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와 함께하는 ‘성서의 땅을 가다’(46)] 제자들의 부끄러운 장소 겟세마네

등록날짜 [ 2016-07-25 12:01:42 ]


<사진설명> 겟세마네 동산.

윤석전 목사(연세중앙교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며 죽게 되었으니 기도해 달라.”

하지만 제자들은 내일 십자가를 져야 하는 예수님의 절박한 사정을 몰랐고, 결국 피곤을 이기지 못해 졸았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할 때 하나님의 뜻을 좇는 일에 피곤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절박한 심정을 알고 믿음 안에서 주님의 뒤를 좇아야 합니다. 이번 호에서는 주님께서 생애 최후의 순간을 앞두고 간절히 기도하신 장소 겟세마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기드론 골짜기를 지나 감람산 서쪽으로 가면 작은 동산 ‘겟세마네’가 나온다. 히브리어로 ‘올리브 숲’이라는 뜻인데 이곳에 올리브 나무가 풍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곳에는 여전히 감람나무 숲이 우거져 있다.

예수께서 유대인에게 잡히시기 전에 고뇌와 기도의 밤을 보내신 곳이라고 알려진 이 장소에 기념 교회를 세웠다. 세계 열두 나라에서 모금해 건립했다고 해서 ‘만국교회’라고 부른다. 이곳에는 예수님의 고독한 밤을 상징하듯, 어두운 분위기를 조성해 놓았다.

죗값으로 지옥 갈 인류를 구원할 희생 제물로서 사명을 완수하시고자 예수께서 피땀 흘려 기도하신 곳으로 추정되는 바위에는 순례자들의 감사 입맞춤이 이어진다. 제자들은 몰랐다. 이 바위 위에서 예수님이 쏟아낸 절규의 의미를. 너무도 거룩한 사명이었기에 제자들의 작은 마음에는 담을 수 없었다. 하늘과 땅처럼 잴 수 없는 거리.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과 제자들은 서로 고독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제자들은 무지 때문에….

교회 밖에는 당시 예수님의 고통을 상징하는 부조가 있다.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모습을 조각해놓았는데 이를 둘러싼 테두리는 마치 사람의 입 모양 같다. 생명의 떡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상징한다.

내일 치러야 하는 십자가 형벌의 중대사를 앞둔 예수! 그는 근본 하나님이시나 인간의 육체를 입으셨기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셨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그리고 아버지의 찢어지는 아픔을 대변하는, 아들의 땀이 핏방울이 될 때까지 부르짖는 고통의 절규가 이어졌다.



윤석전 목사: 예수께서 기도하신 장소를 겟세마네라고 믿는 데는 어떤 근거가 있나요?

홍순화 원장(한국성서지리원): 당시 예루살렘 성 밖 공동묘지가 바로 겟네마네 지역입니다. 비록 외진 지역이었지만 예루살렘 성에서 가까워서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순간을 앞두고 간절히 기도할 장소로 택하셨습니다. 초대 교인들은 예수님께서 어디서 기도하셨는지 기억하고 있었기에 그곳을 자주 찾았고, 지금까지도 ‘겟세마네 동산’이라고 부르며 기념하고 있습니다.

윤석전 목사: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가실 때, 왜 열두 제자 중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만 데리고 갔나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박성민 목사(한국대학생선교회 CCC대표):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에서 특별한 모형을 제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 이 세 제자는 초대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야고보는 첫 순교자가 되었고, 베드로와 요한은 기독교에서 비교할 자가 없을 정도로 큰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께 쓰임받아 이런 큰일을 해낼 줄 아셨기에 예수님께서 미리 이들을 택하셨다고 봅니다.

윤석전 목사: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묘사하면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라고 표현했습니다(눅22:44). 그 말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홍순화 원장: 피땀을 흘리실 만큼 예수님께 깊은 고뇌와 아픔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자신을 위한 고통이었다면 피땀 흘릴 정도로 기도하지 않으셨을 수 있습니다. ‘피땀’에는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세상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음을 택하신 예수님의 강렬한 고통이 담겨 있습니다.

윤석전 목사: 인간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절절히 드러나는 현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일반적인 사제지간과 ‘예수님과 열두 제자’의 관계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박성민 목사: 마가복음 3장 13절에서 15절까지 그 내용을 잘 살펴보면, 세 가지 다른 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고, 택하시고, 세우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막3:13). 그 당시에는 제자들이 사사할 스승을 찾았는 데 반해, 예수께서는 스승이 제자를 택했습니다.

둘째, 제자들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주의 사역에 동참하게 했습니다. 마가복음 3장 14절에는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라고 쓰여 있습니다. ‘전도’라는 단어는 단순히 복음을 전할 때뿐 아니라 예수님 사역 전체를 묘사할 때 사용합니다. 즉,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르칠 뿐 아니라 자신의 사역을 전적으로 맡기려고 훈련했다는 점에서 다른 사제지간과 차이가 있습니다.

셋째, 제자에게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권위도 위임하셨습니다.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막3:15).

위의 세 가지 사항으로 미루어 보아 일반적인 사제 관계와는 달랐습니다.


윤석전 목사: 예수님께서 십자가라는 중대사를 앞두고 아버지를 향해 절규의 기도를 한 겟세마네 동산에는 동굴이 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사진설명> 겟세마네 동굴.


예수께서 기도하신 자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제자들의 수치스러운 면모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장소가 있다. “깨어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당부에 순종치 못하고 졸음에 빠졌던 부끄러운 장소, 겟세마네 동굴이다.

동굴 안 교회 제단 밑에는 조는 제자들의 모습이 조각돼 있다. 대비치 못한 위기 앞에서 완전히 무너져 버린 제자들. 그들 속에 있던 인간적인 연약함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좌절은 곧 부활하신 예수를 만날 변장된 축복이었음을 그때는 몰랐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18~20).


윤석전 목사: 제자들은 주님의 애타는 심정을 모른 채 한없이 졸았습니다. 그들이 졸았던 동굴은 어떤 곳인가요?

홍순화 원장: 성경에 재미있는 표현이 나와 있습니다.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눅22:41). 예수님이 기도하신 장소에서 ‘돌 던질 만한 거리’쯤 되는 곳에 동굴이 있습니다. 동굴 길이 17m, 폭 9m, 높이 3.5m 정도입니다. 지금도 무덤이 많이 있는데 당시에도 무덤 터로 사용했을 듯합니다. 제자들은 이 동굴에서 졸면서 예수님을 기다렸고, 결국 이곳에서 예수님이 체포됐다고 전해집니다.

윤석전 목사: 겟세마네 동산에 있었던 제자들의 모습이 성경 곳곳에 비치고 있습니다. 당시 제자들에 관해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박성민 목사: 성경에 나와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어쩌면 저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바로 이전 사건과 연결해서 본다면 심각하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 다락방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베드로는 “주를 절대로 부인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여러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다음,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만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그들에게 아주 정확하게 명령하셨습니다. “너희는 여기서 깨어 있으라.” 그런데 기도하시다 제자들을 보니 졸고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느냐?”라고 나무라십니다(막14:37). 예수님께서 그렇게 애절히 당부하셨으면 자기 몸을 꼬집어서라도 깨어 있어야 할 텐데 예수님이 다시 돌아오셨을 때 제자들은 또 졸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완전히 지쳐 있고, 주님의 기도 부탁에는 관심 없는 듯 기도를 포기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미 십자가 사건 전부터 주님의 명령에 철저히 실패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극도로 부각되어 있습니다.


윤석전 목사: 목사로서 평소 성도들이 주님의 심정을 품고 신앙생활 잘하기를 소망합니다. 목사를 위한 일이 아니라 성도 자신의 영혼의 때를 위한 것이라고 절규하며 일러 주는데도 그저 듣기만 할 뿐 성도들이 성경에서 가르친 대로 살지 못할 때 무척 속상합니다. 아마 제자들도 주님의 말씀을 가볍게 듣다가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후 예수님의 제자들은 ‘열두 사도’가 됩니다. ‘사도’와 ‘제자’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박성민 목사: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사도’라는 표현을 가장 많이 사용했습니다. ‘사도’라는 말 속에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예수님을 넓은 의미로 ‘사도시며 대제사장’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3:1).

이는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교회 내에서도 특별한 임무를 띠고 보냄을 받은 자에게 ‘사도’라는 단어를 씁니다. 좁은 의미로 열두 제자를 가리키지만, 바울이 자신을 ‘사도’라고 칭한 것처럼 넓은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


윤석전 목사: ‘사도’는 주님의 전적인 권한을 주어서 내보내는, 다시 말하면 주의 일을 하게 하려고 내보낸다는 의미를 지닌다는 말씀이시네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역 초기에 제자들을 어떻게 모으셨나요?

박성민 목사: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맨 처음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은 원래 침례 요한의 제자였다고 합니다.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요1:35~37).

사실상 침례 요한의 제자 안드레와 요한이 예수님의 처음 제자가 되었고, 그 두 사람의 지인, 동업자, 친척도 예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요한과 야곱의 어머니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자매간이었다고 합니다.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근거가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의 지인, 친척, 이웃이 모이면서 제자들이 늘어났고, 그중 열두 명을 뽑아서 결국 ‘사도’라고 불렀습니다. 이 사도들을 훈련해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자로 준비하게 했습니다.


윤석전 목사: 사랑하는 성도여, 주님은 지금도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이 하고 싶은 일은 이 땅에서 사마리아와 땅 끝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기도의 힘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원하시는 일을 행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이 땅에 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기도의 성공자가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을 따르는 믿음의 용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는 꼭 승리해야 합니다. 기도의 패배자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 보면서 우리는 기도 성공자가 되어야 합니다. 언제든지 기도하면서 육신의 정욕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주님을 끝까지 좇는 믿음의 용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계속>


<윤석전 목사 탐사기행 ‘성서의 땅을 가다’는 www.ybstv.com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489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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