문
도시 입구에서 바울 생가(生家)를 향해 들어가다 보면 도로변에 유적인 성문이 서 있다. 성문의 모습은 보잘것없지만, 유명한 ‘클레오파트라 문’이다.
주전 41년,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배로 지중해를 거슬러 올라와 이곳에 주둔하던 로마의 안토니우스 장군을 찾았다. 클레오파트라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유혹하여 자신의 보호자로 삼았으나, 그가 암살당하자 안토니우스 장군에게 접근하려고 다소까지 찾아온 것이다. 다소에서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이후의 역사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다소에 있는 클레오파트라 문은 그녀의 다소 방문을 기념하려고 세운 것이다.
이 클레오파트라 문을 지나서 얼마쯤 걸어 들어가면 ‘바울의 우물’이라는 표지 간판이 붙어 있고, 안으로 들어가면 우물이 있다. 바로 이곳이 사도 바울이 태어난 생가라고 전하는 장소다.
사도 바울의 고향집 우물
사진에서 보듯이 우물은 도르래를 움직여 함석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린다. 우물의 깊이는 약 38m로 당장 물을 길어 우물물을 마실 수 있다.
순례자들은 오래된 우물이라 혹시라도 물을 마신 후 배탈이 나지 않을까 염려하지만,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한다”(막16:18)는 말씀에 의지하여 물을 한 모금 마시는 순간, 사도 바울의 위대한 모습을 상상하며 그의 믿음을 마음속 깊이 느낄 수 있다.
다소를 방문하고자 하면 항공편으로 다소에서 약 40km 떨어진 곳에 있는 아다나 비행장을 이용하든가, 육로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다소에서 육로로 안디옥(Antioch, 현재 Antaykya)까지는 약 3시간, 안달리아(Antalya)까지는 약 10시간이 걸린다.
위 글은 교회신문 <268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