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와 함께하는 ‘성서의 땅을 가다’(16)] 인류의 모든 죄를 담당하려 걸으신 길

등록날짜 [ 2015-10-28 00:53:36 ]

 윤석전 목사(연세중앙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하면 죗값으로 지옥 형벌을 피하지 못할 우리 인류를 대신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그 죄를 담당하시려 모진 고난을 당하시고 최후에 십자가에 매달려 피 흘려 죽으신 그 극심한 고통이 떠오릅니다. 그 수난이 바로 우리를 사랑하신 분량입니다. 

 

수치와 멸시와 아픔, 그리고 죽음. 이 모든 것은 우리를 대신하신 고난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뭉클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슴이 젖어듭니다. 그 십자가의 길,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의 현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사진설명> 빌라도 법정이 있던 자리로 예수의 십자가 형을 확정한 곳. 현재는 학교로 사용하고 있다(제1처소).
 

2000여 년 전, 빌라도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으신 예수께서는 유월절을 앞둔 예비일에 십자가를 짊어지고 죽음의 언덕 골고다로 향했다. 십자가 형이라는 극적 판결을 내리기 전,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말했다.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보라 저(예수)의 행한 것은 죽일 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눅23:14~16).

 

하지만 유대 백성들은 큰 소리로 외쳤다. 

“저(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눅23:21).

 

빌라도는 하는 수 없이 민란과 살인의 주모자 바나바를 내주고 대신 예수를 저희에게 내주어 뜻대로 하게 했다. 이 죽음의 행진 앞에서 예수께서는 분노치 않았다. 그것은 사랑으로 죽음을 넘어선 자만이 보여 주는 위대함이었다.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심판을 받았다는 박석(석판이 갈린 포장도로, 리토스트로토스, 제1처소) 맞은 편에는 현재 선고교회(제2처소)와 채찍질교회(제2처소)가 세워져 있다. 예수께서는 사형선고를 받기 전, 이미 빌라도의 명에 따라 사십에 하나 감한 심한 채찍질을 당했다.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을 총독 관저 뜰아래로 끌고 들어가 채찍질하고 홍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씌운 후 손바닥으로 때리며 희롱했다. 바로 그 자리가 채찍질교회다. 그 맞은편은 빌라도가 민란이 두려워 예수에게 십자가 형을 선고한 곳으로, 채찍질에 맞아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려고 골고다를 향해 출발한 그 장소다. 

 

‘비아 돌로로사’, 즉 ‘슬픔의 길’이라고 부르는 길은 예수께서 빌라도 법정에서부터 십자가에 달리셨던 골고다까지 걸어가셨다고 믿는 길이다. ‘비아 돌로로사’ 곳곳에는 당시 슬픈 행진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가 있다. 인류의 영혼을 구원하고자 자신을 송두리째 내놓은 메시아의 고독한 행진은 건장한 로마 군병에게 맞은 심한 채찍질 탓에 잠시 멈춘다. 그곳에서 예수께서 첫 번째로 넘어지신다(제3처소). 이때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아들을 잠시나마 보려고 비탄에 젖은 채 길모퉁이에 가까스로 서 있다. 

 

십자가를 진 예수가 어머니 마리아와 눈을 마주친다(제4처소). 그리고 마리아는 통곡했다. 


<사진설명> 선고교회. 맞은편에 채찍질교회가 있다(제2처소).
 

 

윤석전 목사: 많은 성지순례객이 비아 돌로로사를 예수님이 걸으신 십자가의 길이라고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에 관해 설명해 주십시오.

 

홍순화 원장(한국성서지리원): ‘비아 돌로로사’는 ‘슬픔의 길’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재판받은 안토니아 요새를 제1처소로 봅니다. 예루살렘 성전 북서쪽 모퉁이에 있습니다. 십자가 길은 제1처소부터 제14처소까지 있는데, 제1처소부터 제8처소까지는 비아 돌로로사라는 길 위에, 제9처소부터는 성묘교회 안에 있습니다.

 

제1처소에 가 보면 예루살렘 서쪽 벽 터널(The Western Tunnel) 출구가 있습니다. 서쪽 벽 터널에는 예수님 당시의 도로와 유적들이 보존돼 있습니다. 그곳에 있는 돌들이 바로 2000여 년 전, 예수님 시대 돌입니다. 이곳에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모습을 예수님 시대 도로로 쓰던 돌 위에 그려 놓은 그림이 있습니다. 

 

윤석전 목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걸어간 길을 기념하는 14처소 중, 가장 주의 깊게 살펴볼 곳이 어디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홍순화 원장: 제1처소인 안토니아 요새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신 곳입니다(요18:28). 안토니아 요새에는 가이사랴에서 올라온 총독 빌라도가 머물고 있었습니다. 또 제1처소 맞은편 길에 있는 제2처소도 중요합니다. 예수께서 채찍질당하고 가시관을 쓰시고 홍포를 입고 희롱당한 장소입니다(요9:15). 그 위에 세운 채찍질교회와 사형선고를 받은 장소에 세운 선고교회 두 곳을 제2처소라고 합니다. 또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진 장소로 알려져 있는 제5처소도 중요합니다(막15:21). 제9처소부터는 성묘교회입니다. 이곳에서는 특히 로마 병사들이 예수님의 옷을 벗긴 장소로 추정하는 제10처소가 중요합니다(막15:20). 

 

윤석전 목사: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다면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을 행하시고, 정치.사회적으로 볼 때도 무척 큰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매달려 피 흘려 죽으신 것은 죄와 저주와 사망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은 예수님을 악착같이 죽이려고 했는데 신학적 측면에서 볼 때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요?

 

조경철 교수(감리교 신학대학교 신약학):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유대 지도자들은 자신이 누리고 있던 정치.종교.사회적 기득권을 예수님이 파괴하고 공격하자 큰 위협을 느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성전에서 비둘기를 파는 자와 돈을 바꿔 주는 사람의 상을 뒤엎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이 성전 정화 사건을 자기들의 기득권에 대한 도전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또 예수께서는 안식일 계명을 새롭게 해석하시고,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고 살리셨습니다(막2:23~3:5). 바리새인, 율법학자, 서기관들은 이 행동이 자기의 고유한 종교적 기득권을 예수께서 공격한다고 봤기에 예수님을 죽여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둘째, 수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라다녔기에 혹시나 정치.군사적 반란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한 사람을 죽여서 많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낫다’는 말씀이 있습니다(요11:50). 그 구절을 근거로 예수 한 사람을 죽임으로써 많은 유대인 백성을 살리게 되었다고 얘기합니다. 결과적으로 그 말은, 역설적이게도 예수님 죽음의 의미를 정확하게 지적한 말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죽음으로써 인류 전체가 구원받게 되었으니까요.



<사진설명> 예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시다 쓰러져 구레네 시몬이 대신 십자가를 짊어진 장소(제5처소).

 

제5처소는 가파른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지점이다. 예수께서는 이곳에서 십자가를 더는 감당치 못하셨고 마침 그곳을 지나던 구레네 사람 시몬이 억지로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된다. 구레네 시몬은 훗날 로마교회 지도자가 된 루포(Rufus)의 아비인데 얼떨결에 십자가를 졌지만 결국 시몬의 가정이 구원을 받는 하나님의 축복을 얻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행렬은 예루살렘성 밖으로 나가는 문을 지나고, 피와 땀으로 기진맥진한 예수께서는 다시 한 번 가던 길에서 쓰러지고 만다.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며 선포하고 온갖 이적을 행했던 나사렛 출신의 한 청년 예수. 그는 자신이 가슴 저리게 사랑했던 것들을 위해 죽음의 길을 걸었다. 그가 사랑한 대상은 인간이었고 그 사랑을 이루기 위해, 인류 구원이라는 애타는 소망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그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사랑으로 허문 행위였으며 메시아만이 보여 줄 수 있는 무조건적인 사랑이었다. 성경은 이것을 이미 예언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53:4).

 

골고다 언덕은 더욱 가까워졌고 예수께서는 죽음을 향해 나아갔다. 움직이는 발걸음마다 땅은 피로 물들었지만 그래도 그는 가야만 했다. 그것만이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해 낼 유일한 방법임을 알았기에 예수님의 걸음은 한결같이 이어져야만 했다. 그러나 지친 육체는 또다시 허물어지고 만다. 인간이 누구이기에 그들을 대신해서 그렇게 십자가를 지셨는가.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죗값으로 영원한 멸망을 받기에 인간의 멸망을 해결하려고 자기 아들을 그토록 고통스럽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실감나게 느껴진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사진설명> 십자가의 길.

 

윤석전 목사: 성경에 빌라도는 예수님을 아무리 신문해 봐도 죽일 만한 죄가 없기에 채찍으로 때려서 놓아주자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결국에는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신학에서는 이를 어떻게 해석하는지요?

 

조경철 교수: 빌라도는 아주 잔인하고 권력 집착력이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만약 유대인의 왕이라고 고발된 예수에게 무죄 판결을 내려 풀어 주면, 유대인들이 ‘로마 황제에게 이 사실을 낱낱이 일러바쳐 당신의 총독 자리를 위태롭게 하겠다’는 압력이 빌라도에게 들어간 것입니다. 즉 빌라도는 잘못된 여론몰이와 자신의 총독 자리를 지키려는 권력욕으로 죄가 없다고 확신한 예수님을 십자가 형에 처하고 말아 인류 역사에 만고의 죄인으로 불리는 불행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윤석전 목사: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당시 그렇게 환영하던 군중이 돌변하여 예수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조경철 교수: 복음서를 읽다 보면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군중의 태도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왜 저렇게 변했을까 싶지만, 사실 그것은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유대 군중은 자기들의 개인적, 현실적, 민족적, 정치적 욕구가 충족될 때는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환대하며 왕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 그 기대와 욕구가 허물어지자 예수를 죽이려고 합니다. 예수가 진정 누구인지 깨닫고 알고 믿기 전에는, 우리도 당시의 군중처럼 어느 순간 갑자기 변할 가능성이 늘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윤석전 목사: 다른 이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누명을 쓰더라도 말없이, 끝까지 이웃을 보호하고 사랑하며 나가는 자가 자기 몫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너희가 나를 따라오려거든 너희 자신을 부인하고 네 몫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아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들이여, 우리 모두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며 신앙생활에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계속>

<윤석전 목사 탐사기행 ‘성서의 땅을 가다’는 www.ybstv.com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456호> 기사입니다.

    아이디 로그인

    아이디 회원가입을 하시겠습니까?
    회원가입 바로가기

    아이디/비번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