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와 함께하는 ‘성서의 땅을 가다’(25)] 바울의 소아시아 전도와 역경

등록날짜 [ 2015-12-30 22:12:42 ]

윤석전 목사(연세중앙교회): 사도 바울의 선교는 고난 그 자체였습니다. 하지만 고난 역시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이었습니다. 겉으로는 패배자처럼 보였지만, 바울은 가는 곳마다 채찍질과 고통 속에서 교회를 세워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바울이 열심히 전도한 버가와 비시디아 안디옥을 살펴보겠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 옛 교회 터.

 
 

바울 일행은 키프로스 바보(Paphos)에서 총독 서기오 바울을 전도하는 소득을 얻은 후, 다시 배를 타고 밤빌리아로 향했다. 그동안 바울 일행이 겪은 길은 그런대로 순탄한 편이었다. 이제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걸어갈 수 없는 험난한 길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첫 도착지인 밤빌리아 지방 버가(Perga)는 키프로스 바보에서 105km 떨어져 있다. 버가는 소아시아 남부 해안 지방 밤빌리아의 중요 도시이자 교통 요충지였다. 덥고 습한 날씨가 바울 일행을 몹시 괴롭혔다. 또 그들이 넘어야 할 타오로스 산맥은 산적들이 언제 출몰할지 모를 정도로 험준했다. 이런 상황에서 마가 요한이 갑자기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다.

 

험준한 산맥 앞에 바울과 바나바만 남게 된 것이다. 바울은 이 사건으로 큰 상처를 받았지만 곧 아픔을 딛고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향했다. 비시디아 안디옥은 현재 터키 소도시인 ‘얄바츠’로 옛 도시의 흔적만 희미하게 남아 있다. 이곳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안식일에 회당을 찾아가 설교했다.

 

 

윤석전 목사: 버가는 어떤 곳인가요.

 

홍순화 원장(한국성서지리원): 버가는 터키 중심부 남단에 있는 밤빌리아의 고대 도시로서, 멸망한 트로이가 그곳으로 이동해 건설한 도시입니다. 버가가 중요한 이유는 첫째, 중요 항구인 앗달리아에서 13km 정도 거리에 있는 내륙 도시라는 것입니다.

 

둘째, 로마에서 비잔틴 시대까지 줄곧 융성하던 도시라는 점입니다. 사도 바울 당시 버가가 얼마나 대단한 도시였는지 유적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관객 1만 5000명을 동시에 수용하는 극장, 34m×234m 엄청난 규모의 스타디움과 많은 신전이 있습니다.

 

특이하게도 헬라와 로마 두 시대의 모습이 융합해 있다는 점입니다. 성벽 바깥 면은 로마 시대, 안쪽 면은 헬라 시대의 것입니다. 헬라 시대의 문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윤석전 교수: 버가로 전도하러 가는 도중, 사도 바울 일행에게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조광호 교수(서울장신대학교 신약학): 사도 바울 일행은 구브로를 떠나 버가로 향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깜짝 놀랄 광경을 봅니다. 터키 내륙에 들어가면 해발 1000m 이상인 산맥으로 둘러싸인 고원 지대가 펼쳐집니다. 우뚝 솟은 거대한 산맥들을 목도하자 겁에 질린 동역자 마가 요한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복음 전도를 위해서는 어떤 위험도 감수하고 인내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마가 요한의 태도에 바울은 매우 낙심했습니다. 터키 내륙 지방에 들어가면 험난한 지형과 도적 떼와 짐승의 위협 탓에 동행자 한 명이 아쉬운 상황에서, 마가 요한이 돌아갔다는 사실은 사도 바울에게 매우 큰 충격을 줬습니다. 2차 전도여행 때, 바울과 바나바는 마가 요한 문제로 다툽니다.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다시 데리고 가자고 하고, 바울은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의견 차이로 2차 전도여행 때 바울과 바나바는 갈라섭니다.

 

윤석전 목사: 버가 다음의 선교지는 비시디아 안디옥입니다. 마가는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가는 길을 매우 험난하리라고 예상한 듯합니다. 어느 정도로 험난했기에 마가가 전도여행을 도중에 포기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홍순화 원장: 터키의 특이한 지형 구조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평지인 해안 지방을 산맥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산맥을 통과해서 내륙에 들어가면 해발 1000m 이상인 고지대가 이어집니다. 버가에서 비시디아 안디옥까지는 일주일가량 걸어야 하는 거리(200km) 정도입니다. 당시 로마에서 그 지역을 완전히 평정했다고 해도 도적을 완전히 소탕하지는 못했는데 이에 마가가 겁먹고 전도여행을 포기한 듯합니다.

 

윤석전 목사: 그 시대에 비시디아 안디옥은 어떠한 도시였습니까?

 

홍순화 원장: 비시디아 안디옥은 내륙 지방 중심 도시였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밤빌리아로 통하는 ‘세바스테(via Sebaste)’라는 길이 있습니다. 이 길은 후에 서남쪽과 동남쪽으로 통하는 두 갈래로 갈라졌고, 이 두 길 사이로 또 다른 길을 만들어 도시와 도시를 연결했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대전처럼 도로 밀집지 역할을 했다고 보면 됩니다. 또 비시디아 안디옥은 로마의 병참기지였습니다. 로마 정부에서 정예병을 3000명이나 파견해 지킬 정도로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윤석전 목사: 이번에는 1차 전도여행지 비시디아 안디옥을 지나서 들른 이고니온과 루스드라를 알아보겠습니다.

 

성경 속 이고니온(오늘날 터키 코니아 지역). 이슬람교가 장악하여 선교사가 접근하지 못하는 폐쇄도시가 되었다.


 

바울 일행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성공적으로 전했지만, 바울을 시기하는 일부 유대인 탓에 또다시 박해를 받는다. 결국 바울 일행은 성령 충만해 기뻐하는 제자들을 남기고 이고니온으로 향했다.

 

‘이고니온’은 터키의 한 작은 도시인데 지금은 ‘코니아(Konya)’라 부른다. ‘양의 가슴’이란 뜻의 이고니온은 남부 중앙의 상업 도시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비옥한 곳이었다. 이고니온에서도 바울 일행은 회당에서 말씀을 전했고, 수많은 유대인과 그리스인을 전도했다. 하지만 동시에 돌로 쳐 죽이려는 일부 유대인 때문에 바울 일행은 루스드라로 피신해야 했다.

 

하나님의 역사는 결코 무의미한 시련의 연장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그분의 시간표대로 전개된다. 사도 바울에게 계속되는 핍박과 고난도 하나님의 섭리 중 일부였다. 이고니온에서 핍박당하자 향하게 된 루스드라에도 또 다른 기쁨과 고난이 바울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양의 무리’라는 뜻인 ‘루스드라’는 현재 ‘하툰사라이’라고 부른다. 당시 루스드라는 소아시아 중요 도시였다. 이곳에서 바울은 자신의 설교를 듣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인 사람을 만났고, 그를 걷고 뛰게 하는 이적을 일으켰다(행14:8~10). 이것을 기회로 바울 일행은 복음을 성공적으로 전했다. 하지만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몰려온 유대인들이 던진 돌에 맞아 바울이 기절하는 고난을 당한다.

 

 

윤석전 목사: 바울 당시 이고니온은 어떤 도시였나요?

 

홍순화 원장: 이고니온은 ‘루가오니아’ 지역 주도일 정도로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로마 식민지를 연결하는 포장도로 ‘세바스테’가 관통했습니다. 둘째, 이고니온에서 나온 과일과 곡식은 세계에서 제일 유명할 정도로 그곳 땅이 매우 비옥했습니다. 또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셋째, 이고니온은 여러 신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윤석전 목사: 지금도 이고니온에서는 우상숭배를 심하게 하나요?

 

홍순화 원장: 현재 이고니온을 ‘코니아’라고 합니다. 소아시아 중심부 남쪽 루가오니아 주(州)에 있는데 ‘고지대에 이렇게 큰 도시가 있나’라고 생각할 정도로 아주 번화합니다. 안타까운 점은 지금은 이슬람교가 장악해 선교사가 접근할 수 없는,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도시로 변했습니다.

 

윤석전 목사: 사도 바울은 이고니온에서 예수를 열정적으로 전했습니다. 그때 지역민이 크게 호응하자 일부 유대인들이 심하게 박해했다고 합니다.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조광호 교수: 바울은 이고니온에서 성령 충만하여 복음을 전합니다. 담대하게 복음을 전한 결과, 이고니온에도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고, 많은 신자가 생겨납니다. 그런데 순종치 않는 유대인이 믿지 않는 이방인을 선동해서 바울의 복음 전파를 방해합니다. 성 안은 친(親) 바울파와 그렇지 않은 반대파, 두 진영으로 갈라집니다. 바울이 이고니온에서 오랫동안 머물면서 복음을 증거했지만, 믿지 않은 유대인들은 관원을 선동해서 바울을 박해합니다. 심지어 돌로 쳐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결국 바울은 이고니온을 황급히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윤석전 목사: 루스드라에서 바울의 행적이 어떠했는지, 어떻게 복음을 전했는지 궁금합니다.

 

조광호 교수: 바울 일행이 루스드라에 갔더니 발을 쓰지 못하는 앉은뱅이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안수해서 그 앉은뱅이를 고쳐 줍니다. 주위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연설과 웅변을 잘한 바울을 ‘허메(연설과 웅변의 신 헤르메스)’, 바나바를 ‘쓰스(제우스 신)’라고 칭합니다. 자신들을 신격화하는 데에 깜짝 놀란 바울과 바나바는 옷을 찢으면서 “우리는 신이 아니다,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다”고 말하면서 복음을 전합니다(행14:14~15).

 

그 후 비시디아 안디옥 사람과 이고니온 사람들이 루스드라까지 몰려와서 바울 일행을 박해합니다. 이 사건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을 돌로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행14:19).

성경 속 루스드라(터키 하툰사라이). 현재도 조그마한 소도시다.


 

윤석전 목사: 비시디아 안디옥의 유대인들이 루스드라까지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돌로 쳤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비시디아 안디옥과 루스드라가 그렇게 쉽게 오갈 정도로 가깝지 않았을 텐데요.

 

홍순화 원장: 비시디아 안디옥과 루스드라는 160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멀지만, 두 지역을 연결하는 군사도로가 있었다고 합니다. 또 루스드라 사람들이 비시디아 안디옥에 동상을 세워 줄 정도로 친밀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만큼 이동이 자유로웠겠지요. 아무튼 160km를 달려가서 사도 바울을 핍박하다니, 그들도 참 대단하지요.

 

윤석전 목사: 루스드라에서 심한 박해를 받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당시 그곳은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조광호 교수: 교만하고 완악한 유대인들이 그런 일을 저질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회당’이라는 전 세계를 연결하는 조직망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 사람들이 자기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박해하고 쫓아 버립니다. 그런데 회당 조직을 통해 바울이 루스드라에서도 똑같은 얘기를 전한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분노가 폭발한 이들은 루스드라까지 바울을 쫓아가서 박해했습니다.

 

윤석전 목사: 바울과 마가 요한은 이후 회복되었습니까?

 

조광호 교수: 골로새서 4장에서 바울은 자신과 함께 갇혀 있는 사람의 이름을 쭉 나열합니다. 그곳에 마가 요한이 나옵니다(골4:10). 그다음 디모데후서 4장을 보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요청할 때 마가의 이름을 언급합니다.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4:11). 빌레몬서 1장 24절을 보면 “나의 동역자 마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든 면을 종합해 볼 때, 바울은 나중에 마가를 용서했고, 동역자로 함께 사역한 것 같습니다.

 

윤석전 목사: 바울과 마가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바울은 가슴에 구령의 열정이 불타고 성령 충만해 오직 복음 전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겼습니다. 자기 목숨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고 복음 사역에 바친 그 고백대로, 바울은 이미 성령으로 준비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마가는 고통과 어려움을 이겨 낼 수 없는 두려움에 장악당해 전도여행 중 하차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어떤 어려움에 처했습니까? ‘주를 위하여 살겠다’는 각오를 되새기고 예수 안에서 성령 충만하여 믿음을 지키기 바랍니다. 구령의 열정을 갖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합시다. 바울처럼 우리 가슴에도 복음을 전하고 싶어 견딜 수 없는 사명과 열정이 불타기를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계속>

 

<윤석전 목사 탐사기행 ‘성서의 땅을 가다’는 www.ybstv.com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465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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