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1-12-13 13:26:53 ]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 받은 초대교회 성도의 거점
성경 속 사도 바울의 발자취 생생히 느낄 수 있어
<사진설명> 안디옥 베드로동굴교회(왼쪽), 실루기아 항구(오른쪽)
오늘날 터키의 도시 안디옥은 시리아 국경에 접해 있으며, 오론테스 강을 따라 지중해에서 약 25km 내륙으로 거슬러 올라간 곳에 있다. 예루살렘에서는 약 500km, 바울의 고향 다소에서는 약 240km 거리에 있는 안디옥은 사도 바울과 초대교회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도시다.
이 도시는 주전 300년에 알렉산더의 후계자 셀류커스 1세(SeleucusⅠ)가 시리아 셀류커스 왕조의 수도로 삼고 자기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안티오키아(Antyokya)라고 불렀다. 지금은 안타키야(Antakya)라고 부르며, 성경에서는 안디옥(Antioch)이라 기록하고 있다.
옛날부터 안디옥에는 동쪽으로 이어지는 대상로(隊商路)가 있어 통상(通商)의 요지로서 다양한 사람과 문화가 공존했다. 또 ‘동방의 여왕’이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도시로도 유명했다. 주전 64년 로마시대에는 로마의 속주(屬州)인 시리아의 수도가 됐고, 로마,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3대 도시로 이름을 날렸다. 안디옥은 아름다운 신상들이 많았고 웅장한 신전이 있었으며 아폴로 신전에서 열리는 제의(祭儀)와 경기는 다채로웠다고 한다.
주전 2세기에는 혼합인종들이 50만 명 정도 거주했으며, 그중 유대인 공동체도 일부 포함돼 있었다. 그 후 예루살렘에서 기독교 박해가 심해졌고, 스데반 집사가 순교한 후 흩어진 기독교인들은 안디옥으로 피신해 와서 초대교회를 형성했다.
성경은 “바나바가 사울(바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11:25~26)”고 기록하고 있다.
안디옥교회는 초대교회 중에서도 복음 선교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인식하였고, 덕분에 세계 선교의 기지이자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 거점이 됐다.
안디옥에는 초기 기독교 핍박 때에도 교회가 여럿 세워졌다. 하지만 로마 디오클레시안 황제(284~305년) 때에 파괴됐다. 그 후 콘스탄틴 황제 때에 재건했으며, 아시아 총 대주교 소재지로 종교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이어 주후 526년 대지진과 538년 페르시아군의 파괴로 황폐했고, 540년 페르시아의 공격으로 안디옥은 함락됐다. 그 후 유스티니안 황제가 재탈환했으나, 636년 사라센에 점령돼 약 300년간 그 지배를 받다가 969년 동로마에 속한다. 1084년 셀주크 터키의 지배를 받았고, 그 후 십자군에 점령됐으며, 16세기 전반에는 오스만 튀르크에게 장악됐다. 1920~1939년까지 시리아가 지배하다가 그 이후 터키 영토가 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안디옥 베드로 동굴교회
안디옥교회의 초대 기독교인들이 예배하던 실피우스 산 중턱에는 동굴교회가 남아 있다. 동굴교회에는 들어가는 곳과 숨고 피할 비밀통로가 있어 그 당시 환난과 핍박을 당한 초대교회 모습을 보여주는 현장이기도 하다. 사도 바울과 관련한 교회는 없으나 베드로 동굴교회(St. Peter’s Grotto)가 산기슭에 있다. 이 동굴은 안디옥 기독교인들의 집회장소로 사용됐다고 전하는 곳이다. 동굴 내부에 있는 교회 바닥에는 비잔틴 시대 것으로 보이는 매우 낡은 모자이크 흔적이 남아 있다.
안디옥에는 한국 교회도 있다. 안디옥 중심가 건물을 사들여 100여 명이 예배드릴 성전과 부속시설로 고쳐 ‘안디옥’이라고 교회 이름을 붙였다. 초대교회 이방선교 중심지로 바울과 바나바를 최초로 파송한 안디옥에 한국 교회를 세운 것은 뜻 깊은 일이며, 21세기에 세계 선교 사명을 감당할 전진 기지를 확보했다는 의의가 있다.
실루기아
실루기아는 바울과 바나바가 최초로 전도 여행을 하려고 배를 타고 출항한 항구다. 안디옥에서 북으로 5마일 지점에 있으며, 육로로는 약 30분 걸린다. 실루기아 항구 방파제에서 지중해 검푸른 바다를 바라보면, 2000년 전에 배를 타고 구브로를 향하던 사도 바울의 뒷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실루기아는 수리아 왕 실루기스가 자기 이름을 따서 실루기아라는 성읍을 삼았고 그의 분묘도 이곳에 있다.
위 글은 교회신문 <269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