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6-09-27 10:09:55 ]
-진행 윤석전 목사(연세중앙교회 담임)
-박성민 목사(한국대학생선교회 CCC 대표)
-홍순화 원장(한국성서지리원)
<사진설명>[사진1] 카파도키아
<사진설명>[사진2] 데린쿠유 지하 도시
윤석전 목사: 초대 교인들은 상상할 수 없는 핍박을 받았습니다. 나무에 꽁꽁 묶인 채 기름 벼락을 맞고 밤을 밝히는 등불로 참혹히 타들어 갔습니다. 또 모진 채찍질에 맞아 죽고, 때로는 산 채로 껍질이 벗겨져 죽었습니다. 그와 같은 잔인한 핍박 가운데서도 초대 교인들은 묵묵히 복음을 붙잡고 천국을 바라보며 이리저리 흩어져서 신앙을 지켰습니다. 복음 전파라는 절대적 사명을 부여잡고 복음을 전하려고 숨어 살던 장소, 터키의 카파도키아 ‘데린쿠유’와 ‘괴레메’를 자세히 둘러보겠습니다.
터키 최대 도시 이스탄불에서 자동차로 14시간 거리에 있는 카파도키아(Cappadocia, 사진1). 기독교인이 박해기(期)에 고난을 피해 숨어들었던 장소로 유명하다. 땅속 피신처인 데린쿠유(Derinkuyu, ‘깊은 우물’이라는 뜻, 사진2)는 순례자들의 발걸음이 이어진다. 최대 4만 명을 수용한 대규모 지하 도시였다고 한다. 데린쿠유에는 외부에서 적이 침입하면 지하 동굴 통로를 차단하는 둥근 돌문이 있다. 돌문은 두께 60㎝, 직경 180㎝, 무게 300∼500㎏이다. 막대기를 중앙 구멍에 끼워 굴려서 출입구를 봉쇄했다.
좁은 통로를 지나다 보면 넓은 장소가 나온다. 세로 20m, 가로 9m인 십자형 교회 터다.
지하 도시에서 집단 생활을 하느라 규율을 세우려고 감옥 시설도 만들었다. 홈을 판 기둥에 규율을 어긴 사람을 매달아 형벌을 가했다.
100m 넘는 깊은 땅속 도시에서 살아가려고 과학적 시설을 마련했다. 지상과 연결된 환기 시설이다. 밀려드는 사람들로 지하 도시는 더 확장되었고, 거주지는 말할 것도 없고 장례지까지 갖춘 대도시를 이루었다. 땅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만큼 그들의 믿음도 깊어져 갔다.
윤석전 목사: 데린쿠유는 세계 9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힙니다. 상상을 초월한 규모와 생활상을 보면서 초기 기독교인들이 참 대단하게 느껴졌습니다. 데린쿠유 역사와 지리상 특징을 말씀해 주세요.
홍순화 원장: ‘카파도키아’는 터키 중부 지방에 있습니다. ‘데린쿠유’는 카파도키아에 있는 수많은 지하 도시 거주지 중 한 곳입니다. 1963년, 농가 한쪽이 꺼지면서 우연히 발견되었습니다. 지금 찾아낸 지하 도시만 150여 곳이나 됩니다. 계속 조사·발굴하고 있습니다.
데린쿠유는 지하 20층 규모로 추정합니다. 안전상 8층까지만 공개합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박해를 피해 동굴을 파고 들어갔습니다. 그 열악한 여건 속에서 빗물을 모아 우물을 만들고, 음식을 저장하고, 지하에 교회를 파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초창기 기독교인의 생활을 온몸 가득 느낄 수 있는 귀한 장소입니다.
윤석전 목사: 데린쿠유 지하 20층을 모두 발굴한다면 그 안에 얼마나 많은 기독교 신앙의 역사가 숨어 있을지 궁금합니다. 피난 장소인 데린쿠유 벽에는 베드로와 바울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기들을 대신해 기도해 달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기도한 까닭을 설명해 주세요.
박성민 목사: 베드로와 바울 두 사도의 특별한 위치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의 공생애(公生涯)를 함께한 증인입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계시받아 사역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사도의 권위’가 매우 중요했습니다. 장로들도 사도들이 전한 말씀을 그대로 전달할 사람으로 뽑았습니다. 교회로 어떤 이들을 불러 말씀을 전하게 할 때도 사도의 추천서가 없으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즉 사도들이 지닌 절대적 권위를 중요하게 여기는 시대였습니다. 따라서 피난 장소에서 초대 기독교인들은 권위 있는 사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했으리라 추측합니다. 당시 기독교인의 처지를 이해해 본다면, 사도들의 권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를 염두에 둔다면 기도할 때 사도 이름을 부른 상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윤석전 목사: 기독교 역사는 초대교회 때부터 피로 얼룩진 발자취를 따라오며 고난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순교와 교회 성장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박성민 목사: 신학자 터틀리안(Tertullianus, 160~240)이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다.” 한마디로 순교와 교회 설립·성장은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을 보면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합니다(벧전4:13). 또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라고 말합니다(벧전4:14).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은 핍박받고, 고난당하고, 순교하는 일을 매우 복되게 여겼습니다. 사도 바울은 옥에 갇혔을 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복음 전파에는 ‘고난’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잘 알았고, 자신이 복음 전하다가 받는 고난을 달게 여겼습니다. 핍박·고난·순교와 교회 성장은 비례하는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가르침 속에는 그 점이 전달되었습니다.
윤석전 목사: ‘데린쿠유’와 다른 모습으로 만든 초기 기독교인 피난처가 있습니다. 카파도키아에 있는 ‘괴레메’입니다. 그 현장을 살펴보겠습니다.
터키 앙카라에서 내비쉬르를 거쳐 가다 보면 해발 100m 고원 지대 괴레메 마을이 나온다. 터키 국립 역사 공원인 괴레메(Goreme)는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됐다. 300만 년 전 화산 분화로 퇴적된 응회암층이 오랜 세월 지하수나 빗물에 침식해 형성된 곳이다.
11세기 무렵, 박해를 피해 온 기독교인들이 바위를 파서 수많은 수도원을 만들었다. 척박한 땅이라 누구도 찾지 않는 곳. 그랬기에 자유롭게 신앙생활 할 곳을 찾던 기독교도들에게 적당한 터전이 되었으리라.
이곳에는 신앙의 자유를 열망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형성된 교회나 수도원이 무려 1000여 개나 된다. 11세기에는 7만 명에 달하는 기독교인이 이곳으로 피신해 예배생활을 했다고 한다. 외부 탄압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서려는 믿음이 이 괴레메 마을을 탄생시켰다.
황량한 사막과 같은 고립 지역에 일궈 낸 카파도키아의 개척 정신. 그것은 하나님께로 향한 믿음에서 표출된 초대 교인들의 불꽃같은 순교 정신의 결정체였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1:20~21).
<사진설명>[사진3] 괴레메 동굴 마을
윤석전 목사: 터키에는 초대교회 당시 동굴 형태로 은신하며 신앙생활 했던 장소가 참 많습니다. ‘괴레메’와 앞서 보았던 ‘데린쿠유’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홍순화 원장: 두 곳 모두 터키 카파도키아 지역에 있습니다. 카파도키아는 앙카라 남쪽 280m 지점에 있는 면적 800㎢ 정도인 매우 넓은 곳입니다. 아주 특이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괴레메’는 산악 지역에 바위를 파서 지었습니다. 그렇게 지은 동굴교회가 1000여 개 있습니다. 그 안에 벽화가 많습니다. ‘데린쿠유’는 평지에서 지하로 파고 들어간 전형적인 지하 도시입니다.
윤석전 목사: 기독교인이 ‘괴레메’에 얼마 동안 거주했습니까?
홍순화 원장: 1세기부터 12세기까지 1200년 정도 거주했다고 합니다. 초기에는 핍박을 피하려고, 중세에는 교리 갈등을 벗어나 신앙의 자유를 찾으려고 이곳 ‘괴레메’에 모여들었습니다. 이곳에 살던 성도들은 11세기 모슬렘 왕조인 셀주크 제국 지배 때 버텨 냈고, 16세기 모슬렘 국가 오스만 터키 제국 때도 잘 견뎌 냈습니다.
윤석전 목사: 현대에도 전 세계 곳곳에서 순교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로마 시대와 비교할 때 현대 순교자 수는 얼마나 되는지 궁금합니다.
박성민 목사: 통계를 낼 수 있지만 그 전에 알아 두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최근 세계 곳곳에서 순교한 기록은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당시 순교자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64년 로마 네로 황제부터 시작한 기독교 핍박은 그리 체계적이지 않았습니다. 제국적인 핍박보다 폭도들에 의한 핍박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남아 있는 기록을 토대로 순교자 수를 추정해 보면, 250년 데시우스 황제 이후 313년 기독교가 국교로 인정받기까지 1000여 명이 순교했다고 봅니다. 그 수가 정확하다면, 20세기에 들어 순교한 사람은 1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순교한 이들을 합한 수보다 더 많습니다. 최근 기독교 순교자 백과사전을 볼 때, 순교자 수는 점점 더 늘고 있습니다.
윤석전 목사: 핍박을 심하게 받을수록 신앙이 더 깊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박성민 목사: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에도 나와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고 가르치셨습니다(벧전3:9). 저항해서 칼을 들기보다 핍박하는 자를 용서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라는 뜻입니다. 사실 순교 역사를 ‘기독교 역사’라고 말할 만큼 핍박과 순교는 기독교와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다른 어떤 승리보다 고귀합니다. 지금껏 말한 지하 동굴 속의 삶, 또는 광장에서 잔인하게 일어났던 핍박에서 승리한 역사가 이를 뒷받침해 줍니다. 핍박받는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고, 복 받는 길이라고 여겼기에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주후 156년 ‘폴리갑’이 화형을 당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시체를 가져다가 ‘이 거룩한 몸은 금보다도 훨씬 귀한 보배’라고 말할 만큼 순교한 그를 존경했습니다. 순교에 의미를 부여하고 존중했기에 순교가 지속해서 행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윤석전 목사: 우리 가슴에 무엇이 살아 있습니까? 주를 향한 믿음, 살아 있는 생생한 생명,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구령의 열정이 불타고 있습니까? 초대교회 제자들과 같이 우리 모두 생애를 불사르며 내일의 영광스러운 주인공이 되어 하늘나라 잔치에 참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계속>
<윤석전 목사 탐사기행 ‘성서의 땅을 가다’는 www.ybstv.com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495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