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와 함께하는 ‘성서의 땅을 가다’(19)] 사도 바울의 출생지 ‘다소’ 지역

등록날짜 [ 2015-11-17 20:10:44 ]

윤석전 목사(연세중앙교회): 주님을 그토록 사랑한 바울, 주를 위하여 자기 생애를 전부 바친 사도 바울은 목회자들이 선망하는 대상입니다. 바울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하지도 못합니다.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자기를 내놓고 복음을 전한 바울의 생애와 그의 놀라운 사역이 시작된 곳, 사도 바울의 출생지 ‘다소’를 살펴보겠습니다.

 

다소에 있는 바울 생가 터(유리관 아래쪽)와 우물.


 

터키 남쪽 서아시아 남동해안에는 사도 바울이 태어난 고향 ‘다소’가 있다. 지금은 ‘테르수스’라고 부르는 이곳은 인구 8만 명이 살고 있는 작은 도시다. 바울 당시 다소는 주전 66년 로마에 편입한 속주국 ‘길리기아’의 수도로 상업과 교통의 요지였다.

 

길리기아 평원의 비옥함과 해안도로의 발달은 다소에 큰 부를 가져다주었다. 또 다소는 팍스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 1~2세기) 시대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였다. 그 덕분에 다소는 대학도시로서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를 능가할 정도로 철학과 문화가 발달했다. 바울은 다소와 로마의 시민권을 얻었고 당시 세계어인 헬라어를 일찍 익혔다. 이처럼 바울은 복음의 세계화를 위한 기틀을 어린 시절부터 갖췄다.

 

윤석전 목사: ‘다소’는 터키에 있습니다. 터키는 특히 기독교와 인연이 깊은데 이를 자세히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홍순화 원장(한국성서지리원): ‘터키’는 성경적으로 매우 중요한 나라입니다. 노아 홍수 때 비가 그치고 물이 감한 뒤 방주가 머물렀던 ‘아라랏 산’(창8:4)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살았던 ‘하란’(창11:31)이 바로 터키에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밧모 섬에서 돌아온 사도 요한이 머문 ‘에베소’ 지역이 있습니다.

 

또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교회(버가모, 서머나, 에베소, 두아디라, 시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교회)가 터키에 모여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울과 관계된 유적들입니다. 바울의 고향 다소와 전도여행을 다녔던 버가, 이고니온, 더베, 루스드라 지역을 비롯해 안디옥교회, 또 사도 바울이 지나갔던 항구들이 터키에 있습니다.

 

또 사도 바울이 전도하려고 터키 내륙 지방으로 가려 할 때 성령께서 환상을 보여 주셔서 마게도냐로 가게 하셨습니다(행16:8~11). 당시 환상을 본 장소 ‘드로아’ 지역도 터키에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터키는 구약.신약을 통틀어 매우 중요한 장소로서 우리가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윤석전 목사: 터키에 관해 알아보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 핵심 인물인 사도 바울이 터키 ‘다소’에서 태어났다는 점입니다. ‘다소’는 어떤 지역인지 설명해 주십시오.

 

홍순화 원장: 다소 북쪽에는 ‘길리기아 관문(關門)’이 있었습니다. 터키 해안 평야 부근에서 타우로스 산맥이 시작합니다. 그 산맥을 넘으면 해발 1000m 이상인 고지대가 계속 이어집니다. 타우로스 산맥이 높아 다른 지역으로 쉽게 이동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지역에서 가장 낮은 고개 ‘길리기아 관문’(해발 1050m)을 이용해 다른 지역으로 넘어갔습니다. 이처럼 다소는 그 당시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또 로마 시대 기록을 보면 다소에는 50만 명이 살았다고 해 얼마나 크고 번영한 도시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 그 지역은 아주 비옥한 평야 지대여서 모든 것이 풍부했습니다. 특산물로는 아마포가 유명합니다. 사도 바울이 천막 깁는 기술로 여행 경비를 충당했다고 말했듯이 당시 다소에서 천막 재료인 염소 털과 염소가죽이 생산됐습니다.

 

윤석전 목사: 사도 바울이 자란 ‘다소’는 기독교 역사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소개해 주세요.

 

조광호 교수(장신대 신약학): 다소는 ‘학문의 도시’로 유명했습니다. 바울 시대에 학문의 도시라면 세 곳을 꼽습니다. 알렉산드리아, 아테네 그리고 다소. 이처럼 다소는 교통과 상업과 산업과 교육의 도시로 매우 유명했고, 바울은 바로 이곳에서 세계 문물을 습득했습니다. 바울은 다소에서 헬라어로 기초 교육을 받았습니다.

 

또 신실한 유대인이었기에 가정에서 유대 교육을 철저히 받았습니다. 학교에서는 헬라 교육, 가정에선 유대 교육을 받았으므로 헬라와 유대, 두 문화를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다소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헬라 세계에 전파할 기초를 다졌습니다.

 

그리스 고린도에 있는 바울기념교회.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살아생전 겪었던 온갖 고난을 기쁨으로 인내했던 바울. 그 인내심은 바울이 사도로 회심한 이후 3년 만에 유대인의 박해를 피해 도망 와 다소에 머물렀던 약 9년간의 생활 속에서 다져진다. 그 후 바울은 이름도 빛도 없이 이방 세계의 복음화 사역에 삶을 온전히 내놓았다.

 

다소는 사도 바울이 세계복음화라는 소명을 이루는 데 필요한 사회적, 인성적 조건을 제공한 중요한 터전이었다. 견고하지 못했던 신앙의 지축을 오직 하나님에 대한 사랑만으로 다듬어 냈던 그 인내의 현장에서 우리는 왜 이리 작아지는 것일까.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3:10~11).

 

 

윤석전 목사: 유대인은 로마의 지배 아래서 식민지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 중에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어떻게 취득했는지 궁금합니다.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취득한 과정을 설명해 주십시오.

 

조광호 교수: 당시 이방인이 로마 시민권을 취득하는 방법에는 네 가지 정도가 있습니다. 첫째, 부모가 합법적으로 로마 시민권을 취득했을 경우. 둘째, 로마에 큰 공을 세웠을 경우. 셋째, 로마인 주인 밑에 노예로 있다가 해방되었을 경우. 넷째, 로마 군대에 20~25년 정도 장기간 복무했을 경우인데, 복무가 끝나면 자동으로 로마 시민권을 주었습니다.

 

여러 정황을 살펴볼 때, 바울의 부모는 팔레스타인이 로마 식민지로 편입하는 과정에 전쟁 포로로 잡혀 다소로 이동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해방되는 과정에서 로마 시민권을 취득해 바울이 상속받았으리라고 추측합니다.

 

윤석전 목사: 바울은 로마 시민권 외에 다소 시민권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소 시민권의 가치는 어느 정도인가요? 또 당시 시민권 취득 방법은 무엇이었는지 알려 주십시오.

 

조광호 교수: 사도행전 21장을 보면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성의 시민이니”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서 ‘다소성의 시민’은 다소의 시민권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날 때부터 다소 시민이었습니다. 그의 조상이 다소 시민권을 취득해 바울이 물려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의 조상이 다소 시민권을 어떻게 취득했는지는 세 가지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첫째, 다소가 그리스계 도시로 편입할 때, 바울의 조상이 다소에 정착하고 있어서 다소 시민권을 자동으로 취득한 경우. 둘째, 바울의 조상이 다소 시(市)에 공을 세운 경우. 셋째, 금전으로 취득한 경우입니다.

 

고대 기록에는 일용 노동자의 5년 치 봉급 분량인 500드라크마를 내면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또 아테네 시도 자기 도시의 수입을 늘리려고 시민권을 팔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의 부모나 조상은 금전으로 시민권을 사지 않았나 추측해 봅니다.

 

바울이 취득하기 어려운 시민권의 소유자라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 집안이 다소에서 사회적.경제적으로 인정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는 바울이 이방 세계에서 소외되지 않고 편입해 이방 문화를 접촉하고 헬라 문화를 배우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윤석전 목사: 그 당시 다소는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그 때문에 다소가 헬라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당시 헬라 문화의 영향력을 말씀해 주세요.

 

조광호 교수: 헬라 문화는 헬레니즘 문화를 말합니다. 헬레니즘(Hellenism)은 알렉산더 대왕이 세계 대제국을 이룩한 후 효율적으로 통치하려고 만든 ‘통치 체계’입니다. 로마인은 헬레니즘 문명을 동경해 그리스어를 배우면서 헬레니즘을 습득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예를 들면, 네로 황제가 즉위할 때 원로원에서 첫 연설을 합니다. 그때 로마 언어인 라틴어가 아니라 헬라어로 연설합니다. 자신이 매우 교양 있다는 점을 사람들에게 자랑하려는 것이지요. 이 정도로 헬레니즘은 당시 고급문화로 추앙받았습니다. 바울에게 헬레니즘이 중요한 이유는, 그 시대에는 헬레니즘으로 모든 세계가 통일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 제국 서쪽은 정식 공용어가 라틴어였고 동쪽은 헬라어였지만, 전 세계에서 통용되는 국제 언어는 헬라어였습니다. 따라서 성서 기자들도 아랍어와 라틴어가 아닌, 헬라어로 성서를 썼습니다. 헬레니즘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지 생각이나 사상을 마음대로 주고받을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헬레니즘 문화권에서 자랐고, 헬레니즘 문화 속에서 선교했기에 팔레스타인이라는 지리적인 한계성, 유대 전통에 존속된 사고의 한계성을 넘어 기독교를 좀 더 보편적으로 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헬레니즘은 기독교가 세계화하는 모판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소로 가는 옛 길.


 

윤석전 목사: 그 당시 헬레니즘이 유대인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습니까?

 

조광호 교수: 유대인에게 헬레니즘 문화는 한마디로 말하면 외래문화입니다. 헬레니즘 문화가 유대 땅에 들어오자 유대 전통 사상과 충돌을 일으킵니다. 예를 들면, 새로운 길이 놓이고, 무역이 발달하고, 용병 제도가 채택되어 많은 일자리가 생겼습니다. 여성에게는 교육받을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현실적으로 유대인이 체감할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헬라 문화는 기본적으로 이방신을 섬기는 외래문화였습니다. 따라서 전통사상,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굳게 간직하고 있던 유대인에게 헬레니즘 문화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대상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나라가 해방 이후 서구화를 겪었듯이 유대인도 헬레니즘 문화를 접하며 모든 문화 영역에서 대변혁을 겪었습니다.

 

윤석전 목사: 다소에서 성지순례를 하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합니까?

 

홍순화 교수: 터키는 남한의 7배 크기입니다. 면적이 무척 넓어서 충분한 시일을 두고 가야 합니다. 많은 분이 터키에 가서도 다소에 들르지 못하고 옵니다. 시간과 경비를 넉넉하게 준비하고, 교통수단으로는 비행기를 이용하면 좋습니다.

 

윤석전 목사: 바울은 회심한 이후, 자신에게 다가오는 온갖 역경을 그저 기쁨으로 맞이했습니다. 그런 바울의 삶을 되새길수록 그렇게 살 수 없는 저 자신의 무능이 더욱 애달프기만 합니다. 바울 생애 앞에서 우리의 모습은 너무도 초라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모습을 불쌍히 여기셔서 바울처럼 오직 주를 위해 살게 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어느 때, 어느 곳에 있든지 자신이 자라난 과정, 환경을 무시하지 말고 그 환경 속에서 내가 감당할 그리스도의 일이 무엇인지 찾아봐야 합니다. 바울의 생애를 바라보며 우리도 하나님께 값지게 사용되고, 오늘도 하나님을 기억하는 하루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계속>

 

<윤석전 목사 탐사기행 ‘성서의 땅을 가다’는 www.ybstv.com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459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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