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6-08-08 14:09:43 ]
<사진설명> 베드로 통곡교회에 있는 베드로와 한 소녀의 동상.
윤석전 목사(연세중앙교회): 베드로는 성령을 충만히 받은 후 사도로서 주의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런 베드로도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는 주를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측은하게도 목숨 하나 부지하려고 주님을 배신한 것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베드로가 주를 배신한 후에 통곡하며 회개했다는 장소, ‘베드로 통곡교회’를 살펴보겠습니다.
예루살렘 시온산 남쪽에는 ‘닭울음교회(갈리칸투)’라고도 부르는 ‘베드로 통곡교회’가 있다. 이곳에 오르는 계단은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것으로, 신약시대에 지었다. 예수께서 겟세마네에서 체포되어 대제사장의 관저로 끌려오실 때 손과 발이 묶인 채 이 돌계단을 밟으셨다. 당시 제자들은 아무런 저항 없이 잡혀가시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으리라. 제자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통해 로마의 폭정에서 벗어난 새 예루살렘을 꿈꾸었다. 예수님이 로마 정부를 전복해 이스라엘의 국운을 회복하고 종국에는 세계를 지배하는 왕이 되실 줄로 믿었다. 그런 예수께서 붙들려 간다는 것은 상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예수께서 그동안 보이신 능력과 이적으로는 전혀 당치 않은 일이었다.
교회 지붕 십자가에 있는 닭 형상은 배신한 베드로의 사연을 담고 있다. 비자(婢子) 하나가 베드로에게 “네가 그(예수)와 한 당이다” 할 때 베드로는 “나는 그를 도무지 모른다”고 부인했다. 마지막에는 저주하면서 “나는 그를 알지 못한다”고 강력히 맹세했다. 닥쳐온 위기를 모면하고자 예수님과 무관함을 증명하려 몸부림친 베드로. 그 순간 그는 예수님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윤석전 목사: 예수께서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대로 베드로는 여지없이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맙니다. 그 순간 닭이 울었고, 베드로는 통곡했습니다. 그 자리에 베드로 통곡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곳을 자세히 소개해 주세요.
홍순화 원장(한국성서지리원): 주후 457년에 비잔틴 교회에서 이 자리에 베드로의 회개를 기념해 처음 교회를 세웠습니다. 1010년경에 모슬렘이 파괴하였고, 1102년 십자군이 교회를 재건립했고, 이후 또다시 폐허가 되었습니다. 1888년경에 이 장소를 발굴했는데, ‘가야바의 집’이라고 전승되던 곳이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통곡한 장소로 봅니다. 지금 있는 교회는 1931년 9월에 지었습니다. 학자 중에는 시온문 바로 앞 저택을 ‘가야바의 집’으로 보기도 하지만, ‘베드로 통곡교회’ 자리를 ‘가야바의 집’이라고 보는 견해에 더 무게를 둡니다.
윤석전 목사: 성경에 베드로의 이름이 여러 가지로 나오는데, 왜 그렇게 많은지 말씀해 주세요.
박성민 목사(한국대학생선교회 CCC대표): 성경에는 베드로를 시므온, 시몬, 게바, 베드로 네 가지로 부릅니다.
안드레가 시몬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을 때, 주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불렀고, 다른 곳에 보면 ‘바요나(요나의 아들) 시몬’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시므온(Symeon)’은 베드로의 히브리 이름이자 본명입니다. ‘시몬(Simon)’은 ‘시므온’의 헬라 발음입니다(마16:16;눅5:8;요1:40;6:8).
또 주님께서 “이제부터 너를 ‘게바’라고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게바(Cephas)’는 아람어로 ‘바위’란 뜻입니다(요1:42;고전1:12;3:22). 헬라어 ‘페트로스(베드로)’와 같은 의미입니다. ‘베드로(Peter)’는 ‘게바’의 헬라식 이름으로 이도 ‘반석’이라는 뜻입니다(마16:18;눅6:14;요1:42).
의미상으로 따져보면, ‘바요나’는 ‘요나의 아들’이라는 뜻이고, ‘요나’는 ‘비둘기’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바위’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변화를 예언하시고 그런 이름을 붙여 주신 것 같습니다. 궁극적으로 교회가 반석이 되고 베드로가 교회의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뜻의 이름을 붙여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다른 제자와 달리 이름까지 받은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윤석전 목사: 베드로는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나요?
박성민 목사: 누가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명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5:4). 베드로는 그 말씀에 순종해 그물이 찢어질 만큼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 후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좇았습니다. 베드로는 안드레에게서 예수님을 소개받은 후, 좇을지 말지 고민했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 기록된 풍어(豊漁)를 경험하자 예수님을 전적으로 따랐습니다.
윤석전 목사: 성경에 나타난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 변화무쌍합니다. 베드로의 성품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박성민 목사: 베드로를 ‘이런 사람’이라고 단적으로 말하기 어렵지만, 성경 속 여러 사건을 살펴보면 대체로 성품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오병이어 이적을 행하신 후 갈릴리 저편에 계시다가 떠나시고 제자들은 배를 타고 오는데, 그날 갑자기 풍랑을 만났습니다. 성화(聖畵)에 보면 베드로가 제자들 사이에서 홀로 바닷속으로 풍덩 뛰어내리는 모습을 그려 놓았습니다.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저 멀리서 예수님이 바다 위로 걸어오십니다. 제자들이 “유령이다!”라며 두려워하자 예수님께서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말하였고(마14:23~29) “오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즉시 바다로 뛰어내렸습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베드로는 충동적이면서도 화끈한 성격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마가다락방에서 예수께서 “너희가 나를 버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모두 주님을 버려도 자신은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즉시 “네가 닭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 하리라” 하셨고 베드로는 “주와 같이 죽을지언정 절대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맹세까지 했습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그 순간에 느끼는 감정을 솔직히 말하는 성품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예수님을 잡으러 온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어 버렸습니다. 그 사건에서도 충동적이고 격동적으로 순간순간 감정에 충실한 베드로의 성품을 엿볼 수 있습니다.
윤석전 목사: 베드로는 잠시 후를 생각지 않고 행동부터 하는 솔직하고 즉각 행동하는 성품이기에 예수께서 크게 사용하신 것 같습니다.
현재 베드로 통곡교회 지하에 가 보면 예수님이 갇혔던 감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감옥에 갇힌다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 감옥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사진설명> 베드로 통곡교회 지하에 있는 예수께서 갇히신 동굴 감옥.
베드로 통곡교회 지하에는 예수께서 갇히셨던 깊숙한 동굴 감옥이 있다. 이곳은 재판 전에 죄수들을 끌어다가 고문한 장소라고 한다. 이곳에서 예수께서는 돌기둥에 사지를 묶였고 전통적 유대인의 체형(體刑)인 ‘사십에 한 대 감한 서른아홉 번의 매질’을 당하셨다. 이때 제자들은 도망쳐서 힌놈 골짜기 깊은 동굴에 몸을 숨겼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고, 가룟 유다는 나무에 목을 매었다. 실로 사단의 권세가 압도하던 시간이었다. 이곳 지하에는 예수님과 관련한 또 하나의 장소가 있다. 십자가 사건 후 예수께서 나타나신 곳이라는데 그곳에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인간을 온전히 사랑하셨으나 그 인간에게 철저히 버림당하셨던 메시아. 그러나 그 사랑 때문에 깊은 감옥 속 불행한 자들에게 찾아오셨다. 하나님은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가 그를 통해 살 수 있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자기의 사랑을 나타내셨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10).
윤석전 목사: 예수께서 갇히셨던 감옥이 어떤 곳인지 궁금합니다.
홍순화 원장: ‘베드로 통곡교회’가 있는 곳은 그 당시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이기도 합니다. 지하로 내려가면 감옥이 있는데 그곳을 예수님이 갇히셨던 감옥 자리로 봅니다. 그곳에 오래된 돌계단이 있는데 예수님 시대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 계단은 기드론 계곡에서 시작된다고 하는데, 지금은 도중에 끊겼습니다. 그곳에서 물 저장소와 감옥으로 사용한 장소가 발견되었는데 1세기 무렵 것으로 추정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장소와 시기를 여러 측면에서 고려해 볼 때, 그곳이 가야바의 집이고, 예수님을 가두었던 감옥이라고 여깁니다.
윤석전 목사: 성경에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모습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말씀해 주세요.
박성민 목사: 요한복음과 공관복음(마태.마가.누가복음)을 종합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가야바의 뜰에서 여종이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여기서 베드로는 초점을 두 사람에게 둡니다. 즉 그 사람의 말을 부인한 것입니다. 이어 다른 비자에게 동일한 말을 듣자 또 부인합니다.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이때는 자기 지식을 부인합니다. 곧이어 곁에 섰던 사람들이 추궁합니다. 마태복음에는 “너도 같은 당이라. 네 말소리가 갈릴리 사람인데 뭘 그래!”, 마가복음에는 “너 갈릴리 사람 아니냐?”, 요한복음에는 귀를 베였던 말고의 친척이 알아보고 “네가 예수와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봤다”라고 합니다. 매우 긴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저주하며 맹세하면서 주를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저주한 것이 아니라 마치 우리가 ‘이 말이 거짓이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하듯이 매우 강하게 말하는 것으로, 여기서 베드로는 자신과 예수님의 관계를 철저하게 부인했습니다.
윤석전 목사: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는 베드로의 제자였습니다. 마가는 베드로에 대해 특히 비판적으로 글을 썼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박성민 목사: 베드로전서에서 베드로는 ‘내 아들 마가’라는 표현을 씁니다(벧전5:13). 그 마가가 마가복음의 저자라고 봅니다. 마가는 베드로에게서 예수님에 관해 배웠습니다. 마가복음을 다른 복음서와 비교할 때,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책망받는 모습을 매우 형편없이 표현했습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에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쓰였다면, 마가복음에는 ‘믿음이 없는 자들아’라고 쓰여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장면이 네 복음서에 모두 나옵니다. 그중 마가복음을 가장 먼저 기록했다고 가정할 때, 그 사건은 베드로를 통해서 전해졌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베드로가 20여 년 전 자신의 모습을 얼마나 형편없었다고 생각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가복음에 그들의 실패한 믿음의 모습이 생생히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그 실패를 닮지 않고 성공하도록, 반면교사로 삼도록 그렇게 격하게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윤석전 목사: 공관복음서는 같은 내용을 기록하면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어떻게 다른지 말씀해 주세요.
박성민 목사: 첫째, 공관복음마다 특별한 신학적 주제를 묘사하고 있어 관점에 차이가 있습니다. 둘째, 수신 대상이 다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염두에 두고 기록했고, 마가복음은 이방인을 대상으로 썼습니다. 따라서 유대인 관점에서 쓴 마태복음은 ‘하나님 나라’를 ‘천국’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말을 경솔히 쓰지 않으려고 ‘하나님 나라’ 대신 ‘천국’이라고 쓴 것입니다. ‘천국’을 비유할 때도 마태복음은 ‘겨자씨를 밭에 뿌렸다’고 했습니다(마13:31~32). 이방인을 대상으로 쓴 누가복음은 ‘겨자씨를 채전(채소밭)에 뿌렸다’고 기록했습니다(눅13:19). 이방인들은 겨자씨를 정원수로 썼습니다. 이처럼 표현이 다른 점을 보고 기자(記者)들이 임의로 쓴 것으로 여길 수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은 아람어로 말씀하셨기에, 그 음을 그대로 옮기기보다 그 말의 뜻을 전달하고자 수신 대상을 중심으로 용어를 바꾼 것뿐입니다. 이런 사실은 공관복음을 대조해 보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윤석전 목사: 우리도 예수를 믿으면서 교회에서 물질, 명예, 이웃, 직분, 사사로운 이기주의 또는 자기 자신 때문에 시험 들어 스스로 변하지 않았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변하는 우리를 바라보면서 가슴 아파하십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해서 제자들처럼 죽을 때까지 변하지 말고 값지게 복음의 증거자로 살아야 합니다. 복음 증거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우리 모든 생애를 다해야 합니다. <계속>
<윤석전 목사 탐사기행 ‘성서의 땅을 가다’는 www.ybstv.com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491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