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와 함께하는 ‘성서의 땅을 가다’(30)] 타락의 땅에 피운 복음의 꽃, 고린도교회

등록날짜 [ 2016-02-22 17:49:09 ]

윤석전 목사(연세중앙교회):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 장(章)’이라고 합니다. 인본주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적인 사랑을 이루어 갈 때 모든 것이 통일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제 고린도전·후서의 배경인 의미 깊은 도시 ‘고린도’를 살펴보겠습니다.


<사진설명> 현재 고린도 운하.

바울은 아덴(아테네)을 떠나서 80km 떨어진 아가야의 수도 고린도에 도착했다. 당시 고린도(Corinth)는 그리스 본토에서 펠로폰네소스반도로 떠나는 길목에 자리 잡은 교통 요지이자 그 지역의 중심 항구였다.

현대식 ‘고린도 운하’는 13년 공사 끝에 1893년에 개통된 것이지만, 바울 당시에는 암초로 유명한 뱃길이었다. 온갖 화물과 작은 배들이 5.6km에 달하는 좁은 바닷길을 통해서 고린도로 들어왔다. 고린도는 과일과 담배 수출항이었고, 도기(陶器)와 청동제품으로 유명한 부의 축적지였다. 그 반면 심한 빈부 격차와 피폐한 윤리 생활로 악명 높은 곳이기도 했다.

고린도 중심부에 있던 광장 ‘아고라’에 가면 요즘까지도 당시 번성했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아고라에는 도시 중심부답게 각종 상점, 신전, 법정, 로마식 목욕탕, 노천극장, 별장 등 당시 고린도의 화려함이 집중돼 있었다. 고향을 떠나 고린도로 몰려든 사람들은 그 화려한 외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특히 아프로디테 신전에 기거하던 여자 사제들과 1000명 넘는 여자 노예들은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며 도시의 타락을 부추겼다. 바울은 바로 이 쾌락의 도시를 복음 선포지로 선택한 것이다.

바울은 전도 사역의 신실한 동반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이곳에서 만났다. 그들은 원래 로마에서 살았으나 글라우디오 황제가 유대인 추방령을 내린 탓에 고린도에 정착했다. 훗날 바울은 이들에 관해 서신에서 말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롬16:3~4).

또 이곳에서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환상 중에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행18:10~11).

바울이 18개월간 고린도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자 새로 예수를 구주로 믿는 자들이 급속히 늘어났다. 이 사악한 도시에서도 예수 이름 앞에 하나님의 이적이 일어난 것이다.

오늘날 이곳 고린도에는 바울이 끌려가 재판받던 자리인 비마(Bema, 연설이나 재판할 때 청중을 내려다보게 돌로 만든 높은 판)가 남아 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못마땅히 여겨 아가야 지역 총독 갈리오에게 바울을 고발해 재판장에 세웠다. 갈리오 총독은 바울의 행동이 로마법을 저촉하지 않는 것을 알고 관여하지 않았다(행18:12~17). 이 판정은 유대인들을 아연실색케 했다. 그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안도의 숨을 쉬게 해 주었다. 결국 갈리오의 판결이 기독교를 허락하는 것으로 인정되어 초대교회 복음의 씨가 고린도에 왕성히 뿌려지는 촉매 역할을 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계속 분노를 터뜨리는 바람에 바울은 고린도를 떠나 에베소로 향한다.


윤석전 목사: 바울이 전도할 당시 고린도는 어떤 도시였습니까?

홍순화 원장(한국성서지리원): 고린도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수리아 안디옥과 함께 로마 4대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고린도는 아가야 지방의 정치와 경제 중심지였고, 또 교통 중심지였습니다. 왼편에는 로마를 향해, 오른편에는 아시아 지역을 향해 나가는 해로(海路)가 열려 있었습니다. 그 당시 고린도에는 인구가 40만~50만 명 정도 살았으리라 추정합니다. 바울이 고린도를 사역지로 선택한 것은 고린도가 아가야 지역의 중심 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이 많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윤석전 목사: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동역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났습니다.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왜 고린도에 왔나요?

심상법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신약학): 바울은 로마에서 온 유대 기독인 아굴라·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났습니다. 이 부부는 장막과 가죽을 다루는 일을 했습니다. 이들이 고린도로 온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추측합니다. 첫째, 글라우디오 황제가 내린 로마 내 유대인 추방령 때문이라고 봅니다. 둘째, 장막업을 번창하게 하려고 고린도로 왔다고 봅니다. 그들은 고린도에 와서도 장막업을 계속했는데, 고린도는 유럽에서 로마 다음으로 발달했던 상업도시였기에 장막업이 번창했습니다.

윤석전 목사: 사도행전 18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1년 6개월이나 머물렀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전도자로서 한곳에 매우 오래 머물렀다고 볼 수 있는데요. 바울이 그렇게 오랫동안 고린도에 머문 이유는 무엇인가요?

홍순화 원장: 고린도는 향락과 사치에 찌든 세속적인 도시였습니다. 그 때문에 바울의 마음속에 구령의 열정이 더욱 솟구쳤습니다. 그 덕분인지 죄 많은 곳에 은혜가 풍성하다는 말처럼, 음행과 우상숭배에 물든 고린도에 교회다운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바울이 고린도에 오래 머문 이유는 고린도에 유대인 회당이 많아 유대인 전도에 유리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또 교통 요지였기에 바울은 고린도를 전략적으로 중요한 선교 거점 도시로 삼았습니다.

윤석전 목사: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랑’이란 무엇인지 자세히 말해 주는 ‘사랑 장(章)’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감동을 줘서 가훈(家訓)으로 삼기도 합니다. 사랑 장은 ‘불후의 명작’입니다. ‘사랑 장’을 포함해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보낸 서신, 즉 고린도전·후서에 나타난 복음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심상법 교수: 고린도전·후서에는 한국교회의 문제와 해결 처방을 고스란히 기록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랑 장’이 나왔다는 것은 바꿔 생각하면 사랑 없는 고린도교회 안의 문제를 지적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하나님께서 부어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성령의 역사가 큰 교회였습니다. 구변과 지식과 은사가 풍성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풍요롭게 부어 주셨는데도 영적.도덕적으로는 매우 미성숙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서신에 고린도교회의 영적 상태를 진단하고 성숙한 영성에 관해 자세히 써 보냈습니다. 특히 고린도교회는 1세기 당시, 세속의 중심인 로마 제국과 헬라 문화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교회가 세속에 물들지 않고 올바른 영성을 지닐 수 있는지 잘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안에서 일어난 많은 문제를 접한 후, 서신을 썼습니다.

서신을 읽어 보면 고린도교회의 영성은 겉으로는 대단했지만, 속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랑과 교만, 시기와 분쟁, 멸시, 자기주장이 난무하고 무질서해 윤리 없는 ‘거품 같은’ 영성이었습니다. 바울은 서신을 전해 성숙한 영성을 갖추는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전·후서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입니다.


윤석전 목사: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1년 6개월 머문 후, 그곳을 떠나서 겐그레아로 향합니다. 그곳에서는 또 어떤 사역을 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사진설명> 고린도 남쪽 항구 겐그레아.

바울의 발길은 고린도의 남쪽 항구 겐그레아(Cenchrea)로 향했다. 지금은 비록 폐허로 남아 있지만, 바울 당시 이곳은 펠로폰네소스반도 북동쪽 샤론 만에 자리 잡은 항구 도시로 고린도의 외항 역할을 했다. 이 항구는 우상의 도시로서 많은 신전과 포세이돈 신상이 있었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으면서 이곳에 교회를 세웠고 여집사 뵈뵈를 성장하게 했다.

윤석전 목사:  겐그레아는 어떤 도시였습니까?

홍순화 원장: 겐그레아는 펠로폰네소스반도 가장 윗부분에 있고, 고린도에서 남동쪽으로 11km 떨어져 있습니다. 고린도에는 좁은 해역 탓에 항구가 두 곳 있었습니다. 고린도 왼편에 있는 항구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 ‘레카이온’입니다. 오른편에 있는 항구가 바로 ‘겐그레아’입니다. 왼쪽에 있는 레카이온 항구는 로마 쪽으로 갑니다. 겐그레아 항구는 에게 해를 통해 동편 아시아, 아테네, 이스탄불까지 가는 중요한 길목에 있는 항구였습니다. 겐그레아는 1928년 대지진이 일어나 지금은 해수욕장 크기만 합니다. 옛날 도시의 잔해가 바닷속에 그대로 남아 있어 바다 색깔이 조금 다릅니다. ‘여기가 항구였나?’ 할 정도로 지금은 한적한 해수욕장으로 변했습니다. 사도 바울 당시에 회당 터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곳도 여러 군데 있습니다.

윤석전 목사: 사도행전 18장 18절을 보면 바울이 하나님 앞에 서원합니다. “바울은 더 여러 날 유하다가 형제들을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 서원이 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바울이 굳은 각오와 결심을 하고 복음을 전하면서 어떤 서원을 했을까요? 또 그 서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사진설명> 옛 고린도교회 터.

심상법 교수: 바울의 서원은 유대인이 하는 ‘나실인의 서원’(민6장)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미 이 서원을 했고 그것이 끝나는 날이어서 규례대로 머리를 깎은 것입니다. 바울이 한 서원의 의미를 살펴보자면, 바울은 복음을 전하던 초창기에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따라서 서원을 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리라 믿은 서원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바울이 받은 특별한 비전과 계시에 감사하는 서원일 수도 있습니다. 보통 서원은 예루살렘에서 한 후 어린양이나 어린 암양 같은 예물을 바쳤는데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타지에서도 이런 식으로 서원했다고 합니다.

윤석전 목사: 사도 바울이 고린도 서신 속에 ‘사랑 장’을 기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심상법 교수: 바울은 서신에서 고린도교회에 일어난 많은 문제를 다룹니다. 그중 영적 은사의 남용 문제를 다룹니다. 그러면서 고린도전서 13장, 일명 ‘사랑 장’을 기술했습니다. 13장을 읽어 보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랑이 아닌 것’이라고 표현한 사항에는 고린도교회의 행위와 매우 비슷합니다. 시기, 분쟁, 미움, 자만, 교만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신령한 은사를 풍성히 받은 고린도교회가 그 은사를 자기 자랑, 교만, 방탕, 무질서의 기회로 사용할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공익을 위해 덕을 세워 사용하라고 촉구합니다. 이런 점에서 ‘사랑 장’은 고린도교회의 잘못된 영성, 미성숙한 영성에 대한 아주 중요한 처방을 내렸다고 생각합니다. 그 점을 기억한다면 고린도전서를 더 잘 이해하고 영적 교훈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윤석전 목사: 오늘날 우리의 교회도 세상 풍속에 많이 젖어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가 여전히 교회 안에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사랑 장’을 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처방을 가슴 깊이 새겨야겠습니다. <계속>

<윤석전 목사 탐사기행 ‘성서의 땅을 가다’는 www.ybstv.com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470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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