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6-06-13 15:45:54 ]
윤석전 목사(연세중앙교회): 바울은 온갖 고통을 당하면서도 자기 목숨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생애를 바쳤습니다. 바울은 그토록 원하던 로마 복음전도를 위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에게 붙잡혀 로마로 압송됐습니다. 로마에 도착하자 죄수의 몸인데도 사람들에게 복음 전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결국 네로 황제가 로마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던 시기에 바울도 참혹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사도 바울이 참수당한 순교의 현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사진설명> 사도 바울 참수 터.
바울은 말했다.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4).
그 좇음을 완수하고자 바울은 이 땅의 마지막 관문을 통과해야만 했다. ‘바울 참수 터’는 그 마지막 코스로 사도 바울이 생애를 마감한 장소다. 사도 바울이 처형당한 장소는 현재 철망으로 막아 놓았다. 네로 황제가 기독교를 박해하던 시기인 주후 64년에서 67년 사이에 바울은 참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죽음은 많은 전승을 남겼다. 참수를 당한 순간, 바울의 목이 세 번 튀었다는데 그 자리마다 물이 솟았다고 한다. 바울은 회심한 후 34년간 해 온 선교활동을 그렇게 마감했다. 바울의 목을 베는 데 사용한 처형 돌은 철장에 둘러싸인 채 사도 바울의 마지막 순간을 말해 주고 있다.
바울은 주의 복음을 전하다가 죽겠다고 작정했다. 복음을 확산시킬 수만 있다면 자기 한 몸 기꺼이 바치겠다고 피력한 말을 성경에서 자주 볼 수 있다. 따라서 순교는 바울로서는 기다렸던 바요, 당연한 생의 여정이었다. 바울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뿌려 놓은 복음의 씨로 말미암아 주후 300년경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공포했다. 이처럼 바울의 죽음은 헛되지 않고 세계에 복음을 증거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2만km에 달하는 전도여행으로 세계 복음화의 초석을 놓은 바울. 그의 힘은 오직 영혼 사랑의 열정이었고, 그것은 곧 예수의 마음이었다.
윤석전 목사: ‘바울 참수 터’는 어떤 곳입니까?
홍순화 원장(한국성서지리원): 로마를 둘러싸고 있는 아우렐리아 성 밖으로 나가 에우르(Eur) 방향으로 5km 정도 가면 바울이 순교한 장소에 도착합니다. 당시 그곳을 ‘아크바스살비아’라고 불렀습니다. 사도 바울이 참수당한 후 그 자리에 ‘트레폰타나(Tre fontana)’라는 수도원을 지었습니다. 전승을 따르면 사도 바울이 참수당한 후 목이 바닥에 세 번 튀었는데 그 자리마다 물이 솟아올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수도원의 이름을 ‘세 개의 분수’라는 뜻을 지닌 ‘트레폰타나’로 지었습니다.
윤석전 목사: 바울은 참수당해 순교했습니다. 바울의 희생이 인류 역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바울은 로마법대로 둥그런 돌기둥에서 목 베임을 당해 죽었습니다. 당시 참수형은 어떤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가하는 사형(死刑) 방법이었나요?
김판임 교수(이화여자대학교 신약학): 사형은 대부분 ‘반역죄’에 해당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 시민이 아니었기에 장시간 고통받다 죽는 십자가형에 처해졌습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이라는 혜택으로 그나마 고통 없이 빨리 죽는 처형 방법인 참수형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윤석전 목사: 로마에는 바울과 관련한 성지가 많습니다. 그 성지들은 언제 어떻게 세워졌습니까?
홍순화 원장: 사도 바울이 죽기 전에 갇혔던 마메르틴 감옥에는 “감옥 벽에서 샘물이 솟아나와 그 물로 침례를 주었다”는 말이 전해져 옵니다. 마메르틴 감옥은 사도 바울과 베드로가 갇혔던 곳이라서 후대에 성지가 되었습니다. 또 참수교회, 일명 ‘세 분수 교회’는 주후 6세기부터 내려온 것으로 추정하는데 지금의 교회는 1221년에 지어졌습니다. 또 바울기념교회는 사도 바울의 무덤 위에 세워졌습니다.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로마 국교로 정한 후에 그 자리에 교회를 세웠는데 개축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사진설명> 사도 바울 참수를 묘사한 조각화.
주후 313년, 기독교 박해가 끝난 후 로마 콘스탄틴 대제는 사도 바울 무덤 위에 바울교회를 세웠다. 현재 이곳은 1600년 전 규모 그대로다.
그곳에 가면 세계 복음화의 기수인 사도 바울의 위엄을 확인할 수 있다. 웅장하게 솟은 화강암 기둥 80개로 구성된 교회 내부의 힘찬 모습에서 사도 바울의 구령의 심정을 느낄 수 있다. 천장 벽화에는 신구약의 주요 내용이 담겨 있다. 반원형 돔의 모자이크화에는 성서를 들고 있는 예수님, 그 오른쪽에 베드로와 안드레, 왼쪽에 바울과 누가가 그려져 있다.
바울이 죽은 지 300년 후, 기독교는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바울 역시 세계 기독교의 위대한 사도가 되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1:20~21).
윤석전 목사: ‘바울교회’는 매우 웅장합니다.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홍순화 원장: 바울교회는 그곳 지명을 따라 ‘오스티엔세(Ostiense)교회’라고도 합니다. 고유 지명입니다. 고대 교회에 속하는 바울교회는 규모로 보면 유명한 베드로교회 다음으로 큽니다. 길이 120m, 넓이 60m, 높이 23m이고 그 안에 화강암 기둥이 80여 개나 늘어서 있을 정도로 웅장합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 규모보다 사도 바울의 무덤 위에 세워진 교회라는 점입니다. ‘바울무덤교회’라고 이해하면 더 좋을 듯합니다.
윤석전 목사: 사도 바울이 교회를 세운 적이 없는데도 로마에 바울 기념 교회가 많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김판임 교수: 이 교회들은 바울의 순교를 기념해서 세웠습니다. 바울이 기독교에 공헌한 점을 인정해 지은 것이지요. 바울이 복음 증거에 자신의 생애와 목숨까지 바친 사도라는 점을 기억할 때, 후세 기독교인을 위해 그를 기념하는 일은 매우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설명> 로마를 향한 사도 바울의 마지막 전도 여정.
윤석전 목사: 바울과 베드로가 같은 장소, 같은 시각에 순교했나요?
김판임 교수: 학자들은 바울과 베드로가 네로 황제 지배 당시에 순교했다고 추정합니다. 하지만 같은 장소, 같은 시각에 순교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네로의 기독교 박해 역사를 살펴보면, 주후 64년 로마에서 일어난 화재 사건과 관련이 깊습니다. 당시 네로는 자신의 궁 아우레아(Aurea)를 건축하고 있었습니다. 네로는 궁터를 확장하려는 야망으로, 가난한 시민들의 불탄 집터를 값싸게 매입했습니다. 그런 행동은 시민 사이에 네로 황제가 일부러 방화를 저질렀다는 의심을 샀고, 그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지방 사령관이 반란을 도모했습니다. 네로는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대책이 방화 책임을 기독교인에게 전가하는 것이었습니다. 네로 황제는 기독교인에게 방화 혐의를 씌워 박해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시민들의 광분을 샀고, 원로원에서 네로 황제를 폐위하고 사형하기로 결정합니다. 그 사실을 안 네로는 자살합니다. 네로가 극심하게 기독교인을 박해한 주후 64~68년 즈음에 바울과 베드로가 순교했는데, 각자 어느 때 죽었는지 자세히 전해지지는 않습니다.
윤석전 목사: 하나님께서 쓰신 사도 바울의 생애는 참으로 위대합니다. 바울의 삶을 평가해 주세요.
김판임 교수: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 오직 주님만을 위해서 살았다고 평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전 세계 곳곳을 누비며 예수 복음을 전했습니다. 왜 바울은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며 복음을 전했을까요? 사도 바울이 쓴 편지에 그 이유가 적혀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롬15:20).
한 명이라도 더 구원하고 싶은 인류에 대한 사랑이 바울을 움직이게 했고, 하나님께 받은 소명을 이루고자 하는 불타는 열정이 합쳐져 그로 하여금 항상 복음을 전하게 했습니다.
<사진설명> 사도 바울이 걷던 길.
윤석전 목사: 사도 바울이 전도 여행한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합니다.
홍순화 원장: 보통 바울이 회심한 때를 주후 33년, 순교한 때를 주후 67년으로 보면 주님을 위해 사역한 기간을 약 33년간으로 추정합니다. 1차에서 3차에 이르는 전도여행 기간은 12년 정도입니다. 그다음 주후 62년 석방돼 다시 복음을 전한 기간을 5년으로 생각한다면, 사도 바울은 17년간 전도하려고 직접 여행을 다닌 셈입니다. 바울이 전도여행한 거리는 약 2만km로, 험난한 대장정이었습니다.
윤석전 목사: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피 흘려 죽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위대한 뜻을 막을 수 없듯이, 바울 역시 생애 동안 예수 복음을 전하는 일을 아무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 목숨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선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딤후3:6~8). 그가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믿음을 지키고 의의 길을 끝없이 달려간 싸움의 승리 속에 하나님은 그에게 면류관을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의 최후는 하나님 나라에서 받을 면류관이요, 땅에서는 영혼을 향한 구령의 열정이었습니다. 바로 바울이 이렇게 복음 전파에 힘써 살아간 날들이 인류 역사 속에서 아름다운 구속의 역사로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전파되었습니까? 그는 비록 로마에서 참수당해 하늘나라에 갔지만 그가 전한 복음의 역사로 수많은 영혼이 구원받았습니다. 다음 호에는 바울이 떠나간 다음 어떤 흔적이 남아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계속>
<윤석전 목사 탐사기행 ‘성서의 땅을 가다’는 www.ybstv.com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483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