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와 함께하는 ‘성서의 땅을 가다’(41)] 땅속 깊은 곳에서 드린 예배 터, 카타콤

등록날짜 [ 2016-06-20 13:19:53 ]


<사진설명> 지하 공동묘지 카타콤.

윤석전 목사(연세중앙교회): 주님을 향한 사랑, 성도를 향한 구령의 열정은 사도 바울과 초대교회 사도들에게서 계속 이어져 지금도 수많은 믿음의 사람이 세계 곳곳에서 복음을 증거합니다. 이번 호에서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고통과 아픔을 느낄 수 있는 믿음의 장소, 카타콤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에게 붙잡혀 ‘아피아 가도(街道)’를 따라 로마로 압송됐다. 사도 바울이 포박되어 걸어갔던 아피아 가도에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지하 공동묘지인 카타콤(Catacomb)이 있다. 아피아 가도에만 카타콤이 60여 곳 있는데 그중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관리하는 ‘칼리스토 카타콤’이 가장 오래됐다. ‘십자가의 꽃’이라고 할 만큼 향기로운 초대교회 성도들의 믿음은 죽음마저 초월하는 신앙을 낳았고, 그 흔적은 수많은 순례자의 성지로 자리 잡았다.

칼리스토 카타콤은 길이 19km나 되는 로마 지하 묘지 중 최대 규모로 1~4세기 사이에 이곳에 묻힌 그리스도인이 50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지하 10~15m 깊이로 구멍을 뚫고 폭 1m 미만, 높이 2m 정도인 통랑을 종횡으로 뚫어 계단을 내서 여러 층으로 이어져 있다. 총 5층인 이곳에는 묻힌 사람들의 이름과 나이가 기록된 비문 조각(彫刻)이 삭막한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타원형으로 만든 벽감(壁龕)에는 유해가 담긴 석관이 있다. 석관은 연화나 대리석 판으로 덮은 다음 석회로 밀폐했다. 그 묘실에는 묘비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초기 기독교인은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믿음을 그림으로 남겨 놓았다. 또 조각된 벽화에 나이와 이름과 성구를 새겨 믿음의 의지를 표현해 놓았다. 땅속 깊이 묻혀 있는 죽음의 흔적들은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숭고한 정신을 선명히 드러내며 세월의 어둠을 밝혀 나간다.



윤석전 목사: 카타콤에 관해 자세하게 설명해 주세요.

홍순화 원장(한국성서지리원): 카타콤의 어원은 ‘카타쿰바스’로, ‘동굴의 옆’이라는 뜻입니다. 로마 지역 부근에 있는 동굴들은 화산 석회 지질이어서 비교적 파기 쉬웠고, 판 후에는 견고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로마인은 지하 동굴을 뚫어 가족 묘지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카타콤의 기원입니다.

윤석전 목사: 카타콤에는 석관이 많이 보이는데 당시 로마의 장례 풍습에서 연유한 것인가요?

홍순화 원장: 로마인은 대부분 죽은 사람을 화장(火葬)한 뒤 그 유골을 매장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무덤을 불길하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주로 도로 양쪽 옆에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심지어 황제가 죽으면 건물을 지어 장례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시내 중심가에는 절대 묘지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로마법 앞에는 누구나 평등하였기에 황제라고 해서 중심가에 자신의 묘를 세울 수는 없었습니다. 묘비에는 죽은 자가 평소 남기고 싶어 한 말들을 새겨 놓았는데 그 묘비명(墓碑銘)들이 참 재미있습니다. 지나가면서 묘비명을 읽어 보는 것도 성지순례의 또 다른 즐거움이 될 듯합니다.

윤석전 목사: 카타콤이 어떻게 형성됐는지 궁금합니다.

김판임 교수(이화여자대학교 신약학): 로마 최대 카타콤은 한 여인이 땅을 기부한 데서 시작했습니다. 로마 황제 티투스와 도미티아누스의 질녀였다고 전해지는 ‘도미틸라’는 당시 넓은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중 일부를 묘지로 기증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녀의 가족이 매장되었고, 이후 많은 기독교인이 묻혀서 카타콤이 되었습니다.

윤석전 목사: 그 당시 기독교인은 정말 카타콤에서 생활했나요?

김판임 교수: 카타콤 내부에는 그리스어, 라틴어로 쓰인 표식과 비명 그리고 성경 이야기를 담은 그림이 있어 당시 그들의 문화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카타콤이 박해 현장을 피한 기독교인들의 은신처로 사용되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실제로 기독교인이 카타콤에 모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들은 신앙의 선배가 순교한 후 카타콤에 묻히면 그곳에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카타콤에 모일 때는 간단히 예배를 드린 뒤 다 함께 식사하고 주의 만찬을 했습니다. 주의 만찬을 할 때 “주님의 피와 살을 기념한다”는 내용의 말을 하였는데 이를 잘못 들은 이교도들이 “기독교인이 죽은 자의 인육을 먹는다”고 오해하여 기독교인 박해를 정당화하기도 했습니다.

윤석전 목사: 카타콤은 기독교인이 살다가 죽어서 매장된 무덤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번에 카타콤에 관해 상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에서 카타콤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를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습니다.

홍순화 원장: 카타콤은 기독교인에게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줍니다. 첫째, 초대교회 선배들의 신앙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들은 지하에 예배당을 지어 놓고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카타콤은 로마가 멸망한 476년 이전 시대의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기독교 발생 후 476년 부근까지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 모습이 그 지하에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카타콤은 16세기 이후 발굴되었는데 5세기 당시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도 많습니다.

둘째, 그곳에는 문자나 십자가를 비롯해 그 당시 생활을 짐작케 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성화(聖畵)입니다. 가장 오래된 성화가 카타콤 안에 보관돼 있습니다. 갑바도기아 지역은 성화가 많기로 유명한데 그곳 성화는 7~10세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런데 카타콤에 있는 성화는 최소 4~5세기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카타콤은 기독교 역사에서 소중한 유물을 보존하고 있는 ‘지하 기독교 박물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진설명> 믿음을 지키다 목이 베인 세실리아 형상 무덤.


믿는 자들의 무덤이 더욱 늘어나 카타콤의 규모를 계속 넓혀 나갔다. 카타콤에서 성스러운 죽음과 마주친다. 믿음을 지키다 목이 베인 세실리아. 그녀를 형상화한 조각은 오른쪽 어깨를 땅에 댄 채 옆으로 쓰러져 있다. 목에는 도끼 자국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기독교 박해는 더욱 심해졌고 그리스도인들은 깊은 무덤을 찾아 예배 장소로 삼았다. 당시 사용했던 도구들이 순례자들의 발길을 붙든다. 사람들은 다양한 토기를 이용해서 떡을 떼고 포도주를 마시며 주의 만찬을 이행했으리라.

카타콤 내부로 계속 가다 보면 소형 가족묘가 나온다. 당시에는 유아 사망률이 높았다. 그 측은함을 위로하려 했을까. 한쪽 벽에는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또 어느 목관 안에는 미라가 들어 있다. 이 속엔 생명 바쳐 믿음을 지켰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몸부림이 담겨 있다. 그 힘의 근원은 예수에 대한 사랑이었다.


윤석전 목사: 당시 기독교인은 왜 핍박을 받았나요?

홍순화 원장: 당시에는 다신교적 종교관이 팽배해서 사람들은 여러 신을 섬겼습니다. 몸이 아프면 의료 신에게 가서 빌고, 풍작을 기원할 땐 농업 신에게 빌었습니다. 그들은 형상을 중요시하여 신상을 만들어 절하고 숭배했습니다. 기독교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유일신 하나님을 믿었기에 이들과 타협할 수 없었습니다. 핍박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세계 곳곳에서 기반을 잡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은 처음에는 가만히 듣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사도 바울이 유대교를 변질시킨다고 여겨 바울을 핍박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구원받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이 핍박을 받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14:22).


윤석전 목사: 터키에도 기독교인의 동굴 교회 ‘갑바도기아’와 지하 도시 ‘데린쿠유’가 있습니다. 그곳들과 로마 카타콤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홍순화 원장: ‘갑바도기아(Cappadocia)’는 터키 중부 지역 해발 900m 이상에 있습니다. 현재 세계적인 관광지로 당시에는 성화를 그리는 기독교인이 많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성화도 형상을 띠고 있어 우상이라고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유대인들의 핍박을 피해 갑바도기아로 갔습니다. 그곳의 흙은 부드러워 삽으로 팔 수 있었습니다. 신기하게도 파고 난 후에는 그 흙이 딱딱한 돌로 굳어져서 동굴을 만들기에 매우 적합했습니다. 그들은 사방으로 굴을 파서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그 후 핍박을 피해 마음껏 성화를 그렸습니다. 특히 괴레메 지역이 유명한데 그곳에는 교회가 1000개 정도 있습니다.

갑바도기아와 가까운 곳에 ‘데린쿠유(Derinkuyu)’가 있습니다. ‘깊은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지하 깊숙이 파인 곳이 있는데 우물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데린쿠유는 핍박을 피해 초기 기독교인들이 세운 지하 도시 동굴입니다. 갑바도기아는 교회가 산재해 있는 지역이었고, 데린쿠유는 실제 공동생활을 하던 지하 도시였습니다.


윤석전 목사: 초대 기독교인들이 죽음을 마다치 않고 그토록 고통스럽게 생활한 것은 하늘의 위대한 소망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그런 신앙 자세 속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무엇일까요?

김판임 교수: 사도 바울을 포함해 당시 1~3세기에 이르기까지 믿음을 지켜온 신앙 선배들을 보면, 그들은 그 어떤 것으로도 자신들의 신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로마 황제가 “나를 ‘주’라고 하면 너희를 살려 주겠다”고 회유했습니다. 또 “나만 믿으면 잘 먹고 잘살게 해 주겠다”는 유혹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모두 물리치고 “나의 주는 오직 예수”임을 지키며 곧은 신앙의 자세를 유지했습니다. 바울과 베드로와 수많은 기독교인이 박해 속에서 더욱 금과 은처럼 정제되고 단련되어 견고하게 빛나는 점을 배울 수 있습니다.

윤석전 목사: 그만큼 우리 신앙생활은 수많은 고통과 핍박과 죽음보다 큰 가치가 있기에 그들은 아낌없이 고통을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만큼 영생에 대한 소망이 크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피 흘려 죽으신 피의 공로 앞에 배신할 수 없었던 인격적인 인물들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초기 기독교인들은 쿰란의 에세네파(유대교의 한 지파)처럼 폐쇄적인 공동체 생활을 했나요?

김판임 교수: 쿰란 공동체와 기독교 공동체는 매우 유사한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종말이 올 것을 믿고 구성원끼리 공동식사를 하는 등 다른 그룹과 구별되었다는 의식을 행했습니다. 따라서 매우 폐쇄적인 공동체 생활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지역 내에서 그들이 모여 기도하고, 함께 식사하고, 예배를 드리며 구별된 생활을 한다 해도 외부와 접촉을 완전히 끊고 살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당시 쿰란 공동체도 구별 의식을 지니고 공동생활을 했지만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고, 물물 교환 같은 거래를 하려고 분명 다른 세계와 접촉했을 것입니다. 기독교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구별 의식을 지니며 살고 있지만 기독교 공동체 역시 교역하고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산 모습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윤석전 목사: 여러분은 어떤 고통과 어려움이 있습니까? 때로는 시험당해서 교회에 가기 싫고 예수 믿기 싫은 적이 있었습니까? 이는 모두 자기 자신이 영적으로 손해 받는 일입니다. 우리는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내 영혼을 사랑하고 이웃 영혼을 사랑하여 끝없는 전도자로서 이 민족사, 세계사 속에 열심히 복음을 증거하면서 신앙생활에 전념해 신앙의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계속>

<윤석전 목사 탐사기행 ‘성서의 땅을 가다’는 www.ybstv.com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484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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