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와 함께하는 ‘성서의 땅을 가다’(38)] 드디어 로마에 입성한 사도 바울

등록날짜 [ 2016-05-16 12:42:40 ]


<사진설명> 로마 트레비 분수.

윤석전 목사(연세중앙교회):  부강한 나라 미국은 여러 국가 사람에게 선망의 대상입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우리나라도 지금은 선진국 반열에 올랐기에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가 보기를 원하는 나라가 됐습니다. 사도 바울이 선교할 당시 로마도 군사, 정치, 산업적으로 매우 번성하고 부유했기에 많은 이가 ‘그곳에서 한 번 살아 봤으면’ 하고 선망하는 도시였습니다. 그와 동시에 우상숭배와 죄악이 들끓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울이 입성할 당시 로마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당대 세계 최고 도시 로마는 사도 바울이 그렇게도 복음 전하기를 소망했던 곳이다. 드디어 그 로마가 바울 일행의 눈앞에 펼쳐졌다.

바울이 활동한 시기는 주후 1~2세기로서 팍스로마나(Pax Romana, 주후 96~180년, 로마의 평화) 시대였다. 그때 당시 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로마 시(市)는 현재 세계적 관광도시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로마 시 중앙에는 독립국 바티칸시국(Vatican City State)의 궁전이 있다. 현재 교황의 주거지인 바티칸 궁전은 박물관, 미술관, 도서관을 20개 넘게 보유한 국제적 관광 명소다. 중세시대 세계 최대 국가의 권력 핵심부가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가 땅이 된 것이다.

이런 바티칸시국의 존재와 로마의 역사적 유산은 세계에서 연간 천만 명이 넘는 관광객을 끌어모은다. 로마 시는 현재 이탈리아에서 인구 밀도 1위다.

로마의 분수 중 단연 최고는 ‘트레비 분수’. 바로크 양식의 마지막 걸작으로 베르니니가 설계했고, 1732년부터 만들어 1762년에 완성했다. 이러한 문화유산의 고색창연함과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로마 시는 관광업, 건설업, 영화 제작업으로 고용을 창출하고 있다. 현재 로마는 정치, 행정 도시의 역할만 담당하고 있다.


윤석전 목사: 바울 당시 로마는 지리, 역사적으로 어떤 도시였나요?

홍순화 원장(한국성서지리원): 로마는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될 만큼 유명한 곳입니다. 로마 시는 로마 제국의 수도였습니다. 국가명과 수도명이 같습니다. 옛날 모든 도시는 방어 목적으로 높은 지역에 지었습니다만 로마는 낮은 언덕 7개를 중심으로 도시를 형성했습니다. 이런 지리적 여건 덕분에 로마 중심에 흐르는 테레베 강의 홍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습니다. 로마는 초창기에 국력이 매우 약했습니다. 또 북쪽 세력과 남쪽 그리스 세력이 거들떠보지 않을 정도로 중간 지역에 있었기에 주변 국가들이 경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로마는 국력을 서서히 키워 나갔습니다. 그런 약소국가 로마가 주전 270년경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합니다. 이탈리아 반도 중앙에 자리한 지정학적 이점이 위력을 발휘한 것입니다. 내륙 지방 사방으로 도로를 내서 동서남북으로 뻗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 때는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평정해 200년간 평화를 유지했습니다. 당시 로마는 인구 100만 명 정도인 큰 도시였습니다. 시설 면에서도 매우 발달한 실용 도시이자 세계 중심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윤석전 목사: 바울이 선교할 당시 로마의 정치 상황은 어떠했나요?

김판임 교수(이화여자대학교 신약학): 바울이 선교할 당시 로마는 수도로서 황제가 거주했고 입법자문기관인 원로원이 있는 정치 중심지였습니다. 바울은 주후 30~50년경에 활동했는데 당시 로마는 정치적으로 매우 안정돼 있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주전 39년부터 주후 14년까지 오랫동안 집권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 티베리우스와 갈릴굴라가 14~37년까지 장기간 집권했고, 글라디우스 황제가 41~54년까지, 역사적으로 악명 높은 네로 황제가 54~68년까지 집권했습니다. 바울이 선교활동을 하다가 붙잡혀 왔던 54년에는 네로 황제가 집권할 때였지만, 네로는 고작 16세였습니다. 제대로 통치할 수 없었기에 그 어머니가 후견인으로 있으면서 세네카라는 철학자를 정치에 투입합니다. 따라서 선정을 했습니다.

윤석전 목사: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 로마에는 어떤 종교가 있었습니까? 

김판임 교수: 로마는 종교적으로 미약했습니다. 주전 500년경 고대 로마 당시 로마인들은 일곱 언덕 중 하나인 카피톨리노 언덕에 신전을 세웠습니다. 그곳에서 로마의 주요 신인 주피터, 미네르바, 주노를 숭배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 이후 그리스 문화가 세계화하자 로마에서 숭배하던 신들은 그리스 신들과 거의 동일시됩니다. 예를 들면, 로마의 주피터 신은 그리스의 제우스 신이었다고 합니다. 로마는 로마 제국으로 부상했고, 정복하는 곳마다 그 지역 신을 인정해 주고 주민들이 신을 섬기는 것을 통제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정치를 안정시키려고 신전을 제거하기도 했습니다. 로마인들은 시저 황제 서거 후에 시저의 신전을 세웠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죽은 후에도 그의 아들이 그를 기리는 신전을 지었습니다.

윤석전 목사: 우상숭배가 만연한 곳에서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해 결국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이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위대한 역사입니다.


<사진설명> 스페인 광장에 있는 바르카차 분수. 


스페인 광장은 콜로세움, 트레비 분수와 함께 로마의 3대 명소다. 스페인 광장에서 관광객들의 눈길을 끄는 조각배 모양 ‘바르카차 분수’는 건축가 베르니니가 만든 것으로 바로크 양식의 걸작이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이 13번째 계단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앉아 있던 장면으로 유명한 ‘트리니티 몬티 계단(Scalinata di Trinita dei Monti, 137계단)’에는 세계에서 몰려온 청춘 남녀들로 늘 붐빈다.

젊고 아름다운 남녀들이 18세기에도 이 계단에 몰려들었다. 이는 당시 이탈리아 유명 예술가들이 자기 작품의 최고 모델을 이 계단에서 뽑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도 야외 패션쇼와 각종 전시회가 열리고 있어 여전히 ‘예술의 광장’ 면모를 자랑한다. 18세기 이래 수많은 예술가가 찾던 ‘콘도티 거리(Via dei Condotti)’에서 예술가들은 자신의 미적 심상을 걸작 곳곳에 남겨 후대에 전하고 있다.


윤석전 목사: 그 당시 로마 문화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김판임 교수: 로마 문화는 헬레니즘 문화를 통해 형성되고 발전했기에 헬레니즘 문화의 특성을 그대로 유지했다고 보겠습니다. 달리 표현한다면, ‘그리스 문화의 세계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크게 번성한 로마는 각 지역의 문화, 종교를 존중했습니다. 각 지역이 문화, 종교적으로 교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도로가 발달했기 때문입니다. 도로로 군대 이동, 문화적 교류, 무역 활성화가 이루어져 로마는 경제와 군사적으로 부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또 건축이 발달해 신전, 주택, 경기장을 비롯한 수많은 건축물을 지었습니다.

윤석전 목사: 로마에 도착한 후, 사도 바울의 행적이 어떤지 성경에 자세히 나와 있지 않습니다. 역사적 자료를 종합해서 바울의 행적을 상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홍순화 원장: 사도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자 특혜가 주어졌습니다. 감옥이 아니라 셋집에서 감시병과 함께 지냈다고 합니다. 또 바울은 로마에 도착할 당시, 많은 사람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을 ‘죄수 아닌 죄수’로 인정했다는 의미입니다. 복음을 전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섭리겠지요. 사도 바울은 셋집에서 지낸 지 사흘 만에 유대인 중 높은 사람을 불렀다고 합니다. 영향력 있는 회당 지도자들을 불렀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 후 그들에게 2년간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행전은 그 대목에서 끝납니다. 그 후 사도 바울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학자들은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로마서 15장 23절에 따라 서바나(스페인)에 가서 복음을 전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또 한 가지는 사도 바울이 전도한 곳, 심지어 그레데(터키) 지역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하지만 초대교회 전승에 따르면 사도 바울은 다시 체포되어 로마로 끌려와 네로 황제 때 순교했다고 합니다.

윤석전 목사: 바울은 자신이 쓴 서신에서 로마에 무척 가고 싶다는 표현을 자주 했습니다. 아마 성령께서 역사하신 주님 심정이라고 믿습니다. 그만큼 로마는 바울의 가슴속에서 소망하는 도시였습니다. 바울과 로마의 관계를 설명해 주세요.


<사진설명> 로마 콜로세움.

김판임 교수:
로마서를 보면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매우 보고 싶어 하지만 길을 찾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롬1:13~15).

사도 바울의 동역자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에게서 로마 중심지에 기독교인이 있다는 말을 듣고 로마에 관심을 두고, 가고 싶다는 의욕을 가진 듯합니다.


윤석전 목사: 바울이 가진 복음의 스케일과 열정은 참 대단한 것 같습니다. 바울 이전에도 로마에 기독교인이 꽤 많았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바울 이전의 기독교와 성도에 관해 말씀해 주세요.

김판임 교수: 로마에 어떻게 교회를 형성했는지 성서 자료로는 알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에게서 로마 교회에 관해 들었습니다.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가 주후 44년 글라디우스 황제의 유대인 추방령에 따라 고린도로 이주한 점으로 보아 당시 로마에 유대인이 매우 많았고, 그들 중 몇몇이 예루살렘과 안디옥에서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후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한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윤석전 목사: 로마 교회에 여성 성도가 많았다고 하던데요?

김판임 교수: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문안하면서 35명의 이름을 언급합니다(롬16장). 뵈뵈, 마리아, 암블리아 등등인데 그중 3분의 1이 여성입니다. 이들은 로마 교회의 여성 지도자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윤석전 목사: 우리는 바울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뜨겁습니다. 가는 곳마다 방해받고 때로는 옥에 갇히고 매 맞고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도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후퇴나 양보를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핍박하고 앞길을 가로막는 이들을 바라볼 때마다 오히려 그들을 더 불쌍히 여겼습니다. 예수를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니까요. 그럴수록 더 악착같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특히 바울 생애 중에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역사가 뜻깊은 것은 최강대국에서 수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쳐 복음이 전 세계에 퍼지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혼 구원의 열정입니다. 또 예수 십자가 피의 공로가 누구에게도 헛되지 않기를 원하는 진실한 주님 심정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어디를 가든지 영혼을 살리겠다는 영적 스케일을 가지고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구령의 열정을 가지기를 바랍니다.<계속>


<윤석전 목사 탐사기행 ‘성서의 땅을 가다’는 www.ybstv.com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480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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