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7-08-22 15:34:25 ]
하나님을 섬길 땐 굳건했던 예루살렘 성전
우상숭배와 죄악 만연할 때 처절한 심판과 수난의 역사 겪어
하나님이 약해서 성전이 무너진 것 아니라
모진 채찍질을 해서라도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아오기 원하셔
윤석전 목사: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저주와 질고와 질병과 죄악을 담당하시고, 인류를 구원하시려 온갖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예루살렘 성전도 고난을 이기고 승리했습니다. 예루살렘 고난의 현장인 성전산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 보겠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성전산(聖殿山, Temple Mount)은 전쟁으로 인한 아픈 역사가 끊임없이 이어진 고난의 산이다. 무장한 군인들을 쉽게 볼 수 있는 성전산 곳곳에는 고도로 발달한 무기와 기술을 사용한 전쟁의 흔적 또한 선명하게 남아 있다. 6일 전쟁(1967년 6월 5~10일 아랍 연맹과 이스라엘 사이의 전쟁) 당시 시온 문(Zion Gate)은 치열한 격전지였는데 벽면에 난 총탄 자국들이 당시 상황을 입증한다. 눈물교회의 언덕으로 향했다. 이곳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아무리 일러줘도 믿지 않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통탄하며 부르시고 울었던 곳이다. 예수님이 예언하신 대로 성전은 무너졌다(마24:2;눅21:6;막13:2). 1, 2차에 걸쳐 성전을 재건했지만 A.D. 70년에 로마군이 완전히 파괴했다. 그 후 이스라엘 민족은 자기 나라에서 내쫓겨 1800년 동안 세계를 떠돌아다녀야만 했다. 대신 성전산에는 이슬람 모스크가 우뚝 서 있다. A.D. 692년 오스만 터키가 세운 모스크는 유대인 출입이 금지된 장소다. 이곳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 했던 번제 바위가 있는데 모슬렘은 이 바위를 이슬람교 창시자 무함마드(Muhammad, A.D.570~A.D.632)의 승천 터로 믿고 있다.
<사진설명> 성전산 전경. A.D. 70년 헤롯성전이 파괴된 후 이스라엘 민족은 자기 나라에서 내쫓겼다. 이후 성전산에는 이슬람 모스크(황금돔으로 된 사원)가 들어섰다. 이미 자리 잡은 이슬람을 밀어낼 수 없었던 이스라엘 민족은 차선책으로 헤롯성전 지성소로 이어지는 지하통로를 찾아내 현재 유대인들의 최고 기도처로 삼고 있다.
<사진설명> 눈물교회에서 바라본 성전산
<사진설명> 겟세마네 동산에서 성전산을 바라보는 윤석전 목사
<사진설명> 헤롯성전 복원도
윤석전 목사: 유대의 역사가 항상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이어진 이유가 궁금합니다.
왕대일 교수: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신앙의 건강함과 병약함을 재는 척도였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정신이 투철할 때는 예루살렘이 평안했고, 반대로 종교 혼합주의에 빠져 하나님을 예배하기보다 이방신을 좇을 때는 심판과 고난을 받았습니다. 예루살렘도 마치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고난받는 종의 역할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사실은 그곳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이 죄악을 지었기 때문이라는 깨달음 속에서 예루살렘의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습니다.
윤석전 목사: 예루살렘 성전의 수난 역사를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오택현 교수: 솔로몬 아들인 르호보암왕 5년에 이집트왕 시삭이 예루살렘 성전에 쳐들어와서 금은보화를 빼앗습니다. 그리고 남유다 아사왕(재위 B.C.911~B.C.870)은 북이스라엘 바아사(재위 B.C.908~B.C.885)와 치른 전쟁에서 승리하려고 아람왕 벤하닷에게 성전에 있는 보물을 조공으로 바쳤습니다. 왕정시대의 성전 수난사 중 가장 슬픈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곳에서 우상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특히 므낫세왕(재위 B.C.687~B.C.642)을 비롯한 여러 왕이 앗수르의 일월성신 제단을 그곳에 세워 놓고 우상인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이슬람 모스크가 위용을 과시하지만, 이곳은 여전히 옛 성전의 요람이다. 이미 자리 잡은 모슬렘 제단을 밀어낼 수 없었던 이스라엘 민족은 땅속으로 들어가는 차선책을 세웠다. 1967년 이후에 실시한 지하 발굴 작업에서 성전 지성소로 이어지는 통로를 찾아냈다. 현재 이곳은 유대인들의 최고 기도처가 되었다. 위대한 왕 다윗의 별이 빛을 발하는 지하 성전 통로. 이렇게 그들은 땅속에서나마 성전을 되찾았다.
윤석전 목사: 구약시대 성전 수난의 역사 중 가장 대표적인 예는 바벨론이 예루살렘 성전을 잔인하게 몰락시킨 것입니다. 그토록 사랑하던 성전을 이방인이 파괴했을 때 이스라엘 민족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오택현 교수: 유다 백성은 성전이 파괴되기 전 성전 안에서 여러 우상을 섬기고 잘못된 행동을 했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너희들이 만일 이런 행동을 계속하면 나라가 멸망할 것이다”라고 예언했습니다. 하지만 유다 백성은 ‘성전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한 장소이기 때문에 아무리 잘못을 저질러도 절대 망하지 않는다’고 잘못 생각했습니다. 이들을 향해 선지자들은 선포했습니다. “너희가 잘못하면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무너뜨려서라도 너희 잘못을 깨닫게 하시고 심판하실 것이다.” 선지자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져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고, 성전은 비참할 정도로 파괴됩니다.
이런 현실을 바라본 유다 백성의 정신적 충격이 실로 컸습니다. 고대 전투에서는 두 나라가 싸우다 승패가 결정되면, 승국의 신이 패국의 신보다 강해서 이겼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바벨론 신의 마르둑(Marduk)이 이스라엘의 하나님보다 강해서 전쟁에서 이겼고, 성전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성전이 무너진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회개케 하려고 하나님 스스로 고난을 받으신 것이었습니다.
윤석전 목사: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가 된 이후 2500년이 흘렀습니다. 예루살렘은 여전히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지인데, 성전 파괴 후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떤 인식 전환을 맞나요?
왕대일 교수: 예루살렘은 B.C. 587년 느부갓네살 군대, A.D.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 군대에 의해 두 차례 붕괴됩니다. 이때를 전후해 정신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레미야나 에스겔과 같은 선지자들은 예루살렘의 패망을 ‘하나님 백성의 죽음’이라고 불렀습니다. 예루살렘이 무너져 이스라엘이 죽고 난 후에 하나님 백성의 부활을 말합니다. 예루살렘의 패망은 단순히 나라가 무너지고 회복된다는 데만 의미를 두지 않고 옛 백성의 죽음에서 새 백성이 부활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무너진 다음, 소망이 거기에서 자라납니다. 에스겔서에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겔37:5)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예루살렘이 패망한 후에 ‘하나님의 생기로 부활한다’는 소망을 가졌습니다. 그것이 현대사로 연결되면서 ‘메시아가 올 것이다, 메시아가 오는 날 예루살렘이 회복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패망과 부활은 하나님 백성의 죽음과 부활로 깨달아야 합니다.
윤석전 목사: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도 예루살렘은 많은 수난을 겪었는데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오택현 교수: B.C. 587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바벨론에 의해 무너진 후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은 바벨론이 멸망한 B.C. 539년입니다. 50여 년간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된 상태로 방치되었습니다. 그 이후 페르시아 시대에 1차, 2차에 걸쳐 귀환합니다. 2차로 귀환한 스룹바벨과 학개와 스가랴의 지도를 받은 사람들이 B.C. 515년에 2차 성전을 완성합니다. 예루살렘 2차 성전은 페르시아 시대와 헬라 시대에 유대인의 신앙 구심점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이 성전이 헬라왕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재위 B.C.175~B.C.164)의 종교탄압 정책 탓에 다시 수난을 당합니다. B.C. 167년에 성전 앞마당에 제우스 신을 세워 놓고 유대인이 금기시하는 돼지고기를 쌓아 놓습니다. 제우스 신에게 절하는 자는 살리고 거부하는 자는 죽였습니다. 이때 많은 유대인이 사자 굴에 들어가면서까지 자신의 신앙을 지켰던 다니엘의 메시지를 읽으면서 신앙을 지켰습니다. 당시 마카비(Maccabee)는 혁명을 일으켜서(마카비 혁명, B.C.166) 헬라 사람들을 몰아내고 마침내 예루살렘을 수복했습니다. 그 후 성전을 정화하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것을 ‘하누카(Hanukkah)’라고 부르는데 신약성경에 수전절(修殿節)로 나옵니다(요10:22).
윤석전 목사: 예루살렘 성전의 수난이 유다 백성에게 어떤 교훈을 줬는지 궁금합니다.
왕대일 교수: 예레미야 26~28장에 예루살렘 패망을 전후해서 예레미야와 하나냐, 두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예루살렘 운명을 놓고 각기 다른 하나님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냐는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지켜 주실 것이다. 바벨론에 끌려가 있는 유다 백성을 하나님이 돌아오게 할 것이다”(렘28:1~4)라고 전했고, 예레미야는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치는 것을 하나님의 몽둥이, 심판의 채찍으로 받아들여라. 예루살렘의 패망이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렘27:1~11)라고 예루살렘의 무너짐을 예언했습니다. 그 당시 예레미야는 백성에게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난 후에 ‘하나냐는 거짓 예언자고, 예레미야는 참선지자였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또 하나는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에 유다 백성은 나라를 잃고, 백성을 잃고, 주권을 잃어 떠도는 삶을 삽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단 한 가지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습니다. 주권을 잃은 백성이 돼 떠돌아다니며 믿음의 고향을 되찾자는 운동을 전개한 유다 백성의 뿌리는 19~20세기가 되면서 시온주의(Zionism, 유대인의 민족 국가 건설을 위한 민족주의 운동)로 퍼졌습니다.
윤석전 목사: 헬라왕 안티오쿠스 4세는 신앙을 지킨 유대인들을 어떻게 탄압했나요?
오택현 교수: 제우스 신에게 절하기를 거부하고, 돼지고기 먹기를 거부했던 유대인들을 붙잡았습니다. 그들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가죽을 벗긴 후에 뜨겁게 달군 가마솥에 던져서 죽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능지처참(陵遲處斬)이라고 하지요. 손가락부터 팔목까지 모든 마디를 다 자르기도 했고, 짐승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잔혹한 일도 있었습니다. 이보다 수백 년 전에 쓰인 다니엘서에는 이러한 탄압이 있다고 할지라도 순교할지언정 배교하지 말라고 강하게 말합니다.
윤석전 목사: 기독교인으로서 시온주의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세요.
왕대일 교수: 시온주의는 19~20세기에 일어난 정치운동입니다.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긍정적으로는 영적 고향을 찾자는 것입니다. 본향을 찾아가는 것이야말로 신앙의 바탕입니다. 성전 중심의 생활을 한다는 것은 영성의 좋은 토양이기에 그런 점에서는 시온주의를 좋게 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조심해야 합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고향 찾기 운동입니다. 구약이 전 세계인의 성경이 된 것은 유대교 때문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이 구약성경을 전 세계인 가슴에 안겨 주었습니다.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산상수훈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5:9)라고 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로 불립니다. 시온으로 돌아가서 우리만 살겠다 하지 말고 거기에 있는 다른 소수 민족과 원주민들이 화평케 하는 삶을 살게 될 때 시온주의는 좀 더 좋은 꽃을 피우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런 점을 아직 이루지 못했기에 저는 우려 섞인 눈으로 시온주의를 바라본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윤석전 목사: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택해서 이루고 싶은 섭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을 따르지 아니하고 우상숭배를 하며 하나님을 대적하고 원망하다가 항상 멸망과 저주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축복하시고 책임지려 하시는데, 하나님을 떠나 반대편에 섰기 때문에 벌어진 당연한 사건입니다. 어떤 어려움과 고통이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 먼저 잘 살피고 하나님께 돌아가면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겁니다. 속히 하나님 안에서 해결 받고 영광의 웃음꽃을 피우길 바랍니다.
<계속>
<윤석전 목사 탐사기행 ‘성서의 땅을 가다’는 www.ybstv.com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540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