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5-07-14 09:25:53 ]
가이샤라는 갈멜산에서 남쪽으로 37km 지점에 있는 팔레스타인 해안도시다. 확 트인 지중해 바다를 앞마당으로 삼고 지금까지 고대도시 유적을 그대로 담고 있고 항구 도시 가이사랴. 헤롯 대왕이 자신에게 권력을 준 로마의 아우구스티누스 황제를 기념하여 도시 이름을 붙였다.
<사진설명> 가이사랴 위치. 가이사랴 항구.
기원전 22년부터 12년 공사 끝에 세웠다. 헤롯이 이런 큰 항구도시를 건설한 이유는 자신이 이스라엘의 위대한 통치자라는 것을 대내외에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만큼 가이사랴는 당시 로마 총독 관저가 있던 이스라엘 식민 통치의 심장부이기도 했다.
거대도시 가이사랴의 건설비용을 충당하고자 헤롯 대왕은 조세와 관세를 더욱 가혹하게 거둬들였고 그 때문에 로마와 헤롯의 통치 기간에 유대 백성의 삶은 극도로 궁핍했다. 또 로마의 앞잡이였던 유대인 세금 징수원인 세리는 가혹한 세금포탈로 백성들의 삶을 더욱 도탄에 빠트렸다. 많은 사람이 먹고살기 어려워서 떠돌이와 노예로 전략해야 했던 시대였다.
가이사랴 바닷가 방파제에는 유대 노예들이 로마로 팔려갔던 선착장이 있다. 현재는, 돌로 세웠던 거대한 방파제만이 허물어진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다. 안디옥과 함께 지중해 3대 항구였던 가이사랴. 이곳은 로마로 가는 직항로로서 식민지배 물자를 대는 주요 교통로였고, 아라비아까지 연결되는 천연 직항로여서 국제 무역선들의 중심 뱃길이었다.
전 세계에 대제국을 세우려던 팍스 로마, 그 거대왕국의 군대와 무역이 편리한 해상로를 통해 뻗어 나갔던 것이다. 또한 가이사랴 항구는 세계 복음화의 첫 출항지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바울이 로마로 호송되었고 300년 후 로마는 세계 기독교 전파의 기수가 되었다.
윤석전 목사(연세중앙교회): 유대인들이 로마의 통치 밑에 있으면서 얼마나 간절히 그들을 구원할 메시아를 기다렸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그 당시 로마 총독부가 가이사랴 지역에 있었는데, 이유는 무엇인가요?
홍순화(한국성서지리연구원장): 그것은 헤롯왕 때문입니다. 헤롯 왕이 로마에 충성을 바치고, 분봉왕으로서 자기 역량을 과시하려고 알렉산드리아와 같은 큰 무역항을 유대에 지었는데 그곳이 바로 가이사랴입니다. 헤롯이 세워 바친 항구도시 가이사랴를 로마가 접수해서 총독부를 세운 것입니다.
가이사랴를 그런 대상지로 삼은 이유는 첫째, 해안도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해안도로는 이집트에서 중동지방 전체로 지나가는 제일 큰 국제도로였습니다. 그 길을 빼놓고는 역사를 논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세계 역사와 흐름을 같이한 큰 도로입니다.
둘째 이유는 바닷가에 있었다는 점입니다. 로마 사람들은 바닷길을 잘 이용했습니다. 늘 바다를 이용해서 무역과 군인이동이 가능했기 때문에 가이사랴를 총독부로 삼고 유대지방을 통치한 것입니다.
셋째 이유는, 그 지역이 해안평야지대라는 점입니다. 평야지대로 매우 비옥한 땅이고, 모든 도로의 중심이었습니다. 가이사랴에서부터 예루살렘과 유대지역을 연결하는 도로의 중심지에 있었기 때문에 가이사랴에 총독부가 있었던 것입니다.
윤석전 목사: 로마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리던 핵심 부대가 가이사랴에 있었다고 했는데, 그 당시 로마는 이스라엘을 어떤 방법으로 통치했나요?
유병우 교수(한영신학대학교 신약학): 로마의 행정력은 매우 뛰어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라는 황제는 로마제국을 총 32개 속주(屬州)로 나눕니다. 속주에 따라 중요도가 다릅니다. 오래되고 안정된 지역은 직속령이라고 합니다. 로마 황제가 중앙에서 집정관을 보내어 직접 통치하는 지역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성경에 나오는 마케도니아나 아가야가 직속령이었습니다. 기타 중요성이 덜한 지역은 총독이나 행정장관들을 보내서 로마가 직접 통치했습니다. 시리아나 갈라디아가 그렇습니다. 성경에는 총독이나 지방장관, 행정장관을 정확하게 구분하지 않고 그냥 총독이라고 번역한 면이 있기는 합니다.
이 밖에 로마의 통치 방법을 엿볼 수 있는 곳이 유대지역입니다. 이 지역은 로마에서 직접 총독이나 행정장관을 보내지 않고 그 지역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토착 세력을 왕으로 세워서 그들로 하여금 현지인을 통치하게 하는 간접통치 방식을 취했습니다. 보통 이런 것이 영주(領主) 방식이었는데, 이들에게는 군사나 외교적인 권한은 없고, 제한적으로 민사나 행정권만을 갖는 통치구조입니다.
<사진설명> 가이사랴 원형극장. 가이사랴에 헤롯 대왕의 작품으로 남아 있는 또 하나의 걸작품이 원형극장이다. 이곳은 현재도 매우 훌륭한 무대공연장으로 각광 받고 있다. 서쪽에 지중해 바다를 바라보며 3400명이 관람할 수 있는 거대한 객석은 건설 당시의 원형이 거의 손상 없이 보존되어 있다. 준공 당시인 기원전 10년에도 대단한 기념행사가 개최되었다는데 오늘날에도 오케스트라를 대동한 수많은 무대 공연이 치러지고 있다.
윤석전 목사: 로마에서 통치자를 보내서 유대민족을 다스릴 때 유대 백성들이 항거할 법도 한데, 실제로는 그런 역사가 없습니다. 로마가 얼마나 통치를 잘했기에 항거하지 않았는지 궁금합니다.
유병우 교수: 헤롯 대왕이 집권하던 시기는 상당히 안정적이었습니다. 그만큼 폭압적으로 강력하게 지배했다는 뜻입니다. 헤롯 대왕이 죽고 유대 지역이 아들들에게 분할되면서 사실은 그동안 쌓였던 불만세력이 드러났고 각종 반란이나 항거도 많이 일어났다고 봐야 합니다.
윤석전 목사: 로마의 유대인 통치 중심지였던 가이사랴가 화려했다고 하는데, 그 정도가 어떠했나요?
홍순화 원장: 모든 로마 유적지를 보면 매우 놀랍습니다. 그 시대에 어떻게 저런 시설이 있었을까 하는 점 때문입니다. 가이사랴뿐만 아니라 로마가 통치했던 모든 도시에 대형극장, 운동장, 대중목욕탕 시설이 있었습니다. 모든 곳이 화려하지만, 특히 가이사랴는 헤롯 왕의 야심작입니다. 자기의 역량도 보여 주고, 충성심도 과시하기 위해서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도시 이름도 가이사에게 바쳤다 해서 가이사랴입니다. 헤롯 왕은 건축광이라 모든 것에 화려함의 극치를 취해서 제대로 만들었습니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그 지역에 가 보시면 알지만, 인공 항구를 건설했다는 점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지역은 해안 쪽이 취약해서 항구를 만들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헤롯 왕은 도저히 정상적인 항구를 건설할 수 없는 그 지역에 인공으로 방파제를 쌓아서 가이사랴를 항구도시로 만든 것입니다. 얼마나 화려했는지는 고고학자들이 그린 복원상상도를 보면 규모도 대단했고 정말 화려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윤석전 목사: 성지순례 때 가이사랴 원형극장에 갔는데, 바람이 바다에서 객석 쪽으로 부니까 무대에서 육성으로 말해도 수많은 관객에게 다 들렸습니다. 그 당시에 이런 과학적인 구조로 건축한 점은 참 대단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큰 역사(役事)를 이루려고 얼마나 많은 백성이 세금 출혈을 했고, 그 일을 위해 얼마나 노동을 착취당했을까요. 등골이 빠질 정도로 심한 노역을 했을 텐데, 그때 상황을 말씀해 주시죠.
유병우 교수: 당시는 총체적 위기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 유사한 상황이 많이 드러납니다. 당시에도 팔레스타인 경제는 농업에 기반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이 땅을 소유하지 못하고 부재지주들의 땅을 의탁받아 농사지어서 세금 떼고 뭐 떼고 하다 보니 농민들의 생활이 극도로 피폐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나말여초(羅末麗初), 여말선초(麗末鮮初) 때 지방 호족들이 발호하고 농민들은 토지를 버리고 도적 떼가 되었던 상황과 유사하다고 하겠습니다.
특별히 가이사랴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데, 기원전 22년부터 헤롯 대왕이 단지 로마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고 지었습니다. ‘가이사랴’는 라틴어 발음으로 ‘캐사르’인데 곧 시저, 황제를 뜻합니다. 자기의 정치적인 욕심을 채우려고 가이사랴를 지을 때 얼마나 많은 비용과 노동력이 들어갔겠습니까. 물론 가이사랴를 건설한 헤롯의 또 한 가지 정치적인 야심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중동과 로마 간에 무역이 활발했는데, 무역의 중심이 알렉산드리아여서 이것을 가이사랴로 빼앗아 오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경제적인 이득은 많이 생길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헤롯이 벌였던 수많은 건축사업이 이런 경제적인 이득으로 뒷받침됐다고 보기는 어렵고, 그 당시 농업에 기반을 둔 소작농들을 수탈해서 지었다고 보는 것이 맞겠지요.
윤석전 목사: 헤롯의 정치적 야욕과 로마인들의 화려함, 그 모든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유대민족들이 얼마나 고통 속에 노동력을 착취당했겠습니까. 그러니 그들은 더더욱 그들을 구원하고 고통에서 건져 줄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렸을 것입니다.
홍순화 원장: 가이사랴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 있습니다. 가이사랴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메시아를 기다리고,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되기를 기다리는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는 노예가 흔할 때였습니다. 유대인 노예들을 가이사랴에 모아놓고 거기에서 로마까지 배로 태워갔습니다. 그 당시에는 많은 유대인이 노예로 잡혀 가이사랴에서 로마로 끌려갔습니다. 그런 점에서 가이사랴는 원한의 장소입니다. 사도 바울이 죄수가 되어서 로마로 재판을 받으러 갈 때 가이사랴에서 약 2년간 머물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가이사랴 하면 사도 바울이 생각나고, 로마의 압제가 생각나는 곳이지요.
윤석전 목사: 유대인들이 로마 식민지 통치 아래에서 로마인들의 화려함과 정치적 욕구라든지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수행하려고 많은 착취와 고통과 어려움과 때로는 죽음과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그들이 기다린 것은 오직 메시아였습니다. 메시아가 언제 와서 우리를 고통 속에서 해방시키는가, 간절히 기다리고 소망했을 것입니다.
유병우 교수: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대단했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측면뿐 아니라 종교적.정신적인 문제도 유대인들에게는 부담이었을 것입니다. 헬레니즘 시대는 인류 최초의 세계화 시대라고 봅니다. 모든 문화가 헬레니즘으로 통합이 되는 과정에서 가장 문제시된 것이 유대민족이었습니다. 알다시피 유대인은 2000년간 나라가 없었는데도 그들의 민족적인 고유성을 잃지 않은 끈기 있고 강한 민족입니다. 그들 문화의 독특성이 헬라화라고 하는 대세 속에 휘말려 들어가면서 거기서 일어나는 문화적 갈등과 종교적.사상적 갈등이 경제적인 수탈 못지않게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오히려 더 그들에게 메시아 희망을 증폭시키는 상황을 만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계속>
<윤석전 목사 탐사기행 ‘성서의 땅을 가다’는 www.ybstv.com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442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