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와 함께하는 ‘성서의 땅을 가다’(72)] 노아와 방주가 머물렀던 아라랏 산과 우라르투 왕국 이야기

등록날짜 [ 2017-05-15 14:02:18 ]

‘아라랏’은 ‘산이 많다’는 ‘우라르투’를 히브리식으로 표현한 단어
‘아라랏 산’은 특정한 산이 아니라 아라랏 지역에 있는 산을 의미해
우라르투 왕국은 천혜의 요새 지역
B.C. 7세기 앗시리아 제국에 필적할 눈부신 문명 발전 이뤄
터키 반 지역에 방주 터 존재하지만 고고학적 뒷받침에 아직 어려움 존재
역사성보다는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윤석전 목사: 창세기 6장에는 노아 홍수 사건을 생생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하나님은 노아 시대 사람들의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지면에서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지만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자신과 가족을 구원할 방주를 지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생각과 계획과 뜻이 자신과 같은 자를 택하여 쓰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의로운 자를 버리지 않습니다. 당대 의인인 노아와 그의 가족이 구원받은 방주는 오늘날 어디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요? 성경에서 홍수 후에 노아의 방주가 머문 곳이라고 밝힌 ‘아라랏 산’은 오늘날 터키 땅입니다. 한때 아라랏 산 일대를 다스렸던 ‘우라르투 왕국’에 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우라르투 왕국은 터키 반(Van) 호수를 중심으로 방대한 지역을 지배했고, 주전 7세기까지 당시 세계 최강대국 앗시리아에 대항할 정도로 강력한 국가를 형성했다. 주전 9세기에 수도를 ‘투슈파’로 옮겼다. 투슈파는 높이 100m나 되는 바위산에 자리해 난공불락인 천혜의 요새다. 투슈파에 현재 남아 있는 성채들은 주후 1000년경 ‘셀주크’가 주인일 때 세운 것이다. 우라르투 왕국은 주전 590년경에 페르시아 캄비세스 1세에게 멸망해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윤석전 목사: ‘우라르투 왕국’은 생소한데 어떤 곳인지 소개해 주세요.

오택현 교수: ‘산이 많다’는 뜻인 ‘우라르투’는 앗시리아어입니다. 히브리어로는 구약에 네 번이나 등장하는 ‘아라랏’입니다(창8:4;왕하19:37;사37:38;렘51:27). 우라르투 왕국(B.C.860~B.C.585)은 바로 아라랏 왕국입니다. 이 지역은 고대 유다와 비슷한 시기에 탄생하여 비슷한 운명에 놓였습니다. 성서 기자(記者)들은 동병상련한 처지에서 우라르투 왕국을 기록했습니다. 우라르투 왕국은 주전 9세기에 민족을 통일했고 주전 8세기에 전성기를 맞습니다. 최전성기에는 고대 근동 최강국 ‘앗시리아’에 필적할 유일 국가였습니다. 나중에는 앗시리아의 표적이 돼 연이어 침략을 받았고 주전 7세기에 국운이 쇠퇴했으며, 주전 585년 페르시아에게 멸망합니다. 우라르투 왕국은 앗시리아어, 우라르투어를 두루 사용하고 토판 문서를 많이 남겼습니다. 우라르투 왕국은 금속 제련에 뛰어난 기술력을 보여 멀리 그리스 왕국에까지 금속 제품을 수출했습니다.

윤석전 목사: 우라르투 왕국이 구약 성경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말씀해 주세요.

오택현 교수: 창세기 기자에 의하면 우라르투는 ‘아라랏 산’이라고 합니다. ‘아라랏 산’은 노아 방주가 머물렀던 산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아라랏 지역에 있는 산’이라는 뜻입니다. 창세기 기자는 특정 산을 지칭해 ‘아라랏 산’이라고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아라랏 지역에 있는 어느 산’을 의미한 것입니다. 이런 성서 기자의 생각은 후대 예언서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이사야 37장 38절을 보면 앗시리아 왕 ‘산헤립’을 암살한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아라랏 땅’으로 도망칩니다. 주전 8세기는 우라르투 왕국이 강력한 힘을 발휘할 때라 앗시리아 왕을 암살한 사람이 망명한다 해도 별문제 삼지 않았고, 보복을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라르투 왕국은 이후 100년 동안 앗시리아의 침략을 받아서 약해졌는데 당시 상황이 예레미야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사야보다 100년 후대 예언자인 예레미야는 51장 21절에서 유다를 멸망시킨 바벨론을 응징할 주변 나라를 찾을 때 ‘아라랏’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유다와 마찬가지로 아라랏도 당시 강대국에 고난을 당하고 있는데 그들이 함께 일어나서 바벨론을 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이같이 성서 기자들은 아라랏 왕국에 동병상련하며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윤석전 목사: 우라르투 왕국의 신학적 의미를 말씀해 주세요.

유윤종 교수: ‘아라랏’을 떠올리면 먼저 노아 방주가 머문 산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노아 방주가 머물렀던 산은 히브리어로 ‘아라랏 산들’이라고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노아 방주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노아 방주 터는 아라랏 지역 여러 산 중 하나일 것이며,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습니다.

우라르투 왕국의 수도 투슈파 주변에는 아르메니아인이 세운 ‘악타마르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외부와 내부에 있는 아름다운 벽화 덕분에 유명하다. 이 교회를 에워싸고 있는 반 호수를 건너면 노아 방주가 머물렀다는 터키 최대 산 ‘아라랏’에 다가선다.

<사진설명> 아르메니아인들이 반 호수에 지은 악타마르교회. 반 호수를 건너면 노아 방주가 머물렀다는 터키 최대 산 ‘아라랏’에 다가선다.

아라랏 산 부근 고원 지대에는 유목민 텐트촌이 있다. 텐트에서 양이나 염소의 먹이를 모으고 나르는 것이 유목민의 일상이다. 그들의 조상이 그러했듯이 유목민에게 염소 떼는 재산 목록 1호다.

산 아래 풍경과는 사뭇 달리 아라랏 산 정상에는 삼분의 일이 만년설로 덮였고, 정상 아래 100m 지점까지는 빙벽이다. 아라랏 산 해발 3000m 계곡에 ‘도우 베야짓 방주 터’가 있다. 능선에 길게 누운 흙더미는 노아 방주가 안착한 자리라고 알려졌다. 여러 차례 지진이 나고 수천 년 세월에 걸쳐 풍화작용을 겪은 탓에 본래 모습을 잃고 형체만 남아 있다. 이곳은 인류 멸망의 현장에서도 의인(義人)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메시지인 것이다.


<사진설명> 5137m인 아라랏 산 해발 3000m 중턱에 노아의 방주 터가 있다. 길이 150m, 폭 400m 규모의 배같이 생긴 지형지물인데, 1978년에 지진이 발생하면서 유적의 내부가 드러났다. 1986년 12월 터키는 이 유적을 노아 방주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이듬해 6월 터키 정부 이름으로 노아 방주 명명식을 했다.

윤석전 목사: 아라랏 산은 산악 지대입니다. 이 지역을 다스린 우라르투 왕국의 특징을 소개해 주세요.

오택현 교수: 우라르투 왕국은 난공불락의 요새가 있는 산악 지대에 있었습니다. 위치상 특징은 배수진을 칠 수 있는 반 호수가 있다는 점입니다. 또 100m 높이 바위산이 삼면을 두르고, 1.8km 성벽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이런 천혜의 요지 덕분에 전성기 앗시리아도 감히 침략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세력을 거머쥐었습니다. 따라서 실크로드에서 가져온 수많은 부와 재물이 터키 안쪽 깊숙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 지역을 관할하는 세력들은 많은 부와 재물을 가졌기에 앗시리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가 호시탐탐 이 지역을 노렸습니다. 또 이곳은 산악 지역이어서 철기를 만들 수 있는 풍부한 지하자원이 있었습니다. 또 이 지역 주위에 가 보면 양 떼와 소 떼가 많은데, 이 점만 봐도 강대국들이 이 지역을 손에 넣으려고 얼마나 노력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터키 수도 앙카라의 아나톨리 박물관에 가면 우라르투 왕국의 빼어난 문화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윤석전 목사: 기독교인은 오랜 세월 노아 방주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노아 방주 터와 관련해 확실하게 발견한 고고학적 증거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유윤종 교수: 노아 방주를 직접 볼 수 있는 ‘고고학 발굴’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릅니다. 고대로부터 방주를 봤다는 사람도 있었고, 그와 관련한 기록들이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썩은 나무를 가지고 와서 검증하려는 시도도 했습니다. 노아의 방주를 찾는 작업은 험난합니다. 우선 히브리어로 ‘고페르(gopher)’라고 부르는 나무가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최근에는 ‘도우 베야짓(Dogu Bayazit)’이라는 곳에서 발굴한 노아 방주 터가 있는데 이것의 진위(眞僞)도 확실치 않습니다. 현재까지 노아 방주라고 입증할 만한 결정적 증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노아 방주 이야기는 우리가 믿음으로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노아 방주는 역사성에 집착하지 말고,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윤석전 목사: 메소포타미아 일대에 노아 홍수와 비슷한 전설과 설화가 많다고 하는데 그중 대표 사례를 소개해 주세요.

유윤종 교수: 홍수 이야기는 고대 근동 지역에 흔하게 전해져 내려옵니다. 심지어 우리나라에도 두루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굴한 ‘길가메시 서사시’라는 것이 있습니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수메르 점토 서판에 기록되었는데, 주전 2812년에 우루크를 통치하던 길가메시 왕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성서의 노아 홍수 사건과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배를 만드는 과정, 생물을 싣는 과정, 배의 정착 과정이 성서와 상당히 유사하게 진행되기에 당시 고대 근동에 홍수 이야기가 흔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홍수 이야기가 흔한 이유는 많은 사람이 당한 기억을 내쫓기 위한 주술(呪術) 의미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서의 홍수와는 목적이 전혀 다릅니다.

윤석전 목사: 우라르투 왕국이 있었던 반(Van) 호수의 기독교 유적은 어느 나라 것인가요?

오택현 교수: 물론 우라르투 왕국의 유적은 아닙니다. 후대에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아르메니아인의 유적입니다.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로마 콘스탄틴 황제보다 2년 앞서 주후 301년 기독교를 공인한, 세계 최초의 기독교 공인 국가입니다. 그들이 바로 반 호수 지역에 살고 있었고 그들의 특색이 담긴 교회들을 건설했습니다. 그중 가장 아름다운 ‘악타마르교회’가 남아 있습니다.

윤석전 목사: 홍수와 관련한 설화나 전설은 성경 속 노아 홍수와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유윤종 교수: 공통점은 홍수가 전개되는 과정입니다. 배를 만들고, 동물들을 배에 싣고, 홍수가 계속되고, 끝난 후 비둘기를 내어 보내서 물이 말랐는지 확인하고, 또 산에 배가 도착하는 등 과정들이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차이점은 홍수를 일으킨 동기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하자 이를 벌하려고 홍수를 일으키셨습니다. 그렇지만 길가메시 서사시에 나타난 홍수는, 인간들이 귀찮게 하자 신들이 변덕을 일으킨 데서 비롯했다고 합니다. ‘에아 신(지혜의 신)’은 이런 신들의 비밀회의 내용을 엿듣고 당대 영웅 우트나피슈팀에게 알려 주었고, 그가 배를 만들어 구원받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노아는 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의인(義人)이었기에 구원받았습니다. 이같이 길가메시 서사시가 고대 근동 지역에 주술을 목적해서 만들어진 신화(神話)였다면, 창세기 노아 방주는 하나님의 섭리와 구원을 담은 역사적인 이야기입니다. 얼핏 유사해 보이지만, 전체적인 맥락과 내용은 완전히 다릅니다.

윤석전 목사: 인간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죄를 지었고, 그 죗값은 영원한 멸망이요, 피할 수 없는 저주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도 죗값 탓에 멸망했습니다. 하지만 니느웨 백성은 죄를 회개하여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습니다. 선지자도, 예수님도, 제자들도 회개하라 말씀했고 오늘날 목회자도 계속 회개하라고 외칩니다. 이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살라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 피의 공로와 죄인임을 인정하는 회개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었습니다. 이 영원한 생명을 노아처럼 마음껏 즐기고, 예수 몰라 죄로 멸망하는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여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계속>

<윤석전 목사 탐사기행 ‘성서의 땅을 가다’ www.ybstv.com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52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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