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와 함께하는 ‘성서의 땅을 가다’(12)] 베드로의 신앙고백 장소, 가이사랴 빌립보

등록날짜 [ 2015-09-22 16:43:28 ]

가이사랴 빌립보는 헬몬산 남쪽, 경사가 심한 산간에 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기원후 34년 헤롯왕의 아들 빌립이 도시를 확장하여 로마 황제 아우구스를 기리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다. 현재 는 ‘바니아스’라고 불린다. 국립공원답게 관광객들로 늘 붐비는 이곳은 이스라엘 전역으로 흐르는 헬몬산 물의 발원지다. 그 덕분에 맑고 풍부한 물이 넘쳐나 구약시대부터 현재까지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 중 하나로 손꼽힌다.

 

히랍 문명의 중심지로, 로마.비잔틴.십자가군 시대에 걸쳐 요지 역할을 했다. 성경에서도 가이사랴 빌립보는 매우 중요한 도시다. 예수께서는 생애 후반부에 제자들과 함께 이곳을 찾아 질문하셨다.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16:13;막8:27;눅9:20).

 

베드로는 과감하게 주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 당시 갈릴리나 예루살렘에서는 이미 예수님을 문제 인물로 인식했고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나눈 이 대화는 예수께서 천국 복음의 주관자로 세상 정면에 나서신 것을 의미했다.

 

<사진설명> 가이사랴 빌립보. 베드로가 예수 그리도스께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장소.



윤석전 목사(연세중앙교회): 가이사랴 빌립보에 갔을 때, 뒤안길에는 물이 넘쳐 흐르고, 주변에 냇가도 많아 물 흐르는 소리가 대단히 세차게 들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이 물의 발원지가 과연 어디일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가 특별한 장소라고 하는데 어떤 점에서 그런지 궁금합니다.

 

홍순화 원장(한국성서지리원): 가이사랴 빌립보는 첫째, 종교적으로 특별한 장소였습니다. 그곳에는 ‘판(Pan, 헤르메스 신의 아들로서 목양신)’ 신을 섬기는 신전이 있었습니다. 그 지역은 당시 판 신전을 위시하여 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그곳에 가 보면 무척 신비합니다. 뒤쪽에는 동굴이 있고 신전 터가 군데군데 있어 경치가 아름답습니다.

 

둘째, 가이사랴 빌립보는 정치적으로 특별한 장소였습니다. 헤롯 빌립이 통치하는 지역이었는데 이곳을 수도로 삼았습니다. ‘가이사랴’라고 불리는 장소가 두 군데였는데 빌립은 지중해 연안의 항구 도시 ‘가이사랴’와 구별하려고 자신의 이름 을 붙였습니다. 수도여서 한적하지는 않았습니다.

 

셋째, 가이사랴 빌립보가 특별한 이유는 요단강의 발원지 중 한 곳이라는 점 때문입니다. 이곳은 산 중턱에서 물이 갑자기 흘러나옵니다. 아주 신비합니다. 이곳에는 암벽을 파서 만든 굴 형태의 판 신전이 있습니다. 거기서 물을 따라 3~4km 정도 내려가면 높이 10m ‘바니야스 폭포’가 나옵니다. 정말 아름답습니다.

 

이처럼 가이사랴 빌립보는 종교적, 정치적, 지리적인 의미에서 특별한 장소입니다.

 

윤석전 목사: 지금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홍순화 원장: 이스라엘에 가면 감탄하는 점이 있습니다. 성경 배경이 되는 12개국 중 이스라엘은 유적지가 많을뿐더러 잘 정리되어 있어 성경 유적지를 무척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국립공원을 잘 정비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역사적인 장소, 성경과 관련한 장소,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장소를 국립공원으로 지정.관리하고 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은 유대인보다는 기독교인에게 특별한 곳인데도 경치가 무척 아름답기 때문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윤석전 목사: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성경의 핵심 내용을 고백했습니다. 예수께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 하고 물으실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예수님께서 크게 기뻐하시면서 큰 축복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고백의 신학적 의미를 설명해 주십시오.

 

조경철 교수(감리교 신학대학교 신약학):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복음서마다 약간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일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에서는 “주는 그리스도이시니이다”(막8:29)라고 간단히 기록한 것에 비해, 마태복음에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완벽하고 발전한 신앙고백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드냐” 하시니 제자들은 “침례 요한 혹 엘리야라고도 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시니 제자들을 대표해서 베드로가 그 신앙고백을 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점은 유대인의 메시아에 대한 기대, 즉 메시아 대망(待望) 사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즉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처형당한 침례 요한이 다시 살아날 것이다’ 혹은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환생할 것이다’라는 일종의 민중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많은 이적과 능력을 행하실 때, 유대 군중이 ‘혹시 침례 요한이 다시 살아온 것은 아닐까’ ‘혹시 엘리야가 아닐까’ 하고 웅성거렸습니다.

 

그에 비해 제자를 대표하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예수의 정체와 본질의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복음서를 읽어 보면 베드로가 한 신앙고백도 결국 온전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뒤이어 베드로가 예수님께 심한 책망을 받은 점을 보면, 그가 한 신앙고백에 담긴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좀 더 살펴봐야 합니다.

 

윤석전 목사: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후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라는 뜻으로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6:19). 제자들에게 복음 전도라는 사명을 부여하는 모습은 우리도 복음을 받은 후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는 물과 동굴이 많아 당시 천연 예배지로 유명했기에 우상숭배의 중심지였다. 특히 풍요와 다산의 신인 판(Pan) 신전이 있던 곳인데 바로 그 자리에서 베드로의 위대한 고백이 나왔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이 고백은 예수님의 정체를 밝힌 명답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온전한 신앙고백을 통해 제자들의 영적 성장을 이루려 하셨다. 즉 왕이신 자신을 알리고 자기를 따르는 자가 지켜야 할 규례를 교육하셨던 것이다.

 

“또 내가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이때부터 예수께서는 자신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 그리고 심판을 예고하셨다. 이것은 당시 유대교에 대한 도전이었다.

 

 

<사진설명> 주전 3세기 전부터 가이사랴 빌립보는 이방 신에게 제사하는 곳이었으며, 로마의 트라얀(AD 98~117년) 황제는 이곳에 이방 신에게 제사하는 대규모 건축물을 세우기도 했다.


 

윤석전 목사: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베드로의 고백을 주님이 기뻐하셨습니다. 그 고백을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홍순화 원장: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이런 신앙고백이 나온 첫째 이유는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예루살렘과 멀리 떨어져 있고, 갈릴리호수와도 북쪽으로 40㎞ 정도 떨어진 장소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특별한 질문을 하러 이곳에 가신 듯합니다. 둘째 이유로 가이사랴 빌립보는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헬라, 로마 문명의 중심지였고 다메섹으로 가던 주 통로와 접해 있었습니다. 성경지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성경에서 특별한 사건이 일어난 장소들은 평범한 장소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런 면에서 가이사랴 빌립보는 특별한 장소입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특별한 장소에서 예수님께서 특별한 질문을 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윤석전 목사: 조 교수님, 예수께서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의 신학적 의미가 무엇인지 말씀해 주세요.

 

조경철 교수: 베드로라는 이름이 사실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축복해 주시고 이어서 천국의 열쇠를 맡기는 축복의 말씀을 해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태복음 본문을 연구해 보면 예수님의 축복이 베드로라는 한 개인에게 주는 것이라기보다는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해서 말한 ‘신앙고백’을 축복한 내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신앙고백은 교회가 세워지는 토대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하나님의 살아 계신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그곳에 교회가 섭니다. 교회는 특정한 인물의 인격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는 신앙고백 위에 세워집니다. 이런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축복은 이런 교회를 향한 축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윤석전 목사: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생애는 영원히 부서지지 않는 암석이요. 그분에 대한 신앙고백은 영원히 부서지지 않는 반석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삶과 우리의 믿음은 영원히 깨지지 않아야 한다는 영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기뻐하시고 칭찬하신 후 “내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조경철 교수: 마가복음을 읽어 보면 참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귀가 제일 먼저 예수님의 정체를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막3:11).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계하셨습니다(막3:12). 복음서에는 벙어리가 말하고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걷는 이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적을 체험한 사람들에게도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마라”고 말씀하십니다(막1:44). 마찬가지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있었던 베드로의 신앙고백도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마16:20). 전도하려면 ‘예수님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에게 전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비밀로 하라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이 신기한 현상을 ‘메시아의 비밀’이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위에서 언급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진정한 신앙고백이 될 수 없었던 이유가 여기서 밝혀집니다. 예수님께서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막8:31), 고난과 부활을 예고했을 때,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청합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곧이어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책망하십니다(마16:23). 이를 보면, 앞서 했던 베드로의 고백이 진정한 신앙고백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신앙고백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을 때 나옵니다. 마가복음 15장 39절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모습을 바라보고 이방인 로마인 백부장이 고백합니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에 달려 죽어 가고 있는 예수, 십자가에서 고난당하는 예수를 알지 않고, 경험하지 않고 그저 이적이 일어난 황홀하고 좋은 것만 경험해서 예수를 고백하는 것은 진정한 고백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축복받고 질병을 치유받는 황홀한 경험으로 예수님께 드리는 진정한 신앙고백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고난받고, 죽음까지 가는 순교적인 삶을 통해 진정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이 있기까지 자신에 대한 진정한 신앙고백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마귀에게, 고침받은 사람들에게 침묵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윤석전 목사: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입니다. 베드로는 “주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님께서 기뻐 원하시는 고백도 했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기 전에는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는 고백도 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이 가는 길을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고 하여 주님의 책망을 받았습니다(마16:22).

 

또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실 때 그를 모른다고 부인하다가 새벽닭이 울 때 통곡했습니다(눅22:61~62). 우리 인간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릅니다. 그 후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대로 마가다락방에서 성령을 충만하게 받고 난 다음부터 성령에 의해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죽을 때까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아니하고 순교하기까지 주님을 사랑하며 복음 전파하는 생애를 마쳤습니다.

 

우리가 많은 지식과 상식을 쌓고 공부해서 예수를 고백한다 할지라도 실제로 끝까지 주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신앙이 어찌 보장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성령 충만하여 성령 안에서 진실로 예수를 고백하면서 끝없이 믿음 안에서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계속>

<윤석전 목사 탐사기행 ‘성서의 땅을 가다’는 www.ybstv.com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452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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