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와 함께하는 ‘성서의 땅을 가다’(24)] 이방인을 향한 전도의 첫 승리지, 구브로

등록날짜 [ 2015-12-23 12:54:28 ]

윤석전 목사(연세중앙교회): 사도 바울이 제1차 전도여행을 출발할 때 가장 먼저 들른 실루기아 항구를 살펴보겠습니다.

 

실루기아 항구.



복음 전파는 장소에 묶이지 않는다. 복음 선포자들은 늘 새로운 선교지로 떠나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다. 바울도 언제나 도상(途上)에 있었고, 떠남의 한가운데 있었다. 바울이 역사적인 전도여행을 할 때 출발지로 삼은 곳이 바로 실루기아(Seleucia) 항구다. 주전 300년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가 세운 항구도시이며 안디옥 남서쪽에 있다. ‘흰빛’이라는 뜻인 실루기아는 사도 바울 당시 화려한 항구도시였는데, 암석을 뚫어 안디옥과 연결했던 고대 도로와 투기장, 신전 등 유물이 있다. 이곳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구브로 섬으로 향했다.

 

바울의 1차 전도여행 경로.


 

윤석전 목사: 바울과 바나바는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수리아 안디옥을 떠나 제1차 전도여행을 시작합니다. 실루기아 항구는 구브로(Cyprus) 섬으로 가려면 반드시 들러야 하는 곳입니다(행13:4). 바울이 전도여행 시 거쳐 갈 수밖에 없었던 실루기아에 관해 설명해 주십시오.

 

홍순화 원장(한국성서지리원): 사도 바울은 전도여행을 할 때 먼저 구브로에 갔습니다. 구브로는 섬이라 배를 타야만 했습니다. 당시에는 해상교통이 매우 발달해 있었습니다. 더구나 로마가 그 일대를 장악해서 해적의 위협도 없었습니다. 시기만 잘 선택하면 구브로까지는 육로보다 해로를 이용하는 편이 훨씬 빨랐습니다. 바울은 해상교통을 이용할 계획이어서 실루기아에 들러야만 했습니다.

 

안디옥에서 30km 떨어져 있는 실루기아는 안디옥의 항구 역할을 했습니다. 서울과 인천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릅니다. 실루기아는 사도 바울 당시에 대단한 항구도시였습니다. 교통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군사 수송로 역할도 담당했습니다. 또 지금은 폐허로 남았지만, 안디옥과 실루기아를 연결하는 도로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실루기아는 당시 내륙 지방과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항구도시였습니다.

 

윤석전 목사: 실루기아에서 출발해 첫 번째로 간 곳이 구브로입니다. 바울이 첫 선교지로 구브로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조광호 교수(서울 장신대 신약학): 구브로는 바나바의 고향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1차 전도여행을 떠나면서 경로를 상의했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어디를 가든 잘 갖춘 숙박 시설을 찾기 어려웠고, 낯선 사람을 배타적으로 대했습니다. 또 무엇보다 여행 정보를 정확히 알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브로는 바나바의 고향이었기에 전도여행의 첫 목적지로 삼았습니다.

 

윤석전 목사: 1차와 3차 전도여행에서 바울은 공통적인 선교전략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 선교전략을 소개해 주십시오.

 

조광호 교수: 바울은 예수님과 달리 전형적인 도시인이자 문화인이었습니다. 바울이 여행한 곳을 살펴보면 주로 대도시입니다. 낯선 곳에 가면 숙박시설이나 음식에 신경을 쓰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 곳에서나 주무셨기에 비용을 들이지 않고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바울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전도하고, 당시 최첨단 운송수단인 배를 이용하다 보니 경비를 많이 지출했습니다.

 

바울은 천막 짓는 일로 자비량해서 전도하기도 하고, 필요할 때는 자신을 돕는 후원인을 육성하여 조직적인 선교 지원 시스템을 갖추기도 했습니다. 외국에 갔을 때는 주로 디아스포라 회당을 방문해서 그곳을 출입하는 유대인들과 유대교에 호감을 보이는 헬라인들을 1차 전도대상자로 삼았습니다(행13:5).

 

윤석전 목사: 이번에는 바울이 실루기아 항구를 떠나 가장 먼저 도착한 구브로를 살펴보겠습니다.

오늘날 키프로스(구브로) 섬에 있는 살라미 항.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마가 요한은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실루기아 항구에서 배를 타고 구브로(현재 키프로스)로 향했다. 당시 실루기아에서 구브로까지는 100km 남짓한 거리였다.

구브로 섬은 바울 당시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해상 교역의 중심지였는데, 지중해 연안 상인들이 모여들었으며 많은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

 

현재 키프로스는 한국과 같은 분단국가다. 북키프로스 파모구스타만에 있는 살라미(Salamis). 이곳은 베니게(페니키아)가 설립한 곳으로 당시 키프로스의 중요 항구였다. 주전 58년에 로마 속령이 됐고 상업 도시로 번영했다.

 

이곳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힐 겨를도 없이 복음을 전하고자 유대인 회당을 찾아갔다. 하지만 주민의 마음이 돌처럼 굳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바울은 낙심하지 않았고, 그의 복음 전도 열정은 바보(Paphos) 항구로 이어졌다. 바울 일행은 살라미에서 300km를 걸어 바보 항구에 도착했다. 바보는 당시 키프로스를 관할하던 로마 총독 서기오 바울이 살던 곳인데 사실상 이 지역의 수도였다.

 

진리를 간절히 소망하던 서기오 바울은 바울과 바나바에게 하나님 말씀을 청해 들었다. 당시 총독에게 총애를 받던 마술사 엘루마가 바울의 전도를 훼방했고, 결국 바울의 저주로 소경이 된다. 그 현장을 목격한 서기오 바울 총독이 믿음을 갖게 된다. 이교 지도자와 벌인 첫 대결에서 멋지게 승리한 것이다.

 

키프로스 남서 연안 평온에 가면 바울 채찍기념교회가 있는데, 바울의 전도가 그리 수월치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 곳곳에 남아 있는 카타콤(Catacomb, 초대 교인들이 핍박을 피해 숨어들어 예배하며 생활한 곳)의 흔적은 이 나라 역시 초대 교인들이 남긴 순교의 역사가 예사롭지 않았음을 짐작케 한다. 바울 전도 이후 이 땅에서 벌어진 영적 싸움은 치열했다. 카타콤은 그것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윤석전 목사: 당시 구브로는 어떤 곳이었나요?

 

홍순화 원장: 구브로는 지중해 3대 도시 중 하나였고, 소아시아 중간에 있어 교통 중심지였습니다. 구브로 섬 왼쪽에는 당시 정치 중심지 바보가 있었는데 상업 중심지 살라미와 150km 정도 거리였습니다. 구브로와 실루기아 항구는 직선거리로 100km 정도 됐습니다. 구브로의 통치자 서기오 바울은 사도 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처음으로 통치자가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바울은 전도여행 중 비시디아 안디옥에도 갔는데, 이곳은 바로 서기오 바울의 고향입니다. 서기오 바울의 요청에 따라 전도 행선지를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정한 것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윤석전 목사: 구브로(키프로스) 섬에 기독교 유적이 남아 있습니까?

 

홍순화 원장: 북키프로스 ‘살라미’에는 당시 큰 항구도시였음을 알려 주는 고대 유적지들이 있습니다. 신전과 주거지를 잘 보존해 놓았지요. 남쪽 ‘바보’ 지역에는 바울 채찍기념교회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곳에서 기둥에 매달려 채찍을 맞았다고 합니다. 아직도 그 터가 남아 있습니다. 또 카타콤에서는 동굴이나 무덤에서 신앙생활 했던 교우들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왕들의 무덤’도 있습니다. 주전 3세기에서 주후 3세기 무렵에 바위를 파서 만들었습니다.

 

윤석전 목사: 바울 당시 ‘바보’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나요?

 

조광호 교수: 구브로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살라미’를 거쳐 ‘바보’로 갑니다. 사도행전 13장 6∼12절을 보면, ‘바보’에는 유대인이자 거짓선지자이며 마술사인 ‘엘루마’가 있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바보 총독 서기오 바울은, 바울과 바나바 일행을 만나 말씀을 듣고자 했습니다. 엘루마는 자신의 영향력을 떨어뜨릴까 두려워서 총독과 바울 일행의 면담을 가로막는 방해공작을 폈습니다.

 

바울이 그런 엘루마를 꾸짖자 그 자리에서 앞을 보지 못하게 됐습니다.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11절).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열정적으로 선교했다는 것과 말씀의 능력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윤석전 목사: 당시 총독은 대단히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이 그런 총독에게 어떻게 전도할 수 있었을까요?

 

조광호 교수: 바보에 가면 바울의 기둥 터가 있습니다. 바울이 그곳에서 채찍에 맞았다고 합니다(고후11:24). 고린도후서 11장을 보면, 바울이 전도하면서 얼마나 많은 고통과 고난을 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고후11:24~25)라는 구절이 쭉 나옵니다.

 

‘바울의 채찍 기둥’을 보면, 바울이 바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얼마나 핍박을 많이 받았는지 가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늘 복음을 전하기 원했기에 고린도전서 9장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16절). 그랬기에 엘루마가 방해해도 복음을 증거했고, 그런 노력 덕분에 총독 서기오 바울까지 복음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윤석전 목사: 바보에서 일어난 상황은 성경에 비교적 잘 기록되어 있는 반면, 그 외 지역에서 일어난 일은 기록에 없는데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홍순화 원장: 사도 바울의 첫 전도지인 구브로 섬은 성경에 자세히 기록돼 있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로 추정해 본 결과, 이런 결론을 얻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롬15:20).

 

헤롯 안디바에게 핍박받은 많은 기독교인이 예루살렘에서 흩어져 베니게, 안디옥, 구브로에 도착했습니다. 다시 말해 구브로에는 초대 교인들이 이미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구브로에서 전도한 내용은 비교적 적게 기록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특히 구브로 섬 ‘라르나카’ 지역에서 ‘나사로’라는 사람이 30년 정도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살리신 나사로입니다. 나사로를 당시 교회 책임자로 임명했다는 전승도 있습니다. 위와 같은 이유에서 바울은 라르나카 지역을 지나 구브로 섬의 살라미와 바보로 옮겨 갔고, 바보에서 일어난 일을 적은 것 같습니다.

 

윤석전 목사: 사도 바울은 전도여행지에서 어떻게 의사소통을 했을까요?

 

조광호 교수: 사도 바울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어서 헬라어에 능통했습니다. 바울 당시에는 헬라 문화가 세계에 퍼져 있었습니다. 바울은 섬들을 여행할 때 당시 세계 공용어인 헬라어를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별 어려움 없이 의사소통을 했고 그 덕분에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윤석전 목사: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고전9:16).

이 구절에는 복음을 전하고 싶은 바울 자신의 열망, 전하지 않으면 멸망하고 마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사도 바울의 애타는 심정이 담겼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고통받으면서도 복음을 전한 까닭은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이웃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사도 바울처럼 복음 전하는 자로 쓰임받기 위해 성령 안에서 늘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계속>

 

<윤석전 목사 탐사기행 ‘성서의 땅을 가다’는 www.ybstv.com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464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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