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2-02-08 13:27:30 ]
순금 제련 도가니 유적 300여 개나 발굴
이방인 제사 위한 신전도 웅장하게 꾸며
풍요 속에 사치와 음탕으로 하나님 잃어
사데는 주전 6세기경 소아시아 서부 지방인 리디안(Lydian) 왕국 수도였다. 서머나 동쪽 약 80km, 두아디라 남동쪽 약 48km 지점, 트몰러(Tmolus) 산 북쪽 기슭, 헐머스 평야 남단에 자리 잡은 오늘날 사르트(Sart)라는 마을이다. 그 당시는 대도시였지만 현재는 유적만 남아 있다.
사데를 끼고 흐르는 시내는 황금천이라 부를 만큼 사금(砂金)이 많았다. 그곳에서 크로이수스 왕은 마음껏 부를 누렸으며, 주전 700년경 세계 최초로 금으로 만든 각인주화(刻印鑄貨)를 만들어 사용했다.
리디안 왕국은 크로이수스(Croesus, 주전 560~546년) 왕 때가 전성기로 소아시아 서해안까지 국토를 넓혔다. 그 후 페르시아가 침입하자 번영하던 리디안 수도 사데(Sardis)는 주전 540년대 고레스(Cyrus)왕의 군대에 함락해 불태워졌으며, 이때에 크로이수스 왕도 불타 죽었다. 그 후 셀쥬크 왕조 영토가 되었다가 로마 속주가 됐다.
주후 1410~1414년 중에 미국 프린스턴대학팀이 아르테미스 신전과 리디안의 무덤을 발굴했고, 1958년 이후 미국 하버드대학과 코넬대학 합동 발굴단이 발굴 작업을 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순금을 제련하던 도가니를 무려 300개 이상이나 발굴했으며, 도가니 밑바닥에는 순금이 그대로 남아 있어 크로이수스 왕의 전설적인 부(富)가 역사적 사실임이 분명히 밝혀졌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주전 330년대 알렉산더대왕의 명령으로 건축해 임신, 출산, 다산과 풍요의 여신으로 숭배했다. 이 신전은 길이 100m, 폭 50m로 큰 규모의 신전이었다. 그곳에 석주 78개와 18m 높이인 이오니아식 석주 두 개가 서 있어 웅장한 신전이었음을 말없이 입증해 준다.
<사진설명> 현재 사데에는 아르테미스 신전 유적이 웅장하게 남아 있다. 남쪽 강단 밖에 있는 붉은 벽돌로 된 작은 터전의 유적은 비잔틴 시대에 교회를 세웠던 곳이다. 교회와 신전 규모를 보아도 이 도시가 얼마나 하나님을 멸시했는지를 알 수 있다.
아르테미스 신전 남쪽 강단 밖에 있는 붉은 벽돌로 된 작은 터전의 유적은 비잔틴 시대에 교회를 세웠던 곳이다. 최초에는 아르테미스 신전을 교회로 사용하다가 강단 밖에 작은 교회를 세우고 예배를 드렸다.
주후 3세기에 대리석으로 건축한 김나지움(Gymnasium, 체육관) 유적이 있다. 로마 시대에 건축한 체육관으로 전면 부분은 복원됐다. 김나지움 옆에는 1000명 이상 들어갈 시나고그(Synagogue, 유대교 회당)가 발굴되어 지금까지 알려진 회당 중 최대 규모다.
이 밖의 유적에서 페르시아 시대 토기 조각, 크로이수스 왕의 각인이 있는 금화(金貨), 로마 시대 목욕장, 스타디움(Stadium) 등 비잔틴 시대 유적과 유물이 많이 발견됐다.
그 결과, 리디아 시대뿐 아니라 주전 7~6세기에 걸친 오랜 기간에 동서 교통 요충지로 번영하였음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해 주었다.
이곳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부도덕한 제사의식이 거행됐다. 요한계시록에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는 경고를 받은 것도 이 같은 부도덕한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계3:1). 사데교회는 라오디게아교회와 더불어 일곱 교회 중에 칭찬이 없고 책망만 받은 교회였다.
사데는 상공업 도시로 번영했으며, 직물과 귀금속 생산지로 이름이 났다. 풍요 속에 사치와 음탕에 빠졌고, 교회는 신앙의 이름과 형식은 있었으나 생명력이 없었다. 그래서 회개를 촉구했고 회개치 않으면 주님이 도적같이 오실 때 알지 못한다고 했다(계3:3).
위 글은 교회신문 <276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