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6-03-17 16:45:44 ]
<사진설명> 앗소 섬.
윤석전 목사(연세중앙교회):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려고 섬에서 섬으로 이동할 때마다 거친 풍랑을 만난 사건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 목숨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데 값지게 사용했습니다. 결국 많은 우상을 파괴하고 복음의 승리를 가져왔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사도 바울이 3차 전도여행 때 들렀던 ‘앗소’와 ‘미둘레네’ 섬을 살펴보겠습니다.
에베소를 떠나 드로아에서 7일간 머무른 바울 일행은 ‘밀레도’로 가는 배를 타려고 항구 도시 ‘앗소(Assos)’로 향한다. 소아시아 서쪽 무시아 지방의 항구 앗소는 화산 모양으로 생긴 가파른 언덕에 자리 잡아 방어 성벽에 둘러싸인 성읍이었다. 주변 지역이 주로 농경지인 이 도시의 산 정상에는 아테네 신전을 비롯한 고대 도시 유적들이 있다. 드로아를 출발한 바울 일행은 지름길을 택해 ‘앗소’까지 왔고, 앗소에서 배를 타고 미둘레네에 도착했다. 에게 해에 자리 잡은 ‘레스보스’ 섬의 수도 미둘레네(Mitylene)는 지중해성 온화한 기후 덕분에 일찍이 문화가 번성했다. 또 고대에 유명한 시인 사포(Sapho, B.C. 612년경~?) 출생지로 바울 당시 철학과 예술의 중심지였다. 비옥한 땅에서 소출되는 포도와 올리브의 생산지로 널리 알려졌다. 또 해상 교통 요지로 에게 해의 대형 성곽들의 출원지였다. 이러한 이점으로 바울 일행은 아가야에서 수리아로 올 때 ‘미둘레네’를 거쳐 ‘기오’와 ‘사모스’ 섬으로 향한다.
윤석전 목사: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할 때 어느 곳을 어떻게 다녔는지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홍순화 원장(한국성서지리원): 바울 일행의 전도여행은 2차와 3차의 여정이 대체로 비슷하지만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까지는 비슷한 경로로 왔다가 2차 전도여행 때는 북쪽으로 올라가다가 서쪽으로 향했습니다. 3차 때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계속 서쪽으로 직진했습니다. 3차 전도여행 때는 매우 많은 섬에 들렀기 때문에 성경에는 장소나 여정에 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갈라디아’ ‘부르기아’ ‘고린도’ 세 지방만 간단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다닌 수많은 지역에 비해 너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후, ‘앗소’ 지방부터는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앗소는 지금의 터키 지역인데 이곳이 중요한 이유는 해변에 고대 도시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앗소’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유명한 철학도를 양성한 교육 중심지였습니다. 성경에는, 바울 일행이 기오 섬을 떠나 사모스 섬에 들렀다가 다음 날 밀레도로 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행20:15). 기오 섬은 사도 바울이 단순히 그 앞을 지나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유명해진 곳입니다. 그 후 『오디세이』 작가 호머가 그곳에 살면서 작품 활동을 해서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윤석전 목사: 사도행전 20장에 보면 바울이 ‘앗소’에 이르기 전 드로아에서 큰 사건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어떤 사건이었는지 말씀해 주세요.
심상법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신약학): 드로아는 바울이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본 곳이었고(행16:6~10), 3차 전도여행 때는 7일간 머문 장소입니다. ‘드로아 사건’은 유두고라는 청년이 3층 난간에 걸터앉아 바울의 설교를 듣던 중 졸다가 떨어져 죽은 일입니다. 안식 후 첫날에 드린 저녁예배의 상황 중에 일어난 일로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유두고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주일 저녁집회에 참석했다가 3층에서 떨어졌습니다. 바울은 죽은 유두고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그를 일으키는 이적을 행했습니다(행20:9~12). 드로아 사건은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의 바른 자세에 관한 교훈을 줍니다. 이보다 중요한 점은 안식 후 첫날 저녁에 일어난 사건으로서 그날 일정을 살펴보면 강론 후 주의 만찬을 하고, 긴 대화를 나누며 친교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예배 형태인 강론, 성례, 예찬, 친교모임 등을 이 부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윤석전 목사: 바울이 앗소를 거쳐 도착한 미둘레네는 어떤 곳입니까?
홍순화 원장: 그리스 미둘레네는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가 본 분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앗소에서 17km 정도 떨어져 있는 섬으로, 육안으로도 보이는 곳입니다. 미둘레네 여행이 어려운 이유는, 섬들은 그리스 영토, 육지인 항구는 터키 영토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 때는 모두 로마 제국 영토여서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국경선이 가로놓여 마음대로 다닐 수 없습니다.
미둘레네는 해상 교통의 중심지였기에 사도 바울 일행은 앗소에서 미둘레네를 거쳐 사모스 섬으로 향했습니다. 미둘레네는 철학과 예술의 중심지로서 사도 바울이 지나갔다는 이유로 유명해졌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남아 있는 유적은 없습니다.
바울 일행은 미둘레네를 떠나 기오 섬 맞은편에 이르고 그다음 날 사모스 섬으로 향했다. 사모스 섬은 에게 해 남동부 이오니야에 있는 섬 중 하나다. 빼어난 자연경관 덕분에 현재까지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유명한 휴양지다. 중요한 해양 도시로 로마 해군 기지가 있던 장소답게 이곳 고대 로마 도시 유적지 터에는 당시 사모스 섬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유적의 파편을 흔히 볼 수 있다.
특히 로마 군인과 황제까지도 자주 애용했다는 거대한 목욕탕 유적은 규모나 과학적인 시설 면에서 당시 이 섬의 목욕 풍습의 화려함을 짐작게 한다. 또 사모스 섬은 제우스의 아내 헤라의 고향으로, 이방 종교 중심지라 할 수 있다. 주전 6세기에 세워진 고대 그리스 신전 중 가장 큰 것이 헤라 신전이다. 비록 유적들은 파편으로 남아 있지만 그 형태는 당시 이방신의 위세가 어떠했는지 알려 준다. 우상 중심지 사모스 섬에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을 전하러 왔다. 섬 중앙에 있는 퀘레케테우스 산에는 순례자들의 관심을 끄는 에우팔리노스 터널(Eupalinos tunnel)이 있다. 주전 5세기에 고대 로마 도시에 물을 공급하려고 도시 반대편에 있는 수원지와 연결해 1100m에 지하수로를 산에 뚫은 것이다.
당시 포로 출신 기술자 에우팔리노스가 설계해 만든 터널에는 사람이 걸을 수 있는 좁은 길과 곳곳에 얕은 우물이 있다. 돌산을 쪼아서 벽을 다듬은 정교한 솜씨는 당시 이 공사에 얼마나 많은 노예를 투입했는지 짐작게 한다. 또 군데군데 있는 깊은 웅덩이는 전쟁이 일어나면 섬 주민들이 안전하게 은신하는 피신처 역할을 했다고 한다.
헤라 신의 숭배지였던 사모스 섬에는 길가마다 고대 신전과 관련한 유물 파편을 흔히 볼 수 있어 마치 야외 박물관을 방불케 한다. 죽어 있는 유물과 달리 섬에 가득 찬 수많은 교회는 순례자들에게 생생한 기쁨을 전해 준다. 바울에 관한 흔적이 뚜렷하지 않지만 이방신의 숭배지였던 곳에 그리스도 복음을 나타내는 기독교 성화(聖畵)로 가득 차 있다. 이것도 바울이 최초로 뿌렸던 복음의 풍성한 열매이리라. 현재 예배와 기도는 사모스 섬 주민의 생활 일부로 깊이 자리 잡았다. 수도원 한 곳 지하 동굴에는 밧모 섬에 가기 전에 사모스 섬에 들렀다고 전해지는 사도 요한의 기념 장소가 마련되어 있다. 바울은 이방 터에 복음의 씨를 뿌렸고, 그 결실은 현재 묘지에 가득한 십자가로 남아 있다.
<사진 설명> 그리스와 소아시아(현재 터키 지역) 사이에는 수많은 섬이 있다.
윤석전 목사: 사도행전 20장에 나오는 사모스 섬은 어떤 섬인지 자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홍순화 원장: 사모스 섬은 매우 유명한 곳입니다. 터키와 사모스 섬은 1.6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수영을 잘한다면 건너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사모스 섬이 중요한 이유는 피타고라스의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피타고라스의 이름을 딴 피타고리온 항이 있고, 피타고라스 동상과 삼각대가 있습니다. 또 특이한 유적이 많습니다. 에우팔리노스 터널은 그 당시 어떻게 뚫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터널을 이용해서 물을 반대편으로 보냈습니다. 그 밖에도 성벽, 교회 유적지 등 아름다운 유적이 많이 있습니다.
윤석전 목사: 사모스 섬에 아름다운 교회가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홍순화 원장: 당시 비잔틴 제국 관할이어서 기독교 국가였기 때문입니다. 터키 바로 앞에 있어 모슬렘의 영향을 받았지만 교회 영향력이 몹시 강했기에 터키에서도 사모스 섬은 기독교에 혜택을 많이 주었습니다. 터키와 가장 가까운 지역인 포세이돈 해변을 기준으로 한쪽에는 기독교가 융성해 교회를 많이 볼 수 있지만, 그 건너편에는 모슬렘이 장악해 교회를 한 곳도 볼 수 없습니다. 포세이돈 해변이 복음의 최전선이라고 말할 정도로 기독교와 모슬렘으로 그 모습이 극명하게 나뉘었습니다.
윤석전 목사: 바울은 전도여행을 하면서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기면서 인간의 육체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 속에서도 기도로 승리했습니다. 저는 기도에 관심이 많고 또 기도하는 사람을 존경합니다. 성경 속에는 바울의 기도하는 삶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궁금합니다.
심상법 교수: 누가의 기록에 따르면, 3차 전도여행 때 바울의 기도 장면을 마치 영상처럼 표현하고 있습니다. 3년간 눈물로 했던 사역을 마친 다음, 밀레도에서 고별 설교를 하면서 다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이 장면이 사도행전 20장 36절에 나옵니다.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행20:36~38).
또 두로에 상륙해서 그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행21:5).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는 것은 아주 긴박하고 간절함이 밴 태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매사 진지하고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바울의 사역과 기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당시 참회하고 기도했을 때 옥문이 열린 사건은 빌립보 서신의 핵심적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바울 사역의 승리와 바울 전도여행의 놀라운 이정표의 배경에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특히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언제나 기도하는 예수님과 기도하는 사도의 모습을 담고자 했습니다. 서신 서두에도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칩니다. 바울은 자기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전도의 문이 열리도록 기도하라’ ‘사자의 입에서 우리를 구원하도록 기도하라’고 강조했습니다. 기도는 복음 전파와 교회 성장과 개인 영성 성장에 있어 초석이 된다는 점을 배워야 합니다.
윤석전 목사: 실제로 바울이 전도여행을 할 때 세계 곳곳에서 만난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을 늘 적대시했습니까?
심상법 교수: 바울이 전도할 때 유대인에게서만 핍박받은 것은 아닙니다. 헬라인도 바울을 핍박했습니다. 회당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들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3차 전도여행과 관련해서 볼 때, 마게도냐 지역 유대인들은 유별나게 바울을 죽이기로 합니다. 이후 이 무리가 예루살렘까지 바울을 찾아와 매우 괴롭힙니다. 이런 점으로 보아 유대교와 유대인이 가한 핍박은 바울의 복음을 배척하는 하나의 모습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윤석전 목사: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라 내가 시행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주님의 거룩하고 큰 뜻을 위해서 나가는 길에 가로막는 일을 없애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온갖 환경을 이기게 하시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고난을 겪어도 승리하게 해 주셨습니다. 바로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길 원하십니다. 여러분을 돕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 모두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큰 힘으로 바울의 사역과 같이 우리 생애도 바울을 재현하기를 소망합니다. <계속>
<윤석전 목사 탐사기행 ‘성서의 땅을 가다’는 www.ybstv.com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472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