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와 함께하는 ‘성서의 땅을 가다’(29)] 그리스 베뢰아와 학문의 도시 아덴

등록날짜 [ 2016-02-04 18:53:49 ]


<사진설명> 바울과 실라가 데살로니가에서 쫓겨난 후 베뢰아로 들어가 전도했던 베뢰아 회당.

윤석전 목사(연세중앙교회):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예수 복음을 열심히 전했습니다. 교인이 많이 생긴 반면, 핍박도 크게 받았습니다. 바울 일행은 유대인들이 일으킨 폭동 때문에 몸을 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바울은 다음 선교지를 베뢰아로 정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데살로니가에서 피신해서 간 베뢰아를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데살로니가를 빠져나온 바울 일행은 수일 만에 베뢰아에 도착했다. 베뢰아(Beroea)는 마게도냐 평원 남서쪽 작은 언덕 위에 있다. 이곳에도 유대인 회당이 있었고, 바울과 실라는 그곳에 들어가서 말씀을 전했다.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유대인보다 고결해서 바울의 말을 정중한 태도로 편견 없이 들어 주었다. 또 날마다 성경을 연구했는데 그 결과 헬라인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않게 예수를 믿었다. 하지만 이곳에도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이 몰려와서 소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남기고 아덴(아테네)으로 향했다.

윤석전 목사: 바울 선교 당시 베뢰아는 어떤 곳이었나요?

홍순화 원장(한국 성서지리원): 베뢰아는 데살로니가에서 내륙 서쪽 방향으로 60km 정도 떨어진 베르미오스 산 기슭에 있었습니다. 해발 2052m 고지대인 베르미오스 산 주위에는 복숭아를 비롯한 과일로 유명한, 매우 비옥한 곳이었다고 합니다.

윤석전 목사: 베뢰아 사람들은 성경을 연구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하지만 회당에 모인 베뢰아 유대인들이 예수 복음을 반감 없이 들었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우리가 베뢰아인에게서 배울 점은 무엇인가요?

심상법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신약학): ‘베뢰아 성경 연구’라는 말을 흔히 들어봤을 것입니다. 이는 베뢰아인들이 성경을 연구하는 태도를 따서 하는 말입니다. 오늘날 성경 연구의 규범적 태도를 일컬을 때 ‘베뢰아적 성경 연구 태도’라고 합니다. ‘편견이나 편법 없이 주의 깊게 성경을 연구한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베뢰아인들은 바울의 설교를 들을 때 열심 있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성경을 연구할 때는 부지런함과 편견 없는 개방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배워야 합니다. 과거 우리나라 조선 시대 서당에서 학문을 배운 모습이라든지 한국 교회가 성장 과정에서 성경을 상고한 모습을 보면 우리에게도 기본적으로 베뢰아적 기질이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윤석전 목사: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에서 핍박을 피해 베뢰아로 갔고, 베뢰아에서 핍박을 받자 아덴으로 갔습니다. 아덴까지 간 이유는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홍순화 원장: 바울 당시 내륙지방에는 발달한 고속도로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비행기나 기차가 있지만 그 당시 이동할 때는 육로로 가는 방법과 바닷가에서 배를 타고 가는 방법, 단 두 가지뿐이었습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바울 일행은 일단 바닷가로 향했습니다. 여기에서 배를 타고 아덴까지 간 것으로 추정합니다. 아덴 남쪽에 ‘피레우스 항구’가 있습니다. 베뢰아에서 아덴까지는 520km 거리입니다. 지도로 보면 쉬운 행로 같지만 그 당시 사도 바울이 얼마나 힘들게 아덴까지 갔는지 그 고충을 헤아려 봐야겠습니다.

베뢰아를 떠난 바울 일행은 마게도냐를 잠시 떠날 필요를 느껴 배를 타고 아가야 지방의 아덴으로 향했다. 아덴 항구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이 낯선 땅에 또다시 외로이 남겨졌다. 하지만 그들은 좌절하지 않았다. 이곳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이 있을 터였기 때문이다.

당시 아덴은 정치.경제.군사 면에서 과거의 위용이 사라진 성읍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큰 대학 도시였고 학문과 철학의 본고장이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고향이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덴을 제2의 고향으로 삼았다. 그래서 당시 세계 모든 나라 사람이 학문의 진수(眞髓)를 맛보고자 이곳을 찾았다. 그 때문에 아덴 시민들의 자부심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당시 아덴 중심가 아테네 시(市)는 아크로폴리스 언덕을 중심으로 온갖 신전이 가득했다. 아테네의 부유한 귀족이자 철학자 헤롯 아티커스는 아내를 위해 주전 161년에 ‘헤롯아티커스 음악당’을 세웠다. 객석 500석을 갖춘 야외 음악당인데, 지금은 좌석 부분만 복원해 공연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당시 아덴은 세계적인 ‘철학 도시’인 동시에 ‘우상의 도시’였다. 당시 철학은 곧 종교였고, 그 탓에 세계 도처에서 온갖 잡신과 신상이 아덴으로 몰려 들었다. 그 중심에 있는 아크로폴리스 언덕은 아덴 신앙의 중심지였다. 주전 438년 아크로폴리스 위에 세워진 ‘파르테논 신전’은 건축가 익티노스와 칼리크라테스가 설계했다. 바울 당시에는 조각가 페이디아스가 상아와 황금으로 만든 전설적인 아테네 여신상을 세워 놓았다고 한다.

파르테논 신전은 아테나 여신에게 제사를 지내려고 세웠다. 아테나 여신은 문명 생활의 수호신이며 당시 아덴 사람들의 필수품이었던 올리브 나무를 전해 주었다고 알려졌다. 계속되는 전쟁 역사 속에서 현재에는 뼈대만 남아 있지만 파르테논 신전의 거대한 규모와 신전 안을 장식하는 온갖 신상과 부조상들은 당시 이 신전의 화려함이 어떠했는지 짐작케 한다.

세계 전체 신앙 수요보다 더 많은 신상이 있었던 아덴에서 격분한 바울은 회당과 광장에서 많은 사람과 날마다 토론을 벌였다. 바울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전하고자 하는 열망뿐이었다.

바울은 외쳤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모든 인간은 그의 피조물이기에 사람들은 자연으로 만든 신상을 섬겨서는 안 된다고. 또 하나님의 아들 예수와 그의 부활을 전했다. 결국 바울은 아덴인에게 붙들려 ‘아레오바고’라는 귀족 회의의 판정을 받게 된다. 아덴인들은 바울이 전하는 새로운 교훈에 대해 궁금했다. 아레오바고 언덕 기슭에 있는 동판에는 당시 이곳에서 한 바울의 연설 전문이 새겨져 있다. 바울은 만유의 주인인 하나님을 당당히 선포했다.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행17:22~23).


<사진설명> 고대 도시 아덴의 아레오바고 언덕 기슭에는 바울이 당시 했던 연설이 동판에 새겨져 있다.

윤석전 목사: 아덴(아테네)은 당시 어떤 도시였나요?

홍순화 원장: 로마가 그리스를 점령하면서 북쪽은 마게도냐 지방, 남쪽은 아가야 지방으로 나누었습니다. 아가야 지방의 정치와 경제 중심지는 고린도였고, 종교와 예술 중심지는 아테네였습니다. 헬라 시대에 도시국가를 형성했을 때만 해도 아테네가 스파르타와 더불어 중심적인 도시였지만, 사도 바울 당시에는 많이 위축되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설립 때부터 아크로폴리스라는 해발 150m 넘는 언덕 위에서 생활을 영위했는데, 아테나 여신을 모신 파르테논 신전도 그곳에 있습니다. 도시명 자체가 벌써 아테나 여신의 이름과 연결되어 있지요. 로마 시대에는 이곳의 역할이 미미했지만, 그리스가 터키에서 독립한 이후 인구 1000명밖에 되지 않던 이 마을을 수도로 정하면서 급성장했습니다. 아마도 아크로폴리스와 그 문화유산 때문에 수도로 정했으리라 추정합니다. 역사적으로 다시 살펴보면, 아테네는 헬라 시대 때는 전성기를 누렸고, 로마 시대 때는 아주 조그만 마을로 축소되었다가 지금은 그리스의 수도가 된 유서 깊은 도시입니다.

윤석전 목사: 아덴은 철학 사상이나 이방신에 대한 우상숭배로 가득했습니다. 이 점에 관해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홍순화 원장: 아테네에는 지금 고층 빌딩이 없습니다. 지진을 대비한 면도 있지만, 시내 어디에서나 파르테논 신전을 바라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은 신전 대부분 주춧돌만 남아 있지만 사도 바울 당시 아테네는 화려한 신전, 신상들로 가득했습니다. 아테네는 이처럼 종교 중심지이면서 ‘스토아’나 ‘에피쿠로스’ 같은 학파,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들이 넘쳐난 곳이고, 그런 철학적 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은 곳입니다.

윤석전 목사: 성경에는 사도 바울이 아테네 회당에 가서 유대인들과 경건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저잣거리에 나와서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했다고 했습니다. 그때 변론한 논쟁의 내용과 그 의미는 무엇인지요?

심상법 교수: 아덴에 도착한 바울은 회당에서 유대인과 논쟁했고, 저잣거리(당시 아고라)에서 헬라인과 논쟁했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과도 논쟁했습니다. 바울은 논쟁하는 과정에서 ‘말쟁이’라고 폄하되기도 했습니다(행17:18). ‘몸의 부활’이라는 교리적이고 종교적인 내용을 설명했기에 스토아 학파와 논쟁이 자주 붙었습니다. 그 탓에 바울은 스토아의 바실리코스에서 열린 의회에 붙들려 갑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새 종교에 대한 강론을 듣고자 했습니다. 당시 의회는 강론을 듣고 평가해 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아레오바고에서 열린 바울의 강론은 타 문화선교에 매우 중요한 모델을 제시해 줍니다. 바울의 강론은 기본적인 신앙에서 출발해 그들이 알고 있는 접촉점과 공통점을 찾아 복음의 진수, 핵심, 회개와 믿음, 심판, 내세 쪽으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일반 은총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역사까지 변증론적인 방법으로 설교했습니다.

윤석전 목사: 바울이 아덴에서 전도했던 방법들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심상법 교수: 특히 아레오바고에서 한 바울의 전도 활동은 이방 선교, 타 문화선교에서 중요한 모델이 되었고, 지성인(知性人) 선교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타 종교와 타협했다는 생각도 있겠지만, 바울이 타 종교의 구원관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타 종교 속에 있는 공통점이나 접촉점을 찾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 접촉점에서 출발해 이방인들에게 최상의 신을 소개해 주겠다고 얘기하면서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강력하고 바르게 전했습니다.

윤석전 목사: 바울이 열심히 전도 활동을 펼쳤던 아덴에서는 어떤 유적을 볼 수 있습니까?

홍순화 원장: 아테네에 가면 보통 세계적으로 유명한 파르테논 신전을 보려고 아크로폴리스로 몰려갑니다. 아크로폴리스에 도착하기 직전, 남서쪽에 돌로 된 언덕이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아레오바고 언덕’입니다. 당시에는 사람을 세워 놓고 재판하는 ‘야외 법정’으로, 또 ‘학술 토론장’으로 사용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곳을 전도의 장으로 삼았습니다. 아레오바고 언덕을 올라가다 보면 오른쪽에 동판 하나가 보이는데, 거기에 사도 바울의 설교 전문을 기록해 놓았습니다(행17:22~32).

윤석전 목사: 베뢰아에서 바울에게 전도받은 헬라의 귀부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심상법 교수: 바울이 복음을 전파할 때 호응했던 사람들 중에 헬라 귀부인들이 있었습니다. 헬라 귀부인들은 그 당시 부유하고 권력을 지닌 남편의 영향력으로 상류 계층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 여인들이 유대교에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할례를 행하지 않고 유대교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이점을 이용해 회당에 참여해 바울의 강론을 듣고 반응을 보였습니다. 유대인이 이 귀부인들을 부추겨서 이들 남편의 권력을 이용해 바울을 억압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헬라 귀부인들은 바울의 중요한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윤석전 목사: 다음 호에서는 고린도에 관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고린도는 해안 도시로서 이방신이 많이 들어왔고, 무역 도시여서 부를 축적해 많은 사람이 정욕으로 들끓었던 곳이었습니다. 고린도는 어떤 곳이었고 바울은 어떻게 복음을 증거했는지 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계속>

<윤석전 목사 탐사기행 ‘성서의 땅을 가다’는 www.ybstv.com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469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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