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6-07-18 13:15:09 ]
<사진설명> 벳새다 지역.
윤석전 목사(연세중앙교회):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이적을 많이 나타내셨습니다. 이번에는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신, 오병이어 이적을 일으키신 벳새다 지역을 살펴보겠습니다.
갈릴리 호수 서쪽에 있는 마을 벳새다(Bethsaida). 예수의 열두 제자 중 베드로와 빌립과 안드레의 고향이다. 당시 큰 어시장이 형성돼 활발히 상거래를 하는 동네였다. 또 이곳은 갈릴리 호수 주변 도시와 연결되는 길목인데, 지금도 여러 도시의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석들이 남아 있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먹이신 오병이어(五餠二魚) 이적을 보이셨다. 예수님은 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하늘을 향해 기도하셨다. 그러자 그것들은 수많은 무리가 배불리 먹고 남을 떡과 물고기로 변했다. 무리가 만족스럽게 먹고 남은 음식만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 제자들은 그 이적을 보며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티베리아 방향으로 가다 보면 이스라엘 골짜기에 해발 588m인 다볼 산(Mount Tabor, 변화산)을 만난다. 예수님은 가장 사랑하신 제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이 산에 오르셨다. 그들과 대화하던 중에 예수님이 갑자기 변하셨다. 얼굴은 해같이 빛나고 옷은 빛같이 희어졌다.
산 정상에 올라 ‘변화산 기념 교회’를 보면, 이곳이 예수님의 변모(變貌) 이적을 담은 주요 성지임을 알 수 있다. 그 교회는 6세기에 건축됐지만, 1113년에 모슬렘 살라딘이 폐허로 만들었다. 당시 수많은 기독교인이 이곳에서 순교했다. 현재는 프란체스카 교회가 상주하고 있다.
예수께서 영광스러운 빛에 둘러싸인 것을 본 제자들은 두려워 떨었다. 그때 제자들은 하늘에서 울리는 음성을 들었다.
“이는 사랑하는 내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마17:5).
이는 예수께서 고난받아야 할 하나님의 종이시고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제자들에게 분명히 인식케 한 이적이었다. 그 사건 후 예수께서 본격적으로 제자들을 훈련하셨다.
윤석전 목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일반 백성의 생활 수준은 어떠했나요?
홍순화 원장(한국성서지리원): 당시 이스라엘 일반 백성은 소박한 것처럼 보여도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요즘보다 훨씬 더 가난했을 터입니다. 그들이 가난한 데는 지리적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농사짓기에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물론 사막보다 나았지만, 물이나 풀이 부족했고, 토양도 거칠었습니다. 또 당시 사회 구조상 빈부 차이가 심했습니다. 일반 백성은 로마 정권에 속주세 10%를 내야 했고 그 지역을 다스리는 지배 정권에도 여러 가지 세금을 바쳐야 했습니다. 반면, 로마 시민은 특혜를 많이 누렸습니다. 속주세를 면제받고, 매달 밀 30kg을 받았습니다. 또 콜로세움 같은 경기장에 무료로 입장했습니다. 이런 특수한 신분을 제외한 일반인들은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윤석전 목사: 공관복음서를 보면, 해 저물 무렵 벳새다 광야에 모인 수많은 사람이 배고파하자 예수께서 제자에게 “저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먹을 것이 없는 줄 뻔히 아시면서 제자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뜻은 무엇일까요?
홍순화 원장: 예수께서 제자들의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 시험하신 듯합니다. 제 나름대로 한번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때 제자 중 한 명이라도 이렇게 대답했다면 어떠했을까요. “주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을까요?” 실제 제자들은 예수님의 물음에 늘 인간적인 생각에 머무르는 대답만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제자들의 믿음 수준을 보신 후,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는 장소에서 ‘너희들이 어떻게 하는지 보자’ 하시며 문제 해결 능력을 살피신 것 같습니다.
윤석전 목사: 오병이어 이적을 일으키실 당시 수많은 무리를 50명씩 앉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홍순화 원장: 어떤 이는 ‘군대 같은 조직’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말합니다. 마가복음 6장에도 “떼로 혹 백씩, 혹 오십씩 앉은지라”(40절)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하지만 군대처럼 모인 조직은 아니라고 봅니다. 예수님을 좇아온 수많은 무리가 임시로 모인 상태이기에 50명씩, 100명씩 앉힌 데는 ‘질서’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사람에게 음식을 나눠 주기 쉽게 질서정연하도록 50명씩, 100명씩 앉으라고 하신 것 같습니다.
윤석전 목사: 요한복음 6장을 보면 예수께서 오병이어 이적을 보이신 후, 자신이 하나님께로 온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무리는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하면서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라는 인간적인 판단을 하면서 의심에 빠져 들었습니다(요6:42). 그 후, 예수를 따르던 무리 중 많은 이가 갑자기 우르르 떠났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내가 뉘게로 가오리까”라고 대답하고 주님을 좇았습니다(요6:67~68). 그때 진정한 ‘제자’들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열두 사도와 다른 제자들을 어떻게 구분하는지 설명해 주십시오.
박성민 목사(한국대학생선교회 CCC대표): 누가복음에 “이후에 주께서 달리 칠십인을 세우사…”라는 구절이 나옵니다(눅10:1). ‘제자’라는 단어는 ‘좇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좇던 자들을 향해서 “…너는 나를 좇으라”라고 표현하셨습니다(마8:22).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을 물리적으로 좇던 무리도 ‘제자’라고 불렀습니다.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6:66).
상당히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좇았는데 그 중 선별해 제자들을 뽑으셨던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성경에 나오는 ‘제자’ 중에는 예수님이 보이신 이적만 보고 물리적으로 좇은 ‘제자’와 진정한 믿음을 갖고 가르침을 배우고자 좇은 ‘제자’가 있었습니다.
윤석전 목사: 제자들은 변화 산상의 사건을 경험하면서 상당히 많은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때 제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나요?
박성민 목사: 제자들은 변화산에서 일어난 사건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마태.마가.누가복음에 나타난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예수님은 자기 죽음과 부활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지만, 제자들은 졸거나 두려워하여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변화산에서는 변모한 예수님 곁에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 중에 나타나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당시 유대인에게 거의 ‘하나님 다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지극히 높임을 받는 자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앞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지만, 그런데도 예수님의 위치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에 “여기에 초막 셋을 지어서 살게 하겠다”며 예수님과 두 선지자를 동일시하며 비교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제자들은 당시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후 마태복음에 “엘리야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고 하는 말이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를 훨씬 뛰어넘는다는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윤석전 목사: 예수께서 생애를 마치기 직전, 마가다락방에서 마지막 만찬을 행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인류의 영원한 양식과 생명인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실 것을 예언하면서 주의 만찬을 나누던 현장, 마가 다락방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사진설명> 마가 다락방 입구.
예루살렘 시온 문에서 100m쯤 걸어가다 보면 석조 건물이 한 채 보인다. 이 건물 2층에는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신 마가의 다락방이 있다. 2층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의 낡은 모습에서 얼마나 많은 순례객이 이 계단을 밟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 방 안에서 제자들은 상반된 두 가지 대역사를 경험한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 예수께서는 이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만찬을 나누시면서 자신의 십자가 고난을 가르치셨다. 또 제자들은 이곳에서 거듭나는 성령 강림을 경험한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급하고 강한 바람소리와 함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이 방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머물렀다.
성령받은 제자 중 베드로는, 오순절을 맞아 세계 각국에서 방문한 유대인 순례자에게 예수를 증언하고 삼천 명을 회개케 했다. 이처럼 마가다락방은 제자들을 복음의 통로로 거듭나게 한 장소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176년 이후 이곳은 이슬람교 사원으로 변형됐다. 곳곳마다 이슬람교 상징이 기독교 문양을 밀어냈다. 하지만 이곳은 여전히 열두 사도의 순교적 삶의 교두보가 된 영원한 성지다.
윤석전 목사: 주의 만찬 석상에서 예수님이 떡과 포도주를 나누며 “내 살을 받아먹어라, 내 피를 받아 마셔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왜 자기 살과 피를 떡과 포도주에 비유했는지 궁금합니다.
홍순화 원장: 떡(빵)과 포도주는 당시 사람들의 주식(主食)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점에 의미를 부여하셨습니다. 사람은 떡을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즉 먹어야 삽니다. 포도주는 가나 혼인 잔치 이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음료인데요, 이렇게 예수님은 늘 먹는 음식과 음료를 들어 우리의 영혼도 영적 주식인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산다는 의미를 아주 적절하게 비유하셨습니다.
윤석전 목사: 최후의 만찬은 어떻게 진행되었나요? 또 그 만찬에는 어떤 의미가 담겼나요?
박성민 목사: 유대인이 유월절 만찬을 어떻게 나누었는지 살펴보면, 예수님이 만찬 때 언제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유월절 만찬 때는 포도주를 모두 네 잔 마십니다. 예수님께서 첫 잔을 마시고, 둘째 잔 이후 무교병 떡을 떼시면서 당신의 몸과 연결하셨습니다. 이어 셋째 잔을 마셨습니다. 탈무드를 보면 이 셋째 잔은 ‘구속의 잔’을 뜻합니다. 그다음 넷째 잔은 ‘완성의 잔’인데, 예수님께서는 주의 만찬에서 넷째 잔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아직 하늘나라가 완성되지 않았기에, 그때 가서 마지막 잔을 마시겠다고 한 것인데요, 사람들은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서 그 마지막 잔을 마시려 연기해 놓으셨다’고 의미를 부여합니다.
<사진설명> 마가 다락방 내부.
윤석전 목사: 누가복음 22장을 보면, 만찬 후 제자들 사이에서 우리 중 “누가 더 큰 자냐” 하는 변론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만찬을 하면서 자기 죽음을 예견하셨는데 철딱서니 없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바로 그 모습이 우리 모습이 아닌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당시 제자들의 믿음 상태를 진단해 본다면 어떤 평을 내릴 수 있을까요?
박성민 목사: 당시 제자들의 믿음 수준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기에 예수께서 이루시는 나라에서 자신들이 높은 위치에 오를 줄로 기대했습니다. 그때까지 제자들은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영광이 온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그런 행동을 보였을 것입니다.
윤석전 목사: 제자들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목적을 잘못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이적을 일으킨 그 능력으로 로마 정부를 전복하고 이스라엘 국권을 회복한 후 장차 전 세계를 지배하는 왕이 되시면, 자기들은 그 좌우편에 앉는 ‘큰 자’가 될 줄로 정치적 상황을 오해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 것은 이 땅에서 잘살고 잘 먹고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목적이 아닙니다. 만세 전부터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 영혼을 구원하는 십자가 피의 공로 앞에 감사하고, 내 영혼이 살고자 하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서 죽어 가는 영혼을 살리고자 하는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 영적인 믿음입니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께서 범사가 잘 되는 복도 허락하십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아는 믿음의 본분을 바로 갖고 영적인 축복 속에 하나님께 사랑받기를 소망합니다. <계속>
<윤석전 목사 탐사기행 ‘성서의 땅을 가다’는 www.ybstv.com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488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