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와 함께하는 ‘성서의 땅을 가다’(34)] 예루살렘에서 당한 핍박과 고난

등록날짜 [ 2016-04-11 13:37:01 ]


<사진 설명> 현재 예루살렘 성전.

윤석전 목사(연세중앙교회):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방인과 이스라엘 유대인과 왕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택한 그릇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 많은 이가 그곳에 가면 죽임을 당한다고 만류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바울이 걸어간 행적을 살펴보겠습니다.


바울 일행은 돌레마이를 떠나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께서 활동하신 곳이고, 그 당시에는 열두 사도가 복음을 전하던 곳으로 바울에게는 마음의 고향과 같았다. 동시에 바울의 적대자들이 포진하고 있는 살벌한 적진이기도 했다.
예수님의 십자가 길은 목숨을 걸고 복음을 증거하러 예루살렘에 온 바울의 발걸음 속에 이어지고 있었다. 바울이 도착한 날에는 화창한 하늘 아래 예루살렘 성전 서쪽 벽 주변에 수많은 유대인이 모여 있었고, 바울은 예수님처럼 무리를 뚫고 성전을 향해 묵묵히 걸어갔다. 지금은 그 성전이 모두 파괴돼 ‘통곡의 벽’이라고 부르는 서쪽 벽 끝부분이 조금 남아 있다.
예루살렘 성전 자리에는 이슬람교 모스크인 황금 돔 사원이 있다. 주전 965년에 솔로몬이 이곳에 성전을 건축했다. 또 이곳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 했던 모리앗 산 바위가 있던 곳이라고 알려져 순례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현재 이곳에 서 있는 화려한 사원은 이슬람교 성지로서 모슬렘만 출입할 수 있고, 유대인에게는 출입이 금지됐다. 바로 이곳 어딘가에서 바울은 ‘율법의 파괴자’라는 오해를 풀어 주려고 7일간 정결 예식을 행했다. 하지만 그 예식은 도리어 유대인을 격노케 했고 예루살렘이 발칵 뒤집혔다. 그리고 바울은 로마 군인에게 체포됐다. 비록 지금은 이방신을 섬기는 모스크로 남아 있지만, 2000년 전 바울의 역사는 그 터 위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윤석전 목사: 바울의 제자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는 것을 무척 반대했습니다. 바울이 목숨을 잃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바울에게 예루살렘이란 곳은 어떤 의미를 띠고 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홍순화 원장(한국성서지리원):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인간 바울에게 예루살렘은 신앙과 배움의 고향이며 민족정신의 중심지였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회심한 사도 바울에게 예루살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장소였습니다.

윤석전 목사: 바울이 자신에게 위험한 일이 닥칠 줄 알면서도 예루살렘에 간 이유는 무엇입니까?

심상법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신약학): 바울의 가슴에는 복음 전파의 사명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바울에게는 주님의 가르침과 주님의 행적에 관한 회상이 가득했던 것 같습니다. 바울도 주님처럼 사명을 완수하여 복음을 전파하고자 위험을 무릅쓰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누가는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주님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눅9:51). 예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려 예루살렘에 올라가기로 한 그 모습이 바울의 마음속에 떠오르지 않았나 추측해 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루살렘 입성을 늦추지 않았습니다. 바울도 예수님처럼 예루살렘에서 체포돼 여러 신문(訊問)을 받고 왕 앞에서 복음을 전파할 기회를 얻습니다. 결국 바울이 죽음을 무릅쓰고 예루살렘행을 택한 것은 주님처럼 온갖 수난을 당할지라도 복음 전파의 사명을 이루겠다고 결단했기 때문입니다.

윤석전 목사: 사도행전 24장을 보면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결례(潔禮, 유대인의 정결의식)를 행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결례를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홍순화 원장: 사도 바울은 그동안 선교지에서 복음을 증거하면서 유대인에게 심한 핍박을 받았고 심지어 살해 위협까지 당했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다른 교우들과 함께 성전에 가서 정결예식을 하면 유대인의 적개심을 줄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일은 허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윤석전 목사: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격노한 유대인들이 죽이기로 결의해 소동을 일으킬 정도로 바울을 핍박했습니다.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심상법 교수: 예루살렘에서만 소동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1~3차 전도여행지 회당에서 복음을 전할 때 이미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심하게 반감을 품었습니다. 그 후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그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품은 좋지 않은 감정이 모여 ‘잘됐다, 이번에 죽이자’고 결의한 것입니다.

또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저희가 들었도다”(행21:21)라고 말하면서, 바울이 유대인과 율법과 성전을 멸시하고 더럽혔다고 해서 소동을 일으킵니다.


윤석전 목사: 유대교의 전통을 무시했다고 해서 일어난 소동이군요. 그 와중에 로마의 천부장은 바울을 가이사랴로 피신시켰습니다. 바울이 가이사랴로 가기 전에 들른 안디바드리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사진설명> 안디바드리(아벡) 오스만 성채.


체포된 바울을 죽이려고 유대인들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정보를 받은 로마의 천부장은 보병 200명, 마병 70명, 창군 200명 모두 470명이나 되는 군인을 동원하여 한밤중에 바울을 가이사랴로 보낸다. 안디바드리(Antipatris)는 그 중간 기착지다.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까지 이어지는 군용도로 중간 지점으로 예루살렘 북쪽 64㎞에 있다. 지중해로 흐르는 야르콘 강은 예루살렘까지 물을 공급했는데 수원지가 바로 안디바드리 아벨타워에 있었다. 안디바드리는 욥바에서 예루살렘이나 세겜으로 통하는 도로와 해안 길과 교차하는 지점에 있어 고대부터 매우 중요한 상업과 교통의 요지였다. 또 이곳은 중요한 군사 주둔지로서 로마 군인의 숙소와 말 교체지가 있었다. 바울을 호송한 로마 군인들은 유대인을 피해 밤길을 달리듯 걸어 바로 이곳에 도착했다. 바울 앞에는 로마로 통하는 마지막 관문, 항구 도시 가이사랴가 기다리고 있었다.


윤석전 목사: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을 떠나서 밤중에 안디바드리에 도착했습니다. 예루살렘과는 얼마나 떨어진 곳인지요?


홍순화 원장: 안디바드리는 구약성경에 ‘아벡’이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까지는 104km 정도 되는데 안디바드리는 그 중간에 있습니다. 로마 군인의 숙소와 말 교체 장소가 있던 군대 주둔지였습니다. 또 안디바드리는 여호수아에게 멸망한 도시국가가 있던 곳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싸운 에벤에셀 전쟁 때 블레셋 군인들이 진을 친 장소이고, 지역적으로 보면 ‘라스엘아인’이라는 샘이 있던 곳입니다. 예전에 예루살렘에 물을 공급하던 수원지였습니다. 이곳에 유적지 두 곳이 있습니다. 한 곳은 16세기에 지은 오스만 성채, 나머지는 가나안 사람이 거주지로 정했던 야르콘 강 유역입니다.

윤석전 목사: 사도 바울은 유대인에게 체포돼 법정에 서게 됩니다. 그 소송은 어떤 의미를 띠고 있습니까?

심상법 교수: 유대인들은 이미 사도 바울의 1~3차 전도여행지에서 복음을 격렬하게 반대했습니다. 그러다가 예루살렘에 와서 폭발한 것입니다.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모인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바울이 결례를 하려 성전에 온 모습을 보고 “성전을 더럽힐 목적으로 헬라인까지 데리고 왔다”고 오해해 사도 바울을 법정 고소를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정결법을 어겼다고 법정에 세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체포돼 법정 소송을 당했고, 여러 왕과 임금 앞에 다섯 차례 정도 섰습니다. 이와 매우 유사하게 사도 바울도 법정에 서서 신문을 받고, 얼굴을 맞고, 거짓 증인의 허위 진술을 듣게 됩니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의 은밀한 희생자로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는 저주의 소리를 들으신 것처럼, 바울도 “저를 없애자”는 외침을 들어야 했습니다. 바울이 복음 증거를 위해 예루살렘에서 당한 법정 신문은 주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당한 법정 신문과 매우 유사합니다. 한마디로 “종이 주인보다 낫지 않다”고 한 누가의 말처럼, 법정 신문에는 그런 의미가 가득 들어 있습니다.

윤석전 목사: 바울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제자의 삶으로 재현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사도행전 25~26장에는 안디바드리를 떠나 가이사랴에 도착한 바울이 사도행전 9장 말씀대로 왕들 앞에서 변론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법정 기사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심상법 교수: 이 법정 기사는 결국 사도행전 9장 15~16절에 언급한 예언의 성취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행9:15~16).

또 이 사건은 결국 바울이 로마까지 가는 여정의 한 부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을 구원하시려고 여러 왕 앞에 서서 신문을 받으셨습니다. 바울이 신문을 다섯 번이나 받은 사실은 예수님이 당한 다섯 번의 법정 신문과 매우 유사한 길을 걸어간 모습임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런 법정 기사들은 바울이 이방인 구원을 위해 임금들 앞에 서서 복음이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윤석전 목사: 바울은 죄수 신분인데 어떻게 왕 앞에서 자기를 변론할 수 있었을까요?

심상법 교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바울이 로마 시민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신문하는 백부장에게 자기가 로마 시민이라고 밝혔습니다. 당시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는 법정 상소를 하면 총독과 황제 앞에서 신문을 받을 자격이 있었습니다. 이런 신분을 충분히 활용해서 바울은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로마 시민권은 바울의 복음 선교에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윤석전 목사: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복음전도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핍박을 받으면 저곳으로, 저곳에서 핍박을 받으면 또 다른 곳으로 옮겨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께서는 항상 성령의 이끄심으로 복음을 전하시다가 최후에는 복음의 완성인 십자가 죽음을 위해 가야바의 뜰에서 모진 매를 맞으시고 결국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올라 피 흘려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시켰습니다.

바울 역시 완성된 복음을 증거하고자 예수님의 생애를 재현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목적이 헛되지 않도록 인류 모두 구원받길 원하는 소원이요, 뜻을 이루려 한 것입니다. 우리도 어디를 가든지 복음을 전하여 한 영혼이라도 죄로 멸망하지 않도록 힘을 다해 복음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계속>


<윤석전 목사 탐사기행 ‘성서의 땅을 가다’는 www.ybstv.com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475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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