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7-06-12 15:06:06 ]
유럽과 아시아가 만나는 요충지 이스탄불
1000년 이상 동로마제국 수도 역할 하다가
15세기 이슬람 세력에 의해 철저히 짓밟혀
유구한 문화도 일거에 무너지는 역사의 교훈 앞에
영원히 쇠퇴하지 않는 신령한 가치로 사는 성도들 되어야
- 진행 윤석전 목사 (연세중앙교회 담임)
- 오택현 교수 (영남신학대학교 구약학)
- 유윤종 교수 (평택대학교 구약학)
윤석전 목사: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고사성어처럼,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황제의 명령에 따라 이탈리아의 로마보다 훨씬 아름답게 건축되었습니다. 건물들은 옛 로마를 무색하게 할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기독교 문물을 화려하게 꽃피운 콘스탄티노플, 현재 터키 이스탄불에 남아 있는 기독교 역사를 알아보겠습니다.
이스탄불은 터키 최대 도시이자, 1600년간 동·서양 문화와 역사의 흥망이 살아 숨 쉬던 곳이다. 수 세기 동안 이스탄불은 터키의 심장부였다. 특히 아시아와 유럽 대륙을 잇는 보스포루스 해협(길이 30km, 폭 최장 3.4km, 최단 660m)은 해상교통 요지로서 터키를 세계 역사의 초점이 되게 했다. 터키는 아브라함 이래 3000여 년 지난 지금까지 이슬람 문화 속에 기독교 흔적이 남아 있어 세계인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스탄불 중심가에 있는 이슬람 사원 블루 모스크(Blue Mosque)를 지나면 아름다운 소피아교회가 나타난다. 이곳은 로마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재위 527~565)가 건립한 당대 최고의 교회다. 내부에는 교회를 예수님께 바치는 자신의 모습을 모자이크로 남겨 놓았다. 하지만 오스만 터키가 이스탄불을 지배하자 이 교회는 모스크 첨탑을 세워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했다. 그때 내부에 있는 많은 기독교 성화(聖�)를 두꺼운 회칠로 가렸다가 1931년 이후 75년간 회칠 제거 작업을 한 끝에 현재 빛을 보게 되었다.
소피아교회는 기독교 역사의 보물창고지만, 밤이 되면 어둠에 파묻힌다. 반면 옆에 있는 블루 모스크에서 뿜어내는 화려한 불빛은 사람들을 모스크 부근으로 끌어모은다. 2000년 전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곳에 생명 바쳐 복음의 씨를 뿌렸다. 그러나 터키는 현재 이방인의 나라다.
<사진설명> 터키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의 현 지명)에 있는 기독교 최고의 건축물.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긴 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537년에 건립한 당대 최고의 교회다. 오스만 터키가 콘스탄티노플을 지배한 1453년부터 1931년까지는 교회에 모스크 첨탑을 세워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했다. 당시 내부에 있는 많은 기독교 성화를 두꺼운 회칠로 가렸다. 1931년 이후 75년에 걸친 회칠 제거 작업을 끝에 현재 빛을 보게 되었다.
윤석전 목사: 이스탄불은 어떤 도시인가요?
오택현 교수: 이스탄불은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장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형상 이스탄불은 보스포루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유럽 대륙과 아시아 대륙이 마주 보고 있습니다. 또 두 대륙이 보스포루스 대교로 연결돼 이스탄불 사람들은 아시아 대륙에서 유럽 대륙으로 출퇴근하며 쉽게 이 지역을 오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스탄불을 주목하는 것은 예루살렘, 로마와 더불어 기독교 3대 역사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공인한 후에 330년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틴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자기의 이름을 따서 이곳을 콘스탄티노플이라고 개명하여 기독교 역사를 시작하게 됩니다. 395년에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분열하자 이스탄불은 동로마 제국의 수도로 1400년대까지 1000년간 비잔틴 문화를 이끌면서 기독교 중심 도시 역할을 합니다. 그러다 1453년 오스만 제국 술탄 메흐메트 2세의 침입을 받아 대격전 끝에 동로마 제국의 영광이 끝납니다. 이후 콘스탄티노플을 이스탄불로 이름을 바꾸어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일본인 소설가 시오노 나나미(80)가 지은 책 『콘스탄티노플 함락』(2002, 한길사)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현재 이스탄불은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도시이며 이슬람 문화 속에 찬란한 기독교 문화가 남아 있습니다.
윤석전 목사: 기독교인에게는 동방정교회의 수장격인 콘스탄티노플이 갖는 의미가 큰대요. 당시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한 비잔틴 제국을 자세히 소개해 주세요.
유윤종 교수: 비잔틴 제국(Byzantine Empire)은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긴 330년 시작해 멸망하던 1453년까지 스스로 ‘로마’라고 불렀습니다. 후대에 역사가들이 서로마와 구분하려고 원래 지명인 ‘비잔틴’ 이름을 따서 ‘비잔틴 제국’ 또는 ‘동로마 제국’이라고 불렀습니다. 비잔틴 제국의 특징을 살펴보면, 정치는 로마의 이데올로기를 빌려 오고, 종교는 기독교를 선택하고, 문화는 그리스풍을 따랐습니다. 또 비잔틴의 건축 양식은 지붕이 둥근 돔(dome) 형입니다. 고대 그리스풍과 사산조 페르시아(Sasan dynasty)풍을 흡수, 융합하여 생동감이 넘칩니다. 따라서 비잔틴 제국의 특징은 기독교 색채와 그리스 헬레니즘 문화의 융합입니다.
윤석전 목사: 비잔틴 제국의 종교인 동방정교회(東方正敎會)에 관해 말씀해 주세요.
유윤종 교수: 동방정교회는 기독교나 로마 가톨릭보다 친숙하지 않지만, 기독교 3대 세계 종파(宗派) 중 하나입니다. 자기들이 정통 교회(Orthodox Church)라고 생각하여 ‘동방’처럼 이름 앞에 무엇을 붙이기를 싫어합니다. 중요한 특징은 황제가 권력을 하늘로부터 받았다고 여겨 사제(司祭)의 역할까지 한다는 점입니다. 황제가 교리(敎理) 결정이나 공의회에 직접 참여하여 의견을 내고 공의회에서 결정된 사항을 세속화했습니다. 성경은 ‘70인역’을 사용합니다. 동방정교회는 율리우스력(로마의 시저인 율리우스가 B.C. 45년에 제정한 달력)을 사용하기에 크리스마스를 1월 7일에 지냅니다. 콘스탄티노플은 동방정교회 핵심인 그리스정교회의 수장(首長)이 있던 곳입니다. 콘스탄티노플이 멸망한 다음에는 러시아정교회가 동방정교회의 종주국이 되었습니다.
윤석전 목사: 기독교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약속과 믿음을 갖는데, 동방정교회는 황제가 직접 하늘로부터 권력을 받았다고 주장하니 결과적으로 우리의 믿음과 그들의 믿음은 많은 차이가 나는군요.
이제 이스탄불에 남아 있는 기독교 문화를 살펴보기 위해 고고학 박물관으로 가 보겠습니다.
이스탄불의 고고학박물관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박물관으로 인정받고 있다. 세계 최초 평화협정문인 ‘카데시 협약문서’를 비롯해 오스만제국 지배 아래 있던 아나톨리아(소아시아)에서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세계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열왕기하 20장 20절을 확인해주는 ‘실로암 비석(石碑)’은 고대 히브리어 비문으로는 세계 최초로 발견됐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흔적이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 안에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다. 터키는 여전히 기독교 역사의 보물창고다.
“피(血)로 읍을 건설하며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민족들이 불탈 것으로 수고하는 것과 열국이 헛된 일로 곤비하게 되는 것이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말미암음이 아니냐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합2:12~14).
<사진설명> 세계 최초로 발견된 고대 히브리어 비문이다. 비문 내용이 열왕기하 20장 20절 말씀을 실증해주어 성경 연대 연구에 큰 의미를 띤다. 히스기야 왕이 앗시리아의 침략에 대비해 물이 없는 예루살렘에 수로를 끌어들이려고 성 밖 기온 샘에 터널을 뚫어서 성안과 터널을 연결해 그 물이 실로암 연못에 연결되는 과정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현재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윤석전 목사: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있는 ‘실로암 비석’이 성경 연대 연구에 큰 의미가 있다고 하는데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오택현 교수: 실로암 비석은 1880년에 어느 소년이 이스라엘 실로암 연못에서 목욕하다가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그전까지 발견된 유물 중에는 고대 히브리어로 쓰인 것이 하나도 없었기에 구약학계는 무척 놀랐습니다. 또 비문(碑文)의 내용을 분석해 볼 때 열왕기하 20장 20절 말씀을 정확하게 실증(實證)해주어서 그 의미가 큽니다. 히스기야 왕이 앗시리아의 침략에 대비하고자 성 밖 기온 샘의 물을 성안 실로암 연못으로 끌어들이는 과정이 기록돼 있습니다. 실로암 비석에는 기온 샘에 터널을 뚫어서 성 안과 터널을 연결해 그 물이 실로암 연못에 연결되는 과정을 자세히 묘사했습니다. 이 비석이 왜 예루살렘이 아니라 이스탄불에 있는지 궁금할 것입니다. 1890년에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어느 외국인이 귀중한 비석인 줄 알아채고 그것을 떼어 내서 골동품 상인에게 팝니다. 당시 성지를 다스리던 오스만 터키 관리가 그 사실을 알고 탐문 수사를 벌여 골동품 상인을 잡고 실로암 비석을 압수합니다. 예루살렘에 있으면 또 도둑맞을 염려가 있어 안전한 곳에서 보관하려고 이스탄불로 가져가 박물관에 보관했습니다. 한때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에 전시했는데 많은 이가 이스라엘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자 터키 정부에서는 일반인에게 공개하지 않고 박물관 안쪽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윤석전 목사: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에서 눈여겨 볼 만한 유적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오택현 교수: 히타이트 왕 무와탈리 2세(재위 B.C.1295~B.C.1272)와 이집트 왕 람세스 2세(재위 B.C.1279~B.C.1213) 사이에 벌어진 카데시 전투 이후 맺은 평화 협정이 박물관 안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세계 최초의 평화 협정이기에 중요합니다. 사본은 뉴욕 UN본부 1층에 있습니다. 히타이트 통치 아래 있던 아무르 족속이 이집트로 도망하자 이집트는 이들을 보호하려 하고, 히타이트는 되돌려 보내라고 합니다. 줄다리기 끝에 주전 1274년 무와탈리 2세와 람세스 2세 사이에 카데시 전투를 벌입니다. 서로 피해가 매우 컸기에 전쟁 이후 두 국가는 동시에 쇠락의 길을 걷습니다.
윤석전 목사: 현재도 많은 성지 순례객이 이스탄불에 가는데 꼭 봐야 할 유적을 소개해 주세요.
오택현 교수: 가장 중요한 곳은 소피아교회입니다. 또 아름다운 성화가 있는 코라 교회와 역사와 전통이 깊게 밴 이레인 교회도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곳입니다. 많은 사람이 성지 순례하는 장소인 히포드럼에 우리나라 경복궁과 같은 톱카프 궁전과 돌마바흐체 궁전이 있습니다. 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만든 지하 물 저장고가 있는데 크기나 아름다움이 경탄을 자아냅니다. 꼭 추천하고 싶은 곳은 이스탄불의 고고학박물관입니다. 이 박물관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그리스, 로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역의 유적이 있고 기독교 배경을 알 수 있는 유적이 많습니다. 성경 배경을 생각하면서 둘러보면 성경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진설명> 소피아교회 남서쪽 출입문 상단에 있는 성화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그림 왼쪽 사람)가 예수님께 소피아교회를 바치는 모습과 콘스탄티누스 황제(그림 오른쪽 사람)가 새로운 도시 콘스탄티노플을 바치는 모습을 모자이크한 작품이다.
윤석전 목사: 우리나라에도 동방정교회가 있는지, 기독교와 차이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유윤종 교수: 한국에도 동방정교회가 있습니다. 19세기 말엽 러시아정교회가 동방정교회를 퍼뜨렸습니다. 그 후 그리스정교회에서도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현재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에 성도가 1만 명 정도 있다고 합니다. 로마 가톨릭이나 기독교와 차이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역사적 조항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 세계 3대 종파 중 하나이기 때문에 역사적 차이점을 인정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합니다.
윤석전 목사: 우리는 왜 콘스탄티노플이 500년간 이교도에게 짓밟히고 방치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이 죄악을 범해 바벨론에 멸망한 것처럼, 이곳도 그같이 유추해보기도 합니다. 하나님 앞에는 인간의 죄악 된 문명이 존재할 수 없고, 죄악 된 도전이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영원히 남는 것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우리 인생을 쇠퇴할 것에 사용하지 말고, 쇠퇴하지 않는 영원한 것을 향해서 값지게 살아갑시다.
<계속>
<윤석전 목사 탐사기행 ‘성서의 땅을 가다’는 www.ybstv.com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531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