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와 함께하는 ‘성서의 땅을 가다’(43)] 열두 제자를 선택한 땅 갈릴리

등록날짜 [ 2016-07-04 11:44:11 ]


<사진설명> 갈릴리 마을.

윤석전 목사(연세중앙교회): 이번 호부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공생애를 사시면서 복음을 증거하게 하려고 택하신 열두 제자의 발자취를 하나하나 찾아보려고 합니다. 먼저 성경 안에서, 그다음으로 시대적 배경에서, 더 나아가 전승(傳承)과 연결해서 열두 제자의 흔적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가장 먼저 부르신 곳이자 제자들의 고향인 갈릴리를 살펴봅시다.


이스라엘 북부 갈릴리 지역은 예수께서 공생애 대부분을 보내신 곳이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사역한 지역이기에 밟는 곳마다 예수와 열두 제자의 자취가 스며 있다. 이곳에는 지붕에 십자가를 열두 개나 세워 놓은 교회가 있어 순례객의 눈길을 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고 갈릴리에서 사역한 것을 기념하는 곳이다.

이처럼 갈릴리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수많은 이적을 본, 권능의 체험 장소였다. 또 제자들은 이곳에서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며 기도의 바른 자세를 익혔다. 예수께서 제자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말씀하셨다.

“너는 기도할 때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마6:6).

그 기도의 현장으로 순례자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이처럼 갈릴리는 예수께서 메시아인 것과 그의 힘이 기도에서 나온다는 점을 배울 수 있는 생생한 체험의 현장이었다.



윤석전 목사: 갈릴리는 열두 제자가 사역을 시작한 곳입니다. 갈릴리에 대해 자세히 소개해 주세요.

홍순화 원장(한국성서지리원): 갈릴리는 예루살렘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지형적으로도 갈릴리는 해안 지역이어서 산악지대인 예루살렘에 오가기가 어려웠습니다. 사실 그 점이 하나님의 큰 은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갈릴리는 예루살렘과 차단된 지역이어서 예수께서 천국 복음을 전하기가 수월했습니다. 한편 갈릴리는 예루살렘을 제외한 다른 지역과는 연결이 잘되는 교통 요지였습니다. 당시에는 해안도로가 최고로 좋고 빨랐습니다. 이집트에서 다메섹을 비롯한 중동 지역을 연결하는 최고의 해안도로 ‘비아 마리스(Via Maris)’가 갈릴리 지역, 특히 가버나움을 지나갔습니다. 한마디로 갈릴리는 당시 외부 문물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앗수르 제국이 BC 722년경 이스라엘을 침략해 갈릴리인을 포로로 잡아가고 이방인을 이 지역에 이주시켰습니다. 그런 이유로 갈릴리에는 종교가 혼합되어 있었습니다. 이처럼 유대교가 희석된 곳이어서 복음을 전하는 데는 매우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윤석전 목사: 그 당시 갈릴리는 정치적으로 어떤 시기였나요?

박성민 목사(한국대학생선교회 CCC대표):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167년 전, 유대인은 자기들의 왕국을 세웁니다. 그러다가 주전 1세기 중반에 로마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 있는 헤롯 대왕이 등장합니다. 헤롯 대왕은 이두매(에돔 지역) 출신 이방인입니다. 유대인의 피를 받은 반쪽 혈통을 지닌 사람으로서 묘략, 재치, 정치적 수완이 뛰어났고, 부인 10명을 거느리며 수많은 자녀를 두었습니다. 헤롯 대왕이 서거한 후 다스리던 지역을 셋으로 나눠 세 아들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예루살렘 지역은 헤롯 아켈라오, 가버나움 북동쪽 지역은 헤롯 빌립, 갈릴리 지역은 헤롯 안디바가 이어받았습니다. 그 세 지역의 역사를 살펴보면, 예루살렘 지역을 다스리던 헤롯 아켈라오는 몹시 잔인해서 주후 6년에 쫓겨나고 예루살렘은 로마 황제령으로 들어갑니다. 또 헤롯 빌립이 다스린 가버나움 북동쪽은 시리아, 헬라인이 많은 곳이어서 통치하기에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헤롯 안디바가 다스린 갈릴리 지역은 그중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돼 있어서 상대적으로 살기 좋았습니다. 헤롯 대왕의 추적을 피해 애굽으로 도망갔던 요셉과 마리아가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올 때, 갈릴리로 왔습니다. 요셉은 포악한 헤롯 아켈라오가 예루살렘 통치를 맡았다는 소식을 듣고 불안해했습니다. 그때 천사가 현몽해서 ‘갈릴리로 가라’고 말해 나사렛으로 갔다고 마태복음에 기록돼 있습니다(마2:21~23). 그것을 보면 갈릴리는 예수께서 사역하기에 정치적으로 안정돼 있었습니다.

윤석전 목사: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부르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홍순화 원장: 갈릴리인들은 지형적 특성상 개방적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전한 천국 복음을 쉽게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받아들일 자세를 갖춘 개방적인 갈릴리 지역에서 제자들을 택하신 것입니다. 갈릴리에는 당시 지도자 계층인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이 없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갈릴리에는 권력층, 즉 상류층이 없었던 셈입니다. 그래서 갈릴리인들은 아주 겸손했습니다. 또 한 가지, 예수님은 할 일 없이 노는 자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열심히 일하던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어부, 세리, 석수쟁이인 그들의 삶을 보면서 하나님의 일에도 열심을 낼 만한 사람을 택하신 것입니다.

윤석전 목사: 당시에 로마인이나 유대인은 갈릴리인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궁금합니다.

박성민 목사: 유대인 출신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글을 보면, 갈릴리 사람을 본 느낌과 그들의 성향과 정서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갈릴리인은 개방적인 특성 때문에 혁신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충동적이고 성급해서 지도자를 좇아 반란을 자주 일으켰습니다. 성경에도 그 증거가 나옵니다.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눅13:1).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행5:37). 이런 구절들을 봤을 때 갈릴리인이 개방적인 특성과 관련해 문제를 많이 일으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탈무드’에는 갈릴리인이 이익을 추구하기보다는 명예를 상당히 존중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나옵니다. 우리나라 사람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윤석전 목사: 예수님께서 왜 제자를 열둘만 택하셨을까요?

박성민 목사: 열두 제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서 비롯했는데 그 숫자에 상징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열두 명은 훈련하기에도 적합하다는 점도 들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죽고 난 후, 실질적으로 제자는 열한 명 남았습니다. 열둘을 채우려고 맛디아를 제자로 뽑았고(행1:25~26), 온전히 열둘을 채운 후에는 다른 사도가 죽더라도 대체하지 않았습니다. 또 성경 전체에 ‘열둘’이라는 수에 관한 상징성이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새 예루살렘에 관해 말할 때도 “열두 기초석 위에 열두 사도의 이름이 쓰여 있고, 또 열두 문 위에는 열두 지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계21:12~13). 또 요한계시록 7장에는 ‘14만 4000’이라는 숫자가 나오는데 이것은 12×12×10³입니다. 이처럼 성경에서는 ‘열둘’이 매우 상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진설명> 갈릴리 호수.


갈릴리 호수는 예수님의 수많은 이적이 담긴, 인류 역사상 가장 소중한 지역 가운데 하나다. 예루살렘 북쪽 150km 지점에 있는 갈릴리 호수는 이스라엘 전역에 물을 공급한다. 또 민물고기 40여 종이 살고, 연간 어획량은 5000톤가량이다. 보통 땐 물결이 잔잔하지만 밤에는 거센 풍랑이 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제자들도 어느 날 밤 그 풍랑에 휘말렸다. 산에서 불어온 돌풍은 파도를 일으켰고 배에 탄 제자들은 곧 뒤집힐 것 같은 배 안에서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때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셨는데 제자들은 유령인 줄 알고 두려워했다. 하지만 예수께선 “두려워 말라” 하셨고 이내 풍랑을 잔잔케 하셨다. 이 호수에서 제자들은 자연마저 순종케 하고, 세상 권세에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시는 메시아의 권능을 직접 체험했다.


윤석전 목사: 갈릴리 호수는 그곳 사람들이 생계를 유지한 삶의 터전이라고 합니다.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홍순화 원장: ‘갈릴리’ 하면 보통 호수만 떠올립니다. 하지만 더 광범위하게 봐야 합니다. 서쪽 나사렛과 가나, 북쪽 하솔과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까지 갈릴리라는 범주에 넣어야 합니다. 갈릴리 호수가 그곳들의 중심지였습니다. 기록을 살펴보면, 갈릴리 호수 주위에는 어촌 14곳이 있었는데 이곳들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고 합니다. 중동 사막 지방에서 갈릴리는 꿈의 장소였습니다. 물이 풍부해 농경지가 많았고, 어업의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갈릴리는 그야말로 생활 터전으로 삼기에 환상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윤석전 목사: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셀롯당원(Zealots, 열심당)이 있었다고 합니다. 셀롯당에 관해 설명해 주세요.

박성민 목사: 누가복음(6:15)과 사도행전(1:13)에 ‘셀롯당’이 나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베드로를 가리켜 ‘가나안인 시몬’이라고 말하는데 누가의 글에서는 ‘셀롯당 시몬’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제자 중 실제 셀롯당원이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역사학자 요세푸스가 쓴 글을 보면, ‘셀롯당’은 주후 67년에 구성됐다고 합니다. 그 전까지는 혁명당인 열심당이 있었는데, 아마 시몬 베드로가 그 당에 속했다고 추정합니다. 다른 의견은, 베드로가 열심을 낸 모습을 보고 ‘셀롯당 시몬’, 즉 ‘열심히 섬기는 시몬 베드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참고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윤석전 목사: 열두 제자의 사생활은 어떠했는지 궁금합니다.

박성민 목사: 제자들은 주로 노동 계층에 속해 노동으로 임금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반면 야고보와 요한처럼 상대적으로 부유한 제자도 있었습니다. 이 둘은 배와 종을 소유했고, 대제사장과 아는 사이였습니다(요18:15). 제자들의 연령대를 보자면, 대부분 20대로 추측합니다. 그중 요한이 가장 어렸습니다. ‘주의 만찬’과 같은 그림을 보면 요한은 항상 미소년으로 표현돼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요한을 10대 후반, 베드로를 30대 초반으로 추정합니다. 또 제자 상당수가 결혼한 것 같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은 게바라는 베드로를 포함해 제자들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고전9:5). 이 점을 봤을 때 제자들이 결혼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윤석전 목사: 열두 제자들의 경제력과 학문.지식은 어느 정도였는지 궁금합니다.

박성민 목사: 대부분 평범한 사람이지만 그중 조금 잘 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마태는 직업이 세리였기에 경제적으로 상당히 여유로웠으리라고 봅니다.

제자들의 학식과 관련해서는 많은 사람이 의문을 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학식이 없다’고 한 표현이 나옵니다. ‘제자들이 학식이 없다’는 것은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른다’는 정도로 무식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회당에서 기초적인 훈련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토라’(율법)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었기에 그런 말이 나왔다고 추측합니다. 마태만 봐도 학식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체제를 생각해보면, 세리인 마태는 여러 언어를 구사했을 것입니다.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우 부유한 가정 출신이니까요. 베드로는 신학 교육을 받지 않았을 뿐 훌륭한 지도자감이었습니다.


윤석전 목사: 열두 제자는 대부분 갈릴리 출신입니다. 가룟 유다는 어디 출신인가요?

홍순화 원장: ‘가룟’이라는 말은 ‘그리옷 사람’이라는 뜻으로 모압 지역, 지금의 요르단을 가리킵니다. 어떤 학자들은 ‘그리옷’을 헤브론 남쪽 지역으로 보기도 합니다. 또 다른 학자들은 ‘가룟’이 아랍어로 ‘암살자’라는 뜻과 비슷한 점을 들어 지역명이 아니라고 해석합니다.

윤석전 목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고자 초대 제자들과 초대 성도들을 택하시고, 그 외 수많은 사람을 택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초대 제자들과 같은 사람이 어디에 있을지 찾고 계십니다. 그가 ‘당신’이기를 소망합니다. 당신이 발견되어, 복음을 알지 못해서 멸망하는 수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 값지게 쓰임받는, 예수의 큰 제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계속>

<윤석전 목사 탐사기행 ‘성서의 땅을 가다’는 www.ybstv.com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486호> 기사입니다.

    아이디 로그인

    아이디 회원가입을 하시겠습니까?
    회원가입 바로가기

    아이디/비번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