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와 함께하는 ‘성서의 땅을 가다’(58)] ‘사랑의 사도’ 요한 선교지 터키

등록날짜 [ 2016-12-21 14:12:16 ]

과격한 성품 탓에 우레의 아들로 불려
십자가 사랑 경험하자 사랑의 사도로
120세까지 터키에 살며 예수 사랑 전해


-진행 윤석전 목사(연세중앙교회 담임)
-박성민 목사(한국대학생선교회 CCC 대표)
-홍순화 원장(한국성서지리원)

윤석전 목사: 사랑의 사도 요한의 마지막 발자취를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면서 어머니 마리아를 요한에게 부탁했습니다. 요한은 요한복음과 요한일·이·삼서에서 자기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한 사랑을 끝없이 나누어 주고자 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생애 마지막을 보낸 터키로 가보겠습니다.


<사진설명> 세계적인 명소 소피아교회. 교회 입구에 들어서면 바로 이슬람 제단이 보여, 이곳이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로 쓰였다는 안타까운 역사를 되새기게 한다. 최근 70년간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터키 이스탄불은 세계를 지배했던 3대 강국, 즉 동로마 제국(330~476), 비잔틴 제국(476~1299), 오스만터키 제국(1299~1922)의 수도였다.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인 보스포루스 해협을 끼고 있는 이스탄불은 동서양이 공존하는 세계 유일한 도시다. 이곳에는 세계적인 명소 소피아교회가 자리하고 있다. 로마에 베드로교회를 짓기 전까지 세계 최대 규모였던 소피아교회는 비잔틴 건축의 걸작품이다.

소피아교회 입구에 들어서면 이슬람 제단을 마주한다. 이곳이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로 쓰였다는 안타까운 역사를 되새기게 한다. 소피아교회 출입구 상단에 있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벽화는 소피아교회를 건축할 당시 그 건물의 정체를 입증하고 있다.

소피아교회는 325년 로마제국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창건했다. 하지만 현재 코란(이슬람교 경전)의 금 문자와 마리아를 묘사한 모자이크 벽화가 함께 있는 모습은 지나간 역사 속에서 이 땅에 종교 전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실감케 한다.

한때 이곳은 이슬람 문화를 꽃피운 오스만터키제국이 차지했던 만큼, 본당 1층 중앙에 이슬람 제단을 비롯해 관광객의 눈길을 끄는 아랍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이슬람교 지배 당시에는 석회질로 덮어 놓았던 모자이크 벽화들이 20세기 들어 미국 고고학자에 의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모자이크 벽화들은 주로 소피아교회 본당 1층에 전시되어 있다. 오랜 세월 동안 5cm 두께 횟가루 층 밑에 갇혀 있던 이 성화(聖.) 대부분은 성화상 파괴 운동 종결 후인 9세기 이후 작품인데 소피아교회를 기독교 예술의 보고(寶庫)로 만들어 주었다.

윤석전 목사: 소피아교회는 로마에 베드로교회가 지어지기 전까지 1000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로 자리했고,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우여곡절이 많은 역사를 소개해 주세요.

홍순화 원장: 현재 있는 소피아교회 건물은 세 번째 지은 것입니다. 첫 건축물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지었는데 화재로 소멸했습니다. 두 번째 건축물은 데오도시우스 황제(379~395년 재위)가 지었는데 민란 때 불탔습니다. 세 번째 건축물이 지금의 것입니다. 기록을 보면 이 건물은 916년 동안 교회로 사용되었습니다. 사실 지금 봐도 대단한데 당시는 얼마나 굉장했겠습니까? 오스만터키가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키고 건물들을 다 파괴했는데 소피아교회 건물은 뛰어나게 아름다우니까 무너뜨리지 않고 남겨두었습니다. 벽에 있는 모자이크 성화들을 회칠한 채로 481년간 이슬람 모스크로 사용했습니다. 최근에는 70년간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건물 하나가 교회와 모스크로 쓰여지다가 이제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니 참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습니다.

윤석전 목사: 터키는 신약과 어떤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 말씀해 주세요.

박성민 목사: 초대교회 당시 로마제국을 지역별로 구분해 보면 소아시아인 터키, 가파도기아, 부르기아, 수리아 네 지역이었습니다. 바나바의 고향 구브로 섬은 절반이 터키에 속했고, 복음 전파의 전초 기지였던 수리아 안디옥도 터키에 속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모든 전도 여행도 소아시아 터키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서신을 보낸 도시 중 갈라디아가 터키 소아시아에 있었습니다. 디모데에게 쓴 디모데전·후서도 터키와 관련됐습니다(딤전1:3;딤후4:9~13). 베드로전서 시작 부분에 쓰인 인사를 보면 소아시아 터키를 염두에 두고 썼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벧전1:1~2). 요한은 생애 마지막을 소아시아 터키에서 보냈기에 요한일·이·삼서도 터키와 연관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일곱 교회도 다 소아시아에 있기에 터키는 신약과 매우 밀접합니다.

윤석전 목사: 기독교 역사가 깊이 밴 터키 땅 셀축, 그곳에 사도 요한의 무덤 위에 세웠다는 사도 요한 기념교회로 가보겠습니다.



<사진설명> 사도 요한의 무덤 위에 세웠다는 사도 요한 기념교회.

셀축(Selcuk)은 터키 에베소의 현재 명칭이다. 이곳에 사도 요한 기념교회가 있다. 사도 요한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에베소로 와서 여생을 마쳤다고 전해지고 있다. 십자가 형태인 사도 요한 기념교회의 웅장함은 천 년 넘는 세월 동안 지속되고 있다. 4세기경 요한의 것이라고 추정되는 무덤 위에 로마 유스티아누스 대제가 십자가형 교회를 건축했다. 무덤 주변 기둥 4개는 복음서의 제자들을 상징한다고 한다.

사랑의 사도로 알려진 사도 요한 그의 무덤이 얼마나 긴 세월을 지속해 왔는지는 주변 각종 유적들로 입증된다. 사람이 잠길 만큼 충분한 깊이로 침례탕도 마련돼 있다. 2000년 전 사도 요한도 이 침례 터에서 침례를 주며 죽음에서 새 생명으로 나아감을 선포했으리라. 요한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사랑을 고난의 삶 속에서 입증해낸 사랑의 사도였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4:15).


윤석전 목사: 사도 요한 기념교회 역사와 그 유래를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홍순화 원장: 전승을 살펴보면 사도 요한은 120세까지 에베소 지역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에베소 바로 옆에 아야슬룩이라는 언덕이 있습니다. 로마 시대에는 묘지로 쓸 정도로 황량했던 아야슬룩에 사도 요한이 머물렀다고 합니다. 학자들은 석관(石棺)이 나온 곳을 요한 무덤이라고 결론짓고 그 지역에 교회를 세웠다고 합니다. 4세기에 처음 교회를 지었는데 십자가 형태였으리라고 추정합니다. 그 후 6세기에 황제가 제대로 지으라고 해서 재건축했고, 10세기에 또다시 지었습니다. 안타깝게도 14세기에는 이곳에 이슬람 사원을 지었습니다. 현재 그 지역에는 옛 교회 모습을 복원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한곳을 지적해서 요한 무덤이라고 정한 곳이 있습니다. 현재까지 이곳을 요한 기념교회가 있었던 장소로 보고, 그 안에 요한의 무덤이 있었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윤석전 목사: 많은 사람이 ‘사도 요한’ 하면 ‘사랑의 사도’라고 말합니다. 성경 속에 나타난 요한의 성품을 말씀해 주세요.

박성민 목사: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 사랑이라는 말이 많이 나와서 요한을 ‘사랑의 사도’라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 제자로 좇아다닐 당시 요한의 모습을 보면 사랑의 사도라기보다는 과격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마가복음 3장에는 예수께서 야고보와 요한에게 ‘보아너게’ 즉 ‘우레의 아들’이라고 불렀다는 얘기가 있습니다(막3:17). 누가복음 9장을 보면 두 경우가 나옵니다. 먼저는 요한이 예수님께 자랑스럽게 얘기합니다.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눅9:49). 그러자 예수님께서 교훈을 주십니다.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눅9:50). 그다음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을 갈 때 사마리아를 통과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내 준비케 하셨는데 그들이 영접지 아니하자 야고보와 요한이 말합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눅9:54). 그때 예수께서 그들을 꾸짖으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무엇을 알 수 있냐 하면, 맨 처음 요한과 야고보의 성격은 불같고 과격했으나 예수님 안에서 배우고 성령의 능력을 받자 사랑의 사도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윤석전 목사: 공관복음과 비교할 때 요한복음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박성민 목사: 공관복음을 보다가 요한복음을 읽으면 확 달라지는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나 변화산 사건이 나오지 않고, 주의 만찬이라는 단어조차 나오지 않고, 귀신을 내어 쫓는 이적도 보이지 않습니다. 니고데모나 사마리아 여인 얘기도 없고, 나사로를 살리신 얘기도 없습니다. 반면 제자에 관해서는 나다나엘과 도마와 빌립 얘기가 더해져 공관복음과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또 다른 복음서는 구약성서를 인용하는 데 그친 반면, 요한복음은 구약 속에 파묻혀 있습니다. 구약적인 특징이 가장 많습니다. 또 ‘기적(奇蹟)’보다는 ‘표적(標蹟)’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사건을 보기보다는 사건을 뛰어넘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만날 수 있게 하는, 요한만의 독특한 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윤석전 목사: 요한 사도는 생애 마지막을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합니다.

박성민 목사: 요한복음 21장과 연결해서 생각해보면 좋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보면서 말씀하였습니다.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21:18). 그다음을 보면 베드로가 요한을 가리켜 “이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내가 돌아올 때까지’라는 말 때문에 교회에서 ‘요한이 영원히 산다’고 오해한 것 같습니다. 그게 아니다라는 말이 요한복음에 나와 있습니다(요21:23). 미루어 알 수 있듯 요한은 장수했습니다. 말년에는 너무 나이가 많이 드셔서 설교를 했다 하면 “서로 사랑하라”는 얘기밖에 안 하셨다고 합니다. 제자들이 “그 얘기 또 하십니까? 다른 얘기 좀 해주십시오”라고 하면 요한은 “그것만 하면 된다”고 했다고 합니다. 요한은 말년에 아는 것을 다 잊고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사랑하라’는 말씀을 설교하시다가 돌아가셨기에 ‘사랑의 사도’라고 전해집니다.

윤석전 목사: 예수님께는 자기 형제들이 있는데 왜 어머니 마리아를 제자인 요한에게 부탁했을까요?

박성민 목사: 마가복음 15장이라든지 마태복음 27장, 요한복음 19장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밑에 여자들이 있습니다. 잘 비교해 보면 ‘살로메’라는 여인이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이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는 자매간이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요한은 이종사촌 간인 셈이지요. 잘 아시다시피 요한과 야고보는 다른 제자에 비해 부유한 층에 속했습니다. 따라서 재정적으로, 신앙적으로 도와줄 수 있고, 친분을 봐도 모실 수 있는 사이였습니다. 마리아에 대한 사랑과 신앙과 경제적인 이유 등 모든 것 때문에 요한에게 부탁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윤석전 목사: 요한은 ‘우레의 아들’이라고 할 정도로 과격한 사람이었으나 사랑의 사도로 거듭났습니다. 우리도 교회 안에서, 가정 안에서 많은 사람에게 예수의 사람임을 드러내며 교회 공동체가 사랑을 전하며 사랑으로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계속>
<윤석전 목사 탐사기행> ‘성서의 땅을 가다’는
www.ybstv.com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508호> 기사입니다.

    아이디 로그인

    아이디 회원가입을 하시겠습니까?
    회원가입 바로가기

    아이디/비번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