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5-12-10 09:43:44 ]
윤석전 목사(연세중앙교회): 하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3)라는 말씀을 가르치시려고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40년간 훈련하셨습니다. 예수께서도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셨습니다. 바울 역시 예수님을 만나 회심한 후, 복음 증거에 앞서 아라비아 ‘광야’로 향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처럼 광야는 하나님의 일을 준비하는 데 값지게 사용된 장소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회심 후에 제일 먼저 간 지역, 아라비아 광야를 살펴보겠습니다.
아라비아 광야.
서남아시아에 있는 아라비아는 세계에서 가장 큰 반도다. 아메리카 대륙의 3분의 1에 달하며, 삼 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으로 요르단쪾시리아쪾이라크와 접해 있다.
예로부터 아라비아 민족들은 대개 유목민으로 염소 털로 만든 검은 텐트에서 생활했다. 이들은 친족이나 형제가 모여 부족 생활을 하는데, 염소와 낙타는 생계유지에 꼭 필요하다. 염소젖으로 요거트와 버터를 만들고, 염소젖에 밥을 말아 먹는 것이 이들의 주식이다. 바로 이곳 아라비아로 바울이 왔다. 다메섹 회심 후 첫 전도지로 아라비아 모래바람 속을 선택했던 것이다. 예수께서 가신 그 길을 사도 바울도 갔다. 바울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회심의 불길이 번져갔고, 그렇게 바울은 복음으로 세상을 정복해 나갔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3~14).
윤석전 목사: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 뜨겁게 회개한 후 아라비아 광야로 갔습니다. 아라비아 광야로 간 이유를 자세히 말씀해주십시오.
조광호 교수(서울 장신대 신약학): 성경에서 ‘아라비아’는 아주 드물게 나오는 단어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딱 세 번 나옵니다. 먼저 오순절 사건 이후 열방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모이고 있다는 사도행전 기사에서 ‘아라비아인’이 언급됩니다.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행2:11). 나머지는 갈라디아서에 나옵니다. 4장 25절에서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갈4:25)라며 아라비아를 언급하고, 특히 1장 17절에서 바울은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갈1:17)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이 아라비아 광야로 간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예루살렘과는 독립적인 복음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아라비아로 간 이유는 예루살렘에서 자유로운 자신의 복음의 독자성에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5~17절을 보면, 바울은 주님의 계시를 받고 혈과 육에 의존하지 않으며, 동족이나 어떤 사람들에게 자문을 구하지 않고, 사도 된 자들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아라비아로 갔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갈1:15~17).
그런 의미에서 바울이 아라비아로 간 것은 지상의 인간적인 모든 권위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직접 계시를 받은 사도성을 강조하는 내용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윤석전 목사: ‘아라비아’ 하면 광야가 생각납니다. 2000년 전에는 어떤 지역이었기에 바울이 아라비아로 갔는지 궁금합니다.
홍순화 원장(한국성서지리원): 요르단, 시리아 지역부터 서남아시아의 남쪽 전체를 아라비아로 보는데 대부분 사막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의 아라비아에 속한 나라는 시리아,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남쪽의 예멘 그리고 아랍에미리트 공화국까지로 매우 넓은 지역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도 바울이 그 많은 지역 중 어디를 갔는지 궁금해집니다. 보통 아라비아를 세 곳으로 나누는데 북서부 지역, 시리아의 사막 지역 그리고 남쪽 지역입니다. 대다수 학자들은 사도 바울이 갔던 아라비아 지역을 북서부 지역, 즉 페트라 지역으로 추측합니다.
윤석전 목사: 바울은 아라비아에서 무슨 일을 했나요?
조광호 교수: 학자들은 두 가지 의견으로 나뉩니다. 먼저, 바울이 아라비아에서 기도와 명상을 했다는 주장입니다. 다메섹에서 회심한 후 아나니아를 통해 소명 의식을 갖게 된 바울이 수도와 명상의 장소였던 광야로 가서 자기가 받은 복음의 의미를 내실화하는 기회로 삼았고, 또 수도와 경건의 훈련을 하여 세계 전도를 위한 준비의 기회로 삼았다는 것이지요. 다른 의견은 바울이 아라비아에 가서 전도했다는 주장입니다. 율법 교육까지 체계적으로 받은 바울은 모든 것이 준비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요르단 페트라 바위도시.
아라비아 사막에 있는 대상 민족 나바테아 왕국의 수도 페트라. 이 바위도시는 요르단의 수도 암만 서남쪽에 있다. 나바테아 왕국은 기원전 1세기부터 화폐를 발행할 정도로 상권이 발달했고, 사막과 홍해.지중해를 연결하는 해로 무역의 거점이었다. 이렇게 발달한 국제 무역 덕분에 하리타트 4세 때 전성기를 맞았으며, 북부 아라비아.시리아를 포함한 광대한 영토를 장악했다. 암벽을 따라 이어진 긴 수로(水路)의 흔적은 당시 페트라의 발달한 상수도 시설을 짐작케 한다.
암벽을 파서 만든 페트라 신전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인디아나 존스> 촬영 장소로도 유명하다. 현재 페트라 유적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며,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페트라 내부로 들어가는 길.
윤석전 목사: 페트라 지역은 어떤 곳이며, 언제 발견됐는지 궁금합니다.
홍순화 원장: ‘페트라(Petra)’는 헬라어로 ‘바위’라는 뜻입니다. 성경에 보면 ‘셀라(Sela)’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이 단어가 히브리어로 ‘바위’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셀라’의 추정 지역으로 두 곳이 있는데 가장 유력한 곳이 페트라입니다. 이스라엘인이 셀라를 장악한 후, 그 지명을 ‘욕드엘’이라고 정했다고 열왕기하 14장 7절에 나와 있습니다.
페트라는 ‘왕의 대로(에돔과 모압 지방을 통과하며 요르단 강 동쪽에서 남북쪽으로 뻗어 있던 고대의 길)’에서 10km 정도 떨어진 큰 도시입니다.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페트라를 중심으로 나바테아 왕국이 그 지역의 상권을 장악하여 번영했습니다. 페트라는 대부분 건축물들이 돌산을 파서 만든 암석 도시로, 현재 요르단 국보 1호입니다. 또 페트라에는 ‘망각의 도시’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로마가 그 지역을 점령한 후 비잔틴 시대에는 교회로도 많이 사용됐으나 그 후 1000년 넘게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812년 8월, 스위스 탐험가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는 다메섹을 시작으로 카이로 지역을 탐험했습니다. 그러던 중 이방인 출입 금지 지역이 있어서 아랍인으로 변장하고 들어갔는데 그곳이 바로 페트라였습니다. 그는 여행기에 암석 도시 페트라의 이야기를 적었고, 그 후 페트라는 전 세계에 알려져 가장 가 보고 싶은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윤석전 목사: 페트라에 있던 나바테아 왕국은 성경에 어떻게 등장합니까?
조광호 교수: 나바테아 왕국은 정치적으로 페르시아의 속국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막 지역이어서 페르시아에서 멀리 떨어졌기에 반독립적인 상태로 있었고, 알렉산더 대왕 이후에는 독립 국가로 있었습니다. 나바테아 왕국과 로마의 관계는 한때 우호적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적대 관계였습니다. 요한을 참수한 헤롯 안디바의 첫 아내가 나바테아 왕국의 공주였습니다. 그런데 헤롯 안디바가 자기 동생 필립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결혼하려고 공주와 이혼하자 나바테아 왕국은 화가 나서 유대와 전쟁을 벌입니다. 그래서 한때 유대 북부 지역인 베뢰아, 데카볼리 동쪽, 다메섹을 점령했습니다.
윤석전 목사: 나바테아 왕국이 사도 바울과는 어떤 관계에 있었나요?
조광호 교수: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한때 나바테아인이 다메섹을 점령했습니다. 따라서 다메섹에는 많은 나바테아인이 거주했습니다. 바울이 다메섹에 가서 복음을 전하자 그곳의 정통 유대인들은 화가 나서 바울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바울은 신변에 위험을 느껴 나바테아인의 집단 거주지로 숨어들어 갔습니다. 그때 나바테아 왕국 우두머리가 바울이 자신들의 영역으로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습니다. 그들도 바울을 국가 치안을 어지럽히는 자로 여겨 잡으려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피하려고 광주리에 들어가 성벽을 타고 다메섹을 빠져나갔습니다(행9:23~25). 이처럼 나바테아 왕국과 바울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윤석전 목사: 바울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면 페트라 지역에 기독교 유적들이 있을 텐데요. 그 유적들을 소개해 주십시오.
홍순화 원장: 페트라에 가면 비잔틴 시대에 교회로 사용했다고 추정되는 수도원이 있습니다. 또 ‘아윤 무사(Ayun Musa)’ 즉 모세의 우물이라고 하는 계곡이 있는데 모세가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온 곳으로 전해집니다(출17:6). 아윤 무사에서 나오면 왼쪽에 언덕이 보이는데 바로 ‘타윌란(Tawilan)’이라는 곳입니다. 많은 학자가 그곳을 ‘데만(Teman, 보스라와 더불어 에돔의 대표적 도시)’으로 추정합니다. 이처럼 페트라에는 성경과 관련 있는 유적들이 많습니다.
윤석전 목사: 바울 당시에는 국경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는데 그 배경이 궁금합니다.
조광호 교수: 로마가 지배하는 영토 내에서는 이동이 자유로웠습니다. 특히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는 마음 놓고 다닐 수 있었습니다.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라는 말처럼, 당시 로마의 전성기 때에는 치안과 교통의 여건이 좋았기에 사람들은 자유롭게 왕래했습니다. 로마는 나바테아 왕국과 적대 관계에 있었지만 전시가 아닐 때에는 늘 국경을 열어 놓았습니다. 그래야 로마에 필요한 물자 소통이 원활했기 때문입니다. 그 덕분에 바울은 아무 방해 없이 자유롭게 다니며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윤석전 목사: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온 지 100년이 지났는데 한국 기독교인의 수가 전체 인구 20%를 넘어섰습니다. 그만큼 기독교가 급속도로 성장하는 것은 참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를 전하기 위해 하나님은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특히 바울은 하나님이 특별하게 선택해서 사용하신 큰 사도였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부르셔서 쓰실 수 있게 바울처럼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복음의 사도가 자신의 몫이 되기를 바랍니다. <계속>
<윤석전 목사 탐사기행 ‘성서의 땅을 가다’는 www.ybstv.com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462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