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와 함께하는 ‘성서의 땅을 가다’(75)] 비잔틴 시대 건축의 최대 걸작, 소피아교회

등록날짜 [ 2017-06-20 14:00:50 ]

돔 양식으로 세계 건축사에 획을 그은 건축물
교회 안의 벽화들도 세계 최고 수준

15세기 이슬람에 의해 점령당해 두꺼운 회칠로 덮히고 이슬람사원 됐지만
20세기 터키의 복원 노력으로 다시금 아름답고 신비한 모습 자아내


윤석전 목사: 튼튼하고 정교하게 지어진 건물은 세월이 갈수록 더욱 가치 있고 빛납니다. 콘스탄티노플은 적들의 침략을 많이 받아 건물이 대부분 파괴됐지만 소피아교회만은 얼마나 정교하고 아름답게 지어졌는지 적들도 손을 못 대고 그대로 남겨 두었습니다.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멋을 지닌 소피아교회를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터키 이스탄불은 비잔틴 시대(Byzantine Empire)에 ‘콘스탄티노플’이라 불렀다. 콘스탄티노플은 여러 면에서 로마와 비슷했다. 1124년간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기에, 오스만 튀르크의 손에 들어가 수백 년 가까이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시내 곳곳에는 초기 기독교 문화를 보여 주는 걸작품이 가득하다. 그중 소피아교회는 비잔틴 건축 양식의 최고 작품이라고 평가받는다. 지금은 박물관 현판을 붙이고 누구에게나 개방돼 자유롭게 방문해 관람할 수 있다.

15세기 중엽 오스만 튀르크가 콘스탄티노플을 지배한 후 소피아교회는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mosque)로 용도가 바뀌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코란 금문자가 보여 주듯, 교회 내 아름다운 성화(聖)와 기독교 상징물은 이슬람 문양에 자리를 내주고 두꺼운 회칠 속으로 사라졌다. 교회 중앙엔 이슬람 제단이 세워졌다. 1935년 박물관으로 변모하면서 성화들은 회칠을 벗고 제 모습을 드러냈다. 회칠 밑에서 건져 낸 작품들을 통해 순례자들은 비잔틴 시대 기독교 예술품의 아름다움을 깊은 감동 속에 만날 수 있다. 치열했던 전쟁의 역사를 견뎌 낸 소피아교회는 자신의 역할을 되찾아 가고 있다.

<사진설명> 주후 537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완공한 소피아교회. ‘소피아’는 ‘신성한 지혜’를 뜻하며 ‘예수’를 가리킨다. 하지만 1453년 오스만 튀르크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 모스크로 사용된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그때 십자가와 성화는 사라지고, 코란 금문자와 이슬람 유산으로 채워졌다. 1923년 터키가 독립국이 된 후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회칠 속에 가려진 성화를 복원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윤석전 목사: 소피아교회는 언제 누가 지었나요?

오택현 교수: 콘스탄티누스 황제(재위 306∼337)는 주후 330년 로마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겼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그곳을 ‘비잔티움’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후의 왕들은 콘스탄티노플을 발전시키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중 가장 많이 공들인 사람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재위 527~565)입니다. 그는 교회 건축에 재능 있고, 성지(聖地)에 조예가 깊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지은 건축물은 베들레헴 ‘예수 탄생 교회’, 시내산 ‘케더린 수도원’, 에베소 ‘사도 요한 기념교회’ 등이 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할 때는 ‘어머니보다 더 아름다운 딸을 만든다’는 목표를 정했습니다. 어머니는 로마를, 딸은 콘스탄티노플을 가리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아름다운 콘스탄티노플을 건축하고자 가장 심혈을 기울인 건축물이 소피아교회입니다. 자기의 재능에 주위 사람들의 뛰어난 기술을 더해서 교회를 지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537년, 5년 만에 소피아교회를 완공했습니다. 짧은 기간에 어떻게 이 어마어마한 교회를 지었는지 지금까지도 불가사의(不可思議)합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당대 최고의 교회를 지은 후 헌당식에서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솔로몬이여! 내가 그대를 이겼소!” 예루살렘 성전보다 훨씬 더 화려하고 큰 성전을 지었다는 성취감을 이같이 표현했습니다. 이 교회는 돔 양식 건축물로 세계 건축사에 획을 그었습니다. 교회 안 모자이크 벽화는 세계 최고 작품이라 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윤석전 목사: 동로마제국(Eastern Roman Empi-re)이 오스만 튀르크에게 멸망당할 당시 소피아교회의 운명은 어떻게 됐는지요?

오택현 교수: 오스만 튀르크의 술탄 메흐메트 2세(재위 1451~1481)는 콘스탄티노플을 53일 동안 집중해서 공략합니다. 난공불락을 자랑했던 콘스탄티노플의 삼중 성벽이 무너지고 완전히 함락되자 동로마 제국은 역사의 장에서 사라집니다. 그 후 콘스탄티노플은 이스탄불로 개명하고 소피아교회의 운명도 크게 달라졌습니다. 술탄 메흐메트 2세가 동로마제국을 점령한 후 가장 먼저 찾은 곳이 소피아교회였습니다. 그 장엄함과 아름다움에 도취해 한동안 소피아교회에 머물다가 명령했습니다. “이 교회를 무너뜨리지 말고 이슬람 사원으로 바꿔라.” 이후 소피아교회 내의 기독교 상징인 십자가는 모두 사라지고, 이슬람을 상징하는 ‘초승달’이 그 자리를 메웁니다. 아름다운 성화들은 모슬렘이 칠한 두꺼운 회칠 속에 갇힙니다. 이슬람의 메카(이슬람교 성지)를 나타내는 방향 표시와 뜻 모를 수많은 이슬람 문양이 소피아교회를 가득 채웁니다. 이렇게 소피아교회는 이슬람 사원으로 탈바꿈해 500년간 불행한 역사를 지속했습니다. 그러다가 1931년 오스만 튀르크 멸망 후, 터키 공화국 초대 대통령인 아타튀르크(임기 1923~1938)가 지시합니다. 소피아교회를 박물관으로 개조하고, 두껍게 발랐던 회칠을 제거하라고. 8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회칠 제거작업이 진행되고 있고, 그 결과 아름다운 성화가 하나씩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윤석전 목사: 왜 이슬람 최대 사원인 블루 모스크(Blue Mosque)를 소피아교회 맞은편에 세웠을까요?

유윤종 교수: 1609년 술탄 아흐메드 1세가 소피아교회를 방문했을 때, 교회의 웅장함에 놀랐습니다. 그가 소피아교회를 압도하는 모스크를 지으라고 명령하여 건너편에 ‘블루 모스크’를 건축하게 됐습니다. 블루 모스크에 신비감을 더하려고 벽에 푸른색 타일을 붙였습니다. 빛이 벽에 비치면 수많은 타일에서 은은한 푸른빛을 발해 이슬람 최고의 모스크로 여겨집니다. 이슬람 문화가 비잔틴 문화보다 뛰어나다는 점을 증명하려 했지만, 가짜가 진짜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윤석전 목사: 교회를 모스크로 사용할 바에야 허물고 새로 짓는 편이 나을 텐데, 굳이 소피아교회를 모스크로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택현 교수: 고대 세계에서 전쟁은 신(神)과 신(神)의 전투로 여겼습니다. 이긴 국가의 신이 피정복 국가의 신을 이긴 셈이 됩니다. 따라서 피정복 국가의 신전(神殿)은 승전국의 신전으로 바뀝니다. 그런 일련의 과정은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는 지배의 수단으로 사용됩니다. 터키에서는 이슬람이 기독교를 점령한 후, 이슬람 신이 비잔틴 신보다 우월하다는 점을 증명해 보이려고 소피아교회를 모스크로 개조했습니다.

‘신성한 지혜’를 뜻하는 소피아교회는 콘스탄티누스대제가 325년 창건했다. 532년 대폭동으로 불타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5년여 만에 교회를 개축하여 비잔틴 시대 최대 규모로 건립했다. 전란(戰亂)의 역사는 교회 안을 이슬람 금문자와 각종 이슬람 문화 유산으로 바꿔 놓았다. 2층에는 기독교 성화들이 남아 있어 그 아름다움을 빛내고 있다. 당대 최고 걸작 <디시스(Deesis)>는 심판 날 예수께 자비를 베풀어 주시길 간청하는 그림이다. 천장 돔에 그린 <아기 예수와 마리아>도 회칠한 벽 속에서 살아난 걸작품이다. 위대한 황제들이 마리아의 품에 안긴 예수께 콘스탄티노플과 소피아교회를 바치는 모습을 그렸다. 현재 소피아교회는 이슬람국가 터키의 박물관이지만 그 안에는 비잔틴 시대에 위대했던 기독교 국가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역사가 자리 잡고 있다.

<사진설명> 1261년 제작된 소피아교회 2층에 있는 성화 <디시스> 모자이크. ‘디시스’는 간청, 애원을 뜻한다. 왼쪽에 마리아를, 중앙에 예수님을, 오른쪽에는 침례 요한을 그려 놓았다. 훼손 상태가 심각해 마리아는 얼굴과 왼쪽 어깨 부분만 남아 있고 예수님과 침례 요한은 상반신 부분이 남아 있다.

윤석전 목사: 소피아교회는 아름답기로 유명한데 그 예술적 가치는 어떠한지요?

유윤종 교수: ‘소피아(Sophia)’는 우리말로 ‘지혜’를 뜻합니다. 소피아교회는 ‘신성한 지혜’로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건물이 지닌 예술적인 의의는 비잔틴 건축과 미술의 최고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비잔틴 건축 양식은 ‘바실리카(basilica)’입니다. 바실리카는 로마에서 대중을 모으는 공간을 말합니다. 대중을 수용하려면 넓은 공간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양쪽에 기둥을 높게 세워 넓은 공간을 확보해야 합니다. 이 점이 바로 바실리카 양식의 특징입니다. 기독교가 로마에 포교(布敎)된 후 교회 건물의 기본양식은 바실리카 양식을 따릅니다. 소피아교회는 바실리카 양식에 동양의 중앙집중형을 가미해 비잔틴 문화의 독특한 예술 가치를 자아냅니다. 또 건물 내부 모자이크 양식은 사람들이 ‘여기가 하나님의 집이구나’라는 신비감을 느낄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예술적 가치를 제공합니다.

윤석전 목사: 소피아교회 안에 있는 성화들을 소개해 주세요.

오택현 교수: 이슬람의 회칠이 벗겨지고 아름다운 성화들이 햇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소피아 교회에 가면 그 성화들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습니다. 그중 네 작품을 소개하겠습니다. 첫째는 돔 맨 꼭대기에 있는, 마리아 품에 안긴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입니다. 그림을 보려면 고개를 들고 쳐다봐야 하는데 주변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면서 그림을 보면 신비스러운 장면이 연출됩니다. 하늘에 계신 예수께서 땅에 있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며 내려다보는 느낌을 줍니다. 그 그림 옆에는 성경에서 그룹(천사)이라고 표현한 형상 넷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슬람은 살아 있는 형상을 그리는 것을 금지합니다. 따라서 천사 그림을 국적 불명의 이상한 모양으로 변형해 두었습니다. 너무 이상하게 변형해서 회칠을 벗겨 내도 복원이 잘 안 됩니다. 셋째 그림은 소피아교회 2층에 있는 작품인데, 중앙에 예수님을, 오른쪽에는 침례 요한, 왼쪽에 마리아를 그려놓았습니다. 많이 파괴되었지만 매우 아름다운 성화입니다. 마지막은 남서쪽 입구에 있는 동방박사들이 예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바치듯,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콘스탄티노플 도시를,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소피아교회를 예수께 봉헌하는 성화입니다. 남서쪽 입구에 있습니다.

윤석전 목사: 터키인들이 한국을 ‘형제의 나라’로 여기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오택현 교수: 터키는 6.25 전쟁 당시 우리를 도와준 유엔(UN) 16개국 중 하나였습니다. 미국, 영국 다음으로 1만 4936명이라는 병력을 보내 주었는데 그중 741명이 전사했습니다. 그래서 터키는 우리를 혈맹, 형제의 나라라고 말합니다. 그런 인연으로 평소 한국 사람들을 좋아하는데, 최근에는 한국인들을 더 좋아합니다. 2002 한일 월드컵축구대회에서 3·4위전을 할 때 승패를 떠나 터키를 열광적으로 응원해주고, 경기가 끝난 다음에도 두 나라 선수들이 어깨동무하며 형제애를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터키 어느 지역을 가든지 한국 사람이라 하면 따뜻하게 대해 줍니다.

윤석전 목사: 소피아교회를 박물관으로 사용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유윤종 교수: 오스만 튀르크 제국이 무너진 다음, 터키는 1923년 독립국이 됩니다. 독립국이 되자 그리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이 소피아교회의 반환을 요구합니다. 터키는 정치면에서 유럽이 되고 싶어 해서 유럽인의 비위를 맞춰야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피아교회 안에서 종교활동을 금하고 기독교 성전이나 이슬람 모스크가 아닌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윤석전 목사: 다음 시간에는 이스라엘의 성서의 땅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신약성경뿐 아니라 구약성경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그곳, 구약성경의 보고,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고 일하셨던 장소로 가겠습니다.

<계속>

<윤석전 목사 탐사기행 ‘성서의 땅을 가다’는
www.ybstv.com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532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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