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와 함께하는 ‘성서의 땅을 가다’(42)] 잔인한 순교 현장, 콜로세움

등록날짜 [ 2016-06-28 10:28:54 ]

윤석전 목사(연세중앙교회): 초기 기독교인은 예수를 ‘구세주’라고 고백한 믿음 때문에 무수히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십자가형, 화형(火刑) 또는 짐승들에게 처참히 찢겨 죽으면서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누구든지 그런 핍박을 당한다면 몹시 두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핍박에 담대하게 항거하다 끝내 순교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핍박당했던 현장, 콜로세움을 살펴보겠습니다.



<사진설명> 콜로세움 외형


아피아 가도(街道)를 따라 지하에 만들어진 기독교인들의 묘지 카타콤을 벗어나 로마 시로 들어가면, 그 한복판에 콜로세움이 있다. 콜로세움(Colosseum)은 당시 로마인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 건축물로서, 아치와 볼트(아치 구조를 여럿 조합해 만든 구조물)를 구사한 로마 건축 기술의 결정체다. 주후 80년, 네로 황제의 궁전 정원에 있던 인공호수를 메워 대형 원형 투기장 겸 극장으로 세운 것이다.

이곳에서 맹수들을 상대로 생사를 건 검투사의 싸움이 자주 행해졌다. 또 장내에 물을 채워 결투하는 모의해전(模擬海戰)도 열렸다. 이 피의 축제를 관람하려고 로마 시민 5만 5000여 명은 80개에 이르는 외벽의 아치형 입구로 몰려들었다.

로마 시민이 열광하는 동안, 그 객석 아래 지하감옥에는 피에 굶주린 맹수, 그리고 이들과 싸울 검투사와 사형수가 갇혀 있었다. 콜로세움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수많은 기독교인이 피를 흘리며 죽어 갔던 순교 현장이기도 했다.

 

윤석전 목사: 로마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콜로세움은 어떤 역사를 가졌는지 설명해 주세요.

홍순화 원장(한국성서지리원): 콜로세움은 로마 황제가 시민들에게 오락거리를 제공해 주려고 세웠습니다. 주후 72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기공했고, 80년에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가 완공했습니다. 주후 249년에는 로마 건국 1000주년을 기념해 검투사 1000명을 투입해 죽을 때까지 싸우게 하는 피의 축제를 벌이면서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중세 때는 이 오락 기능이 사라지고 채석장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콜로세움 건물이 무척 웅장해서 로마 시내에 건물을 지을 때 콜로세움의 돌을 가져다 썼습니다.

윤석전 목사: 콜로세움은 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하는데요, 어떤 구조로 지어졌습니까?

홍순화 원장: 콜로세움은 둘레 527m, 최대 지름 188m, 높이 48m인 4층 타원형 건물입니다. 지금은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습니다. 기둥은 1층 도리스 양식, 2층 이고니아 양식, 3층 고린도 양식으로 층마다 모양이 달랐습니다. 콜로세움에는 보통 4만 5000명 정도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입석 5000명을 포함해 5만 명 넘게 들어갈 수 있었고, 최대한 빽빽이 들어가면 7만 명까지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윤석전 목사: 검투사들의 경기는 어떠했습니까? 그 경기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요?

홍순화 원장: 당시 로마 황제들은 검투 경기를 대중에게 인기를 얻는 방법으로 활용했습니다. 대중의 환심을 사기 위해 무엇이라도 하는 정치가의 속성이 옛날에도 나타난 것입니다.

콜로세움이 세워지기 전부터 검투 경기를 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주전 264년부터 검투 경기를 열었는데 주후 404년까지 행해졌습니다. 4세기 이후에도 맹수와 싸우는 검투 경기가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러다가 6세기경에 사라졌습니다. 검투 경기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사람끼리 서로 죽이는 경기입니다. 매우 잔인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사람과 맹수가 패를 갈라 싸우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을 검투사로 징발해 검투 과정에서 죽게 했다고 합니다.

윤석전 목사: 기독교 박해 역사가 네로 황제 시절에만 국한되지는 않았을 터입니다. 로마의 기독교 박해 역사를 알려 주세요.

김판임 교수(이화여자대학교 신약학): 물론 그 이전에도 기독교인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도를 국가 권력이 박해한 것은 네로 황제가 처음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를 보면 ‘유대인들은 유대 동족에게 박해당하고 이방인은 이방인에게 고난당했다’는 표현이 있습니다(살전2:14).

기독교는 주후 313년 로마 국교로 공인되었는데 그때 잠깐 평화기를 맞이한 것을 제외하고 늘 박해를 받았습니다. 가장 심했던 때는 국교로 공인되기 수십 년 전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AD 284-305), 갈레리우스(305-311), 막시미누스(308-313) 이 세 황제가 아주 심하게 핍박했습니다. 그렇게 견딜 수 없는 시간을 거쳐 결국 기독교가 로마 국교로 공인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철학자이자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도 기독교 박해에 한몫했습니다.

윤석전 목사: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한 역사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의 믿음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다시 한 번 느낍니다. 그런데 왜 기독교인을 핍박하는 장소로 콜로세움을 선택했을까요?

김판임 교수: 콜로세움에서 기독교인들이 박해받은 이유는 첫째, 검투사로 징발됐던 기독교인 중에 노예 출신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이어서 받은 핍박도 있겠지만 노예라는 사회적 신분 탓에 당한 핍박도 있었습니다. 둘째, 기독교인의 처참한 죽음을 보여 주면서 국가 권력을 높이고 그 권력에 도전하려는 이들에게 위협을 주는 전시 효과로 사용했습니다.



<사진설명> 콜로세움 내부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거대함을 상징하듯 ‘거대하다’는 뜻의 ‘콜로세수’에서 유래된 콜로세움. 이곳에서 벌어진 피의 향연을 보며 로마 시민은 스트레스를 풀었고, 로마 시민으로서 권한을 확인했다. 이를 통해 로마 황제들은 자신의 권좌를 굳건히 지켰다.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이 이곳에서 순교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도미티아누스 황제(재위 AD 81-96) 때 기독교인 1만 2000명이 동시에 잔인하게 살육당했다고 전해진다. 기독교인들은 사자에게 뜯어 먹히거나 십자가에 못 박혀 밤에 어둠을 밝히는 재료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숭고한 영혼은 사자의 이빨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불의의 세력 앞에서도 믿음을 지켰다.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악의 폭력을 극복해 나간 것이다.

그 주검들은 대형 십자가를 세워 기념한다. 유적 곳곳에는 영원한 나라를 소유했던 이들의 자취가 살아 숨 쉬고 있다. 유대 땅 나사렛에서 시작된 복음의 씨는 세계 제국 로마의 황폐한 땅속에서 강인한 생명으로 피어올랐다. 그들의 거룩한 정신은 죽음의 세계와 생명의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가 되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 자신의 몸을 속죄 제물로 바쳐 인류를 구원했다. 바울은 그 십자가의 길을 2만km의 전도 여행을 통해 삶 속에서 이어 갔다. 그것은 죽음을 이기는 로마 그리스도인의 순교 역사 속에서 열매를 맺었다.

 

윤석전 목사: 로마가 기독교인을 잔인하게 핍박했던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입니까?

김판임 교수: 기독교인을 박해할 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보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박해하려고 여러 이유를 들어 무고한 자에게 죄를 덮어씌운 결과였다고 생각합니다.

윤석전 목사: 그들의 박해 방법은 사람으로서는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잔인했습니다. 어느 정도였고 왜 그런 방법을 선택했을까요?

김판임 교수: 당시 기독교인들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참혹한 죽음을 겪었습니다. 인간이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최고 권력을 거머쥐었을 때, 그 잔혹성은 거침없이 드러납니다. 기독교 박해 때 로마 황제에게서 그런 잔인성이 여실히 나타났습니다.

윤석전 목사: 믿음의 선배들이 그런 모진 핍박을 견디면서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 줬기에 오늘날 전 세계에 기독교인이 늘어났고, 우리도 믿음 안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 앞에 송구스럽지만, 과연 후배들에게 어떤 믿음을 전해 줘야 할지 다시 한 번 사명감에 불타오르기도 합니다. 콜로세움에서 벌어진 기독교인 살해 방법이 로마에서만 행해진 건가요?

홍순화 원장: 콜로세움은 로마 시에 세운 오락 경기장입니다. 기록을 보면 당시 로마 제국 안에 세운 원형 경기장은 모두 170개 정도였으니 전국에 골고루 있었던 셈입니다. 따라서 검투사 경기로 기독교인을 살해한 일이 전국적으로 행해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윤석전 목사: 로마 제국의 심한 박해 속에서 믿음을 지키고 살아남은 기독교인이 복음을 계속 전했기에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독교가 왕성하게 된 배경에 바울은 어떤 영향을 끼쳤나요?

김판임 교수: 박해가 심했을 때, 기독교인에게 견딜 힘을 공급한 이는 사도 바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바울은 순교해 세상에 없었지만, 그가 남긴 편지를 성도들이 읽고 들으면서 박해를 이길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남긴 편지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관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또 ‘고난받는 중에도 너희가 믿음을 잘 지켰다’고 칭찬해 힘을 제공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활동하던 당시 문화를 크게 둘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유대 문화와 그리스 문화입니다. 유대인의 최고 가치는 ‘이적’이었고 그리스인의 최고 가치는 ‘지혜’였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고전1:22~23).
바울의 최고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예수의 십자가를 제시했습니다. 그러자 많은 이가 우리를 위해 흘린 그 피를 생각하며 순교할 믿음을 얻었습니다.

윤석전 목사: 그렇게 순교하면서 믿음을 지킨 신앙 선배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김판임 교수: 목숨은 하나밖에 없는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목숨을 내어 주면서까지 신앙을 지켰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지요. 도대체 신앙이 무엇이기에, 예수님이 누구시기에 ‘나는 죽어도 좋다’는 모습을 보여 주었는지 감격스럽습니다. 그들에게 배울 점이 여러 가지 있겠지만 한 가지를 꼽자면 바로 ‘용기’입니다. 당시 로마 황제는 “너희들이 나를 주라고 시인하면 살려 주겠다. 나를 신처럼 섬겨라”고 제안했지만 그들은 용기를 내어 ‘오직 예수’로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지금 현시대에도 문화 속 온갖 것이 우리를 종살이하게 하려고 다가오고 있습니다. ‘내가 최고다. 나만 섬기면 다 해 줄게.’ 이것을 과감하게 물리치고 최고 가치인 예수님께로 향할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친 신앙 선배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런 용기를 배울 수 있습니다.

윤석전 목사: 겉으로 보기에는 핍박한 황제들이 승리한 것 같지만 순교의 피를 흘린 그들이 진정한 승리자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설명을 들으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이 콜로세움을 세워 사람을 죽이는 잔인한 오락을 즐겼던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김판임 교수: 콜로세움에서 검투사로 칼을 휘두르거나 사자 밥이 되었던 사람들은 주로 노예였습니다. 노예들은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없는 ‘물건’ 같은 존재였습니다. 로마 시민이 그런 잔인한 오락을 즐겼던 이유는 참혹한 광경을 보면서 ‘나는 저들과 다르다, 더 나은 존재다’라는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힘 있는 자들로서 구별의식을 가진 것입니다.

윤석전 목사: 사도 베드로가 콜로세움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사실인가요?

홍순화 원장: 베드로 자신이 거꾸로 매달려 죽기를 요청했는데 로마 사람들이 그것을 들어주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콜로세움에서 일어난 일은 아닙니다. 베드로의 순교 시기는 주후 67년경인데 콜로세움은 주후 72년에 기공해 80년에 완공됐습니다. 베드로의 순교 장소는 콜로세움이 아니라 네로 황제(재위 AD 54-68)의 경기장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윤석전 목사: 초기 기독교인들은 때로 맞아 죽거나 맹수에게 찢겨 그들의 먹이가 되기도 했습니다. 또 도끼로 찍히거나 창에 찔려 죽었습니다. 그들은 구경거리였고 비참한 최후를 맞았지만, 박해를 이긴 위대한 죽음으로 하나님 앞에 영광스러운 영혼의 때를 맞이했습니다. 그들의 피와 죽음은 오늘날 우리 기독교를 세계에서 가장 큰 신앙으로 자리 잡게 한 밑거름입니다.

당신에게는 어떠한 핍박과 고통이 있습니까?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내 영혼을 사랑하고 이웃의 영혼을 사랑하여 이 모든 핍박을 이기고, 승리의 그 날까지 아름다운 신앙 작품을 내기를 바랍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485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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