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와 함께하는 ‘성서의 땅을 가다’(37)] 로마에서 바울의 첫걸음 아피아 가도

등록날짜 [ 2016-05-09 11:34:26 ]


<사진설명> 아피아 가도.

윤석전 목사(연세중앙교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자(使者)로서 로마를 복음으로 정복하려고 길을 나섰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로마를 향해 내디딘 그의 발걸음은 개선장군의 그것보다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당시 바울 일행이 로마를 향해 걸어갔던 길, ‘아피아 가도(街道)’를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보디올을 떠나 육로로 로마에 갔다. 장차 세계 복음화의 심장부가 될 로마 시에 점차 다가갔다. 사도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이탈리아에 도착했고, ‘아피아 가도(Via Appia)’를 거쳐 로마에 입성했다. 로마에 있는 유대인과 많은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의 복음을 전하고 싶었던 바울. 그 소망을 이루려고 한 걸음 한 걸음 밟고 간 ‘아피아 가도’는 고대 로마의 가장 중요한 도로로서, 군대와 물자를 신속하게 이동하려고 만들었다. 길이는 50km다.

사도 바울이 걸어갔던 길을 밟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순례자의 가슴은 감동으로 일렁인다. 아피아 가도의 가로수는 여전히 길을 지키면서 먼 과거의 시간을 현재로 끌어당기는 듯하다. 구령의 열정을 품고 온 로마, 걸어온 그 길의 끝에서 바울을 기다린 것은 예수를 위한 순교의 시간이었다.


윤석전 목사: 예루살렘에서 포박당한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로마까지 갑니다. 바울의 마지막 전도여행지인 로마로 가는 여정을 말씀해 주세요.

홍순화 원장(한국성서지리원):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 거쳐 간 길은 멀어도 경로는 비교적 단순합니다. 사도 바울은 ‘안디바드리’에서 1박 한 후 가이사랴에 도착합니다. 그곳에서 총독 벨릭스에게 억류당해 2년을 보냅니다. 총독이 베스도로 바뀌자 아그립바 왕이 인사차 가이사랴에 들렀을 때 총독과 왕이 바울을 심문했으나 죄의 혐의를 찾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로마 시민인 바울이 이미 황제에게 호소하였기에 다시 재판받으러 로마로 떠나게 됩니다. 당시 항로를 따라 ‘시돈’을 거쳐 ‘무라’에 들렀습니다. ‘무라’는 지금의 터키입니다. 또 항로를 따라 ‘니도’와 ‘그레데(크레타 섬)’를 지납니다. 여기서 풍랑을 만나 지금의 말타 공화국인 ‘멜리데’까지 떠밀려 갑니다. 그곳에서 석 달을 보낸 후, 지나가는 배를 타고 ‘수라구사’, 지금의 시칠리아 섬까지 갔습니다. 또 본토에 있는 ‘레기온’ 항구에 들렀다가 ‘보디올’에 상륙했습니다. 보디올은 나폴리 바로 옆에 있는 항구입니다. 보디올에 도착한 바울은 200km 떨어진 로마까지 육로를 이용해서 걸어갑니다.

윤석전 목사: 사도 바울은 자신의 선교 전략을 어떻게 평가했나요?

김판임 교수(이화여자대학교 신약학): 그 부분은 고린도전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학자들은 바울이 주후 32~33년에 회심했고, 주후 53~54년경에 고린도전서를 집필했다고 추정합니다.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선교한 지 20년 즈음, 즉 바울 선교 마지막 시기에 쓴 글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자신의 선교 활동에 큰 자부심을 느끼고 집필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전도여행 내내 원칙을 제대로 세웠고, 그 원칙은 성공적이어서 이방 지역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선교 전략이 적중했다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윤석전 목사: 바울은 항상 성령의 감동에 따르면서 언제든지 자기의 전략보다는 하나님의 전략에 따라 선교했습니다. 따라서 후회 없는 선교 전략이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28장 15절을 보면 “거기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저자와 삼관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저희를 보고 하나님께 사례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압비오 저자(Appii forum, 시장.광장)’와 ‘삼관(Tree-Taverns, 세 상점)’은 어떤 곳이었나요?


홍순화 원장: 사도 바울은 로마로 향하는 길에 두 곳을 지나갔습니다. ‘압비오 저자’와 ‘삼관’입니다. ‘압비오 저자’는 로마에서 63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아피아 가도 바로 옆에 있습니다. ‘삼관’은 로마에서 48km 정도 떨어진 장소로 추정합니다. 보디올에 도착한 사도 바울은 로마를 향해 갔는데, 당시 로마로 가는 길은 여러 가지였습니다. 그중 내륙지방으로 들어가는 ‘라티나 도로’를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보디올에서 내륙으로 가면 빙 둘러야 해서 사도 바울은 해변 길을 따라 로마로 갔습니다. 그 길이 바로 아피아 가도입니다.

윤석전 목사: 로마에 사는 예수 믿는 형제들은 바울이 온다는 소식을 어떻게 알고 압비오 저자까지 마중을 나왔을까요? 

홍순화 원장: 두 무리가 사도 바울을 찾아왔습니다. 한 무리는 ‘삼관’까지 왔고, 더 열심 있는 사람들은 로마에서 이틀 걸리는 ‘압비오 저자’까지 마중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서 200km 떨어져 있는 보디올에서 일주일을 머물렀습니다. 당시 교통망이 발달해 우편배달이 놀라울 정도로 빨랐습니다. 따라서 바울의 소식을 쉽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로마서에 기록된 편지로 이미 그들은 사도 바울을 알고 있었기에 바울이 로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마중 나온 것입니다.

윤석전 목사: 바울은 죄수로 묶여 간다고 번민하며 고통스러워하기보다 로마에 가서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다는 기쁨에 가슴 벅찼을 것입니다. 바울이 압송된 아피아 가도를 따라 그의 행적을 살펴보겠습니다.



<사진설명> 아피아 가도.


바울이 도착한 아피아 가도 주변에는 중소 농장이 많았다. 가도(街道) 덕분에 농사짓기가 편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 자리에는 수백 년을 이어 온 농장이 자리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주인 잃은 양 떼처럼 불쌍히 여기셨다. 바울도 그와 같은 심정으로 이 땅에 섰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양의 구원 문이었다. 그 문을 오고 가며 양들은 양식과 생명을 얻되 더욱 풍성히 얻을 수 있었다. 바울도 새끼에게 젖을 주는 어미처럼 로마인에게 복음을 풍성히 주고 싶었을 것이다.

순례자들은 이 땅의 풍경보다 더 오랜 세월을 이어온 아피아 가도를 좇아 길을 떠난다. 길은 이용하는 자가 곧 주인이다. 그 주인이 바울이 된 순간, 그 길은 주인 잃은 양 떼 같은 로마인들에게 구원 소식을 전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었다.


윤석전 목사: ‘아피아 가도’는 어떤 곳인지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홍순화 원장: 로마 최초의 고속도로였습니다. 주전 312년에 감찰관 ‘아피우스’가 건설해서 그의 이름을 따 ‘아피아 가도’라고 부릅니다. 지금까지 도로는 그저 ‘통로’라는 인식이 강했으나 아피아 가도는 정치.경제.군사적으로 길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건설한 도로였습니다.

아피아 가도는 ‘도로의 여왕’이라고 합니다. 그 후에 세운 모든 도로의 모범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도로 폭은 4.1m 정도로 마차 두 대가 동시에 다닐 수 있습니다. 인도 폭은 1~3m 정도로 차도 양옆에 따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가도 대부분을 포석으로 포장했는데 그 구조는 현재 도로와 비슷합니다. 포장 전체 두께는 1~1.5m, 최상층에는 접합면이 맞물리도록 자른 70cm 정도 돌을 마치 접착제로 붙인 듯 빈틈없이 깔았습니다. 따라서 배수가 잘되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통행세를 받지 않는 ‘무료 고속도로’였다는 사실입니다.


윤석전 목사: 바울은 아피아 가도를 걸으면서 자신이 로마에서 죽을 것을 예상했을까요?

김판임 교수: 로마서 1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가고 싶어 하는 표현이 여러 군데 나타납니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13절).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15절).

비록 죄수로 재판받으러 포박당해 가는 길이지만, 바울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죽으러 간다는 생각보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로마에 있는 기독교인을 만나서 형제애를 나누려는 애틋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특히 사도행전 마지막 표현을 보면 바울이 잡혀서 처형당했다는 표현으로 끝나지 않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행28:31)라고 끝납니다. 어떤 부분에서도 바울이 죽음을 예상하거나 감지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윤석전 목사: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처럼 당시 로마에는 아피아 가도 외에 많은 길이 있었습니다. 어떤 길이 있었는지 말씀해 주세요.

홍순화 원장: 로마인은 길을 단순한 통로가 아닌, 모든 것의 중심, 이른바 ‘네트워크’라는 개념으로 지었습니다. 길을 뚫어도 여러 곳으로 연결되게 했습니다. 로마 시대 도로들은 매우 촘촘하게 이어져 있습니다. 더 놀라운 점은 당시 로마 시대 도로망이 지금의 도로망과 유사하다는 사실입니다.

로마는 길에 관해 ‘세계적’이었습니다. 로마 시대 최고 업적은 ‘길’이라고 할 정도입니다. 심지어 로마 시대 도로 중, 다리는 지금도 300개 정도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당시 도로들은 유지보수를 잘했고 치안도 확실했습니다. 따라서 로마 사람들은 그 도로를 군사.정치.경제면에서 전략적으로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복음을 전하는 데 사용하셔서 ‘복음의 고속도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조금 더 설명한다면, 로마에는 네 종류 길이 있습니다. 첫째, ‘국도(國道)’입니다. 국가에서 관리하는 것으로 8만km 정도 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아피아 가도입니다. 둘째, 군인들이 책임지고 관리하는 ‘군도(軍道)’가 있습니다. 셋째, 지방자치단체에서 관리하는 도로가 있고, 넷째, 개인 도로가 있습니다. 지방자치단체 도로와 개인 도로까지 합하면 도로 길이만 약 30만km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잘 닦인 길을 복음의 수송로로 삼았습니다.



<사진설명> 아피아 가도 전체 지도.

윤석전 목사:
바울의 복음 전도로 로마는 복음화되었습니다. 미국이 강대국으로서 전 세계에 선교사를 파송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나라도 경제적 부유를 누리면서 수많은 기독교인이 전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또 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예수 믿고, 그들이 이제 전도자가 되어 복음을 전합니다. 이처럼 상호 간에 물질문화를 교류함으로 말미암아 복음이 전파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자신이 가는 발걸음, 그곳이 바로 바울처럼 복음을 전하는 장소가 되게 해야 합니다. 멸망하는 영혼을 살리는 절대적 구령의 열정을 불태울 장소가 되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의 공로를 몰라 영육 간에 멸망하는 사람에게 바울과 같이 성령의 감동으로 복음을 전합시다. 지옥 갈 영혼을 살려 천국에서 모두 행복하게 사는 믿음의 전도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계속>


<윤석전 목사 탐사기행 ‘성서의 땅을 가다’는 www.ybstv.com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479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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