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와 함께하는 ‘성서의 땅을 가다’(93)] 축복과 저주를 가르는 세겜 땅

등록날짜 [ 2018-01-03 15:40:38 ]

여호수아가 가나안에 입성하자
모세의 지시대로 그리심산과 에발산을 향해 축복과 저주를 각각 선포해


윤석전 목사: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에게 축복하십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의 공로로 구원받지만, 축복은 순종하여 행함으로 받는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축복을 받느냐, 저주를 받느냐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사느냐로 결정됩니다. 세겜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축복과 저주가 무엇인지 확실히 가르쳐 줍니다. 이번 호에서는 세겜으로 가 보겠습니다.

예루살렘 북쪽 그리심산 자락에 자리 잡은 도시 세겜으로 향했다. 세겜은 요르단강 서안 지구(West Bank)에서 가장 크고, 테러 중심지여서 유대인과 모슬렘 사이에 유혈 분쟁이 심한 곳이다. 현재 주민 3만여 명이 살고 있다. 그곳에서 축복과 저주의 산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그리심산은 축복받은 산답게 푸른 숲이 무성하고, 저주받은 에발산은 나무 한 그루 없이 황량하다. 여호수아는 그리심산과 에발산 사이에서 모세 율법을 낭독했다. 그 후 그리심산을 향해서는 축복을, 에발산을 향해서는 저주를 선포했다. 세겜은 축복과 저주를 가르는 구약 시대 최초의 퍼포먼스가 펼쳐진 무대다.

<사진설명> 그리심산에서 바라본 세겜 전경  세겜은 그리심산과 에발산을 어깨처럼 양쪽에 둔 분지다. 여호수아는 세겜을 점령한 후 모세가 명한 대로 그리심산과 에발산 사이에서 하나님께 예배했다. 그리심산을 향해서는 축복을, 에발산을 향해서는 저주를 선포했다. 수천 년이 지난 현재에도 그리심산은 축복받은 산답게 푸른 숲이 무성하고, 저주받은 에발산은 나무 한 그루 없이 황량하다. 

윤석전 목사: 세겜은 이스라엘 가나안 정복 시대에 어떤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오택현 교수: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모압 평지에 모였습니다. 신명기 27장을 보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반드시 이렇게 살아라’ 하는 명령이 기록돼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세겜에 이르면 여섯 지파는 그리심산에 서고, 나머지 여섯 지파는 에발산에 서라고 하셨습니다. 그 후 레위 사람이 그리심산을 향하여 ‘하나님 말씀을 지키면 축복이 있을지어다’라고 선언하면 온 지파가 ‘아멘’으로 화답하고, 에발산을 향해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선언하면 온 지파가 ‘아멘’으로 화답하는 예배를 드리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명령은 여호수아 8장에 그대로 실현됩니다. 그 후로 그리심산은 축복의 산, 에발산은 저주의 산으로 알려졌습니다. 두 산이 마주 보고 있는데 그리심산은 나무가 있는 반면 에발산은 없어서 대조됩니다.

윤석전 목사: 사사기를 보면 세겜을 언급할 때 바알이 자주 등장합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신 바알을 어떻게 숭배했다는 것인지 설명해 주세요.

왕대일 교수: 사사기 9장에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 나옵니다. 아비멜렉은 기드온의 세겜 출신 후처 소생입니다. 아비멜렉은 기드온이 죽고 난 후 자신이 왕이 되겠다는 잘못된 생각을 품습니다. 외가 세겜에 가서 어미의 형제에게 자기 속셈을 말합니다. 그러자 세겜 사람들은 “그는 우리 형제라” 하고, 친척들은 아비멜렉에게 바알브릿 신전에 있는 은 70개를 내어 줍니다. 아비멜렉은 그 은으로 불량배를 불러 기드온의 남은 아들들을 다 살해합니다. 바알브릿(세겜 사람이 섬기던 우상)은 세겜과 연결되어 구약성경에 나옵니다(사9장). 학자들은 바알브릿(혹은 엘브릿)의 신전이 세겜 서쪽 광장에 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B.C. 1800~1100년 사이인데 사사 시대와 일치합니다. 그즈음에 세겜 서쪽 광장에 바알브릿의 신전이 있어서 그 지역 사람이 바알 신을 숭배한 센터 역할을 했으리라고 추정합니다. 바알브릿 혹은 엘브릿은 ‘언약의 주’라는 뜻인 이방신의 이름입니다. 기드온이 살았을 때는 세겜 사람들이 바알을 숭배하지 않았는데 기드온이 죽고 아비멜렉이 왕이 되자 기드온의 영향에서 벗어난 이스라엘 사람이 바알을 숭배했다고 성경은 고발합니다. 그래서 세겜을 기억할 때는 기드온 한 사람이 있으므로 온 지역이 여호와 하나님을 따랐고, 그 한 사람이 없어짐으로 온 지역이 바알을 따랐다는 신앙의 교훈을 일깨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윤석전 목사: 왕정 시대로 들어선 후 다윗과 솔로몬 시절에도 이스라엘 민족은 역사적 혼란을 계속 겪습니다. 그 당시 세겜은 역사에 어떻게 등장하는지 알려 주세요.

오택현 교수: 사사 시대와 왕정 시대를 거치면서 이스라엘 중 두각을 드러낸 두 지파가 있습니다. 유다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입니다. 유다 지파의 중심 도시는 헤브론이었다가 예루살렘으로 바뀌었고, 에브라임 지파의 중심 도시는 세겜이었습니다. 왕정 시대에 솔로몬이 죽은 후 온 이스라엘이 르호보암을 왕으로 삼고자 세겜으로 갑니다. 거기서 북이스라엘 대표인 여로보암을 만납니다. 여로보암도 세겜 성 출신이고 에브라임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르호보암왕에게 말합니다. “왕의 부친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부친이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왕상12:4). 르호보암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내 부친은 너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찌라 내 부친은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너희를 징치하리라”(왕상12:14). 여로보암이 이에 반발해 열 지파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북이스라엘을 세웁니다. 그때 처음 떠오른 도시가 세겜입니다. 세겜은 북이스라엘 수도로 역사 전면에 등장하면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세겜에는 치명적 약점이 있었습니다. 고대 도시는 높은 곳에 있어 방어에 용이해야 하는데 세겜은 그리심산과 에발산 사이에 있는 분지여서 지세가 낮습니다. 따라서 북이스라엘 수도를 세겜에서 디르사(Tirzah)로, 사마리아(Samaria)로 옮기면서 세겜은 역사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사라집니다.

윤석전 목사: 지금도 구약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세겜으로 가 보겠습니다.

세겜은 축복의 그리심산과 저주의 에발산을 어깨처럼 양쪽에 둔 분지다. 그리심산 자락에는 이방신 제단 터가 황폐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이처럼 세겜은 예부터 바알 신 숭배가 심한 곳이다. 긴 세월의 풍화작용에서도 견고함을 잃지 않은 기둥은 당시 신전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케 한다. 이방신을 섬기지 않겠다고 언약했던 유대인은 어느새 우상을 숭배하는 무리로 변질했다. 이 죄악은 이스라엘의 혼란과 분열이라는 결과를 낳는다. 세겜 땅에는 새로운 거주민 사마리아인이 등장한다. 분쟁의 땅 세겜의 중간지대 거주민 사마리아인은 앗수르의 혼합 정책으로 고향에서 쫓겨났으나 일부는 그 땅에 남아 있던 북이스라엘의 후예다.

“앗수르 왕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매 저희가 사마리아를 차지하여 그 여러 성읍에 거하니라”(왕하17:24).


<사진설명>  ‘성서의 땅을 가다’ 촬영차 세겜을 찾은 윤석전 목사(좌)와 한인수 장로(우).

윤석전 목사: 세겜은 사마리아인의 수도로 여겨집니다. 사마리아인은 어떤 사람이며, 언제부터 세겜에서 살았는지 궁금합니다.

오택현 교수: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나뉜 후(B.C. 926) B.C. 722년 북왕국 이스라엘이 망합니다. 그 후 세겜에 강제로 이주해 와서 산 사람들을 ‘사마리아 사람’이라 불렀습니다. 역사의 뿌리를 찾으려면 B.C. 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사마리아 사람을 부르는 명칭은 여러 시각에서 엇갈립니다. 유대인 시각에서 “세겜을 중심으로 모여 살았다”고 말할 때, 그 지역에 살던 사람은 타 지역에서 옮겨 와 정착한 자들을 말합니다. 앗시리아가 북왕국 이스라엘을 무너뜨리면서 이스라엘 사람을 강제로 끌고 가고 타 지역 사람을 세겜에 데려와서 섞여 살게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인종과 신앙이 섞여 유대인의 시각에서는 ‘사마리아인’ 하면 혼혈인 또는 ‘정통 신앙에서 벗어난 사람’이라고 간주합니다. 그런 이유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갈등이 일어납니다. 지금도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들을 지역 중심으로 부르기를 원하지 않고, ‘모세 율법을 지키는 사람’으로 불러 주기를 원합니다. 사마리아인은 자기들이 ‘모세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사람’이지 인종적 혼혈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진설명> 사마리아인  B.C. 722년 앗시리아가 북왕국 이스라엘을 무너뜨렸다. 그 후 많은 이스라엘 사람을 강제로 끌고 가고 타 지역 사람을 세겜에 데려와서 섞여 살게 했다. 사마리아인은 세겜에 원래 살던 유대인과 강제로 이주해 와서 산 사람들의 혼혈인을 말한다.(좌) 북이스라엘 수도 변천  북이스라엘 수도는 세겜이었지만 분지여서 지세가 낮아 방어에 불리하자 이후 디르사(Tirzah)로, 사마리아(Samaria)로 옮겼다.(우)

윤석전 목사: ‘사마리아 정경(正經)’인 ‘사마리아 오경(五經)’이 있다는데 자세히 소개해 주세요.

오택현 교수: 북이스라엘이 망한 후 세겜이 다시 부각된 이유는 사람이 모이기 좋은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성이 무너진 후에도 사람들은 세겜에 모여 전통을 지키며 살았고 그들을 중심으로 사마리아 전통이 이어졌습니다. 그들이 바라보는 성경은 우리가 보는 성경과 다릅니다. 북이스라엘은 B.C. 721년에 멸망했는데 그때까지 활동한 예언자 중 북쪽 출신 호세아 선지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남쪽 출신이었습니다. 그 후 역사는 남유다를 봅니다. 예언서 대부분은 북이스라엘을 보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마리아인이 정경으로 보는 것은 오로지 모세 오경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오경이라고 부릅니다. 사마리아 오경은 우리가 가진 오경과 거의 비슷하지만 결정적인 단어가 조금 다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이삭을 바친 장소 모리아산을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산으로 아는데 사마리아인은 그리심산을 모리아산이라고 주장합니다. 신명기에서 강조하는 중앙 성소는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려 ‘택하실’ 장소라고 나와 있습니다(신12:11~14). 하지만 사마리아 오경에는 이를 ‘택하신 장소’라고 했으며, 훗날 그곳을 예루살렘이 아니라 그리심산이라고 주장합니다.

윤석전 목사: ‘사마리아 오경’은 세겜 박물관에 잘 보존돼 있습니다. 사마리아 오경을 직접 보고 오신 왕대일 교수님이 말씀해 주세요.

왕대일 교수: 꽤 오래전 일입니다. 지금은 세겜에 갈 수 없어서 그런 기회가 없습니다. 인티파다(팔레스타인 민중봉기)가 일어나기 전에 사마리아 오경 사본(寫本)을 보존하고 있다고 해서 학생들과 함께 사마리아 회당에 찾아갔습니다. 세 사람이 모여야 사마리아 사본을 볼 수 있습니다. 회당 대문 열쇠를 가진 사람, 출입구 현관 열쇠를 가진 사람, 두루마리를 여는 열쇠를 가진 사람 이렇게 셋입니다. 회당 안에 들어가서 두루마리를 꺼냈는데 히브리어로 기록돼 있고 많이 낡았습니다. 사마리아 회당 제사장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기회를 만들어서 가나안에 진입한 후 13년 되던 해에 모세의 손자 아비슈아가 직접 쓴 원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 두루마리는 3000년 이상 된, 매우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1335년 대제사장 비느하스 벤 요셉(Phinehas ben Joseph)이 이 사본을 발견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학자들의 의견은 다릅니다. 사본을 발견했다는 1335년 즈음에 사본이 쓰이고 그때부터 보존된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사마리아 오경 사본을 자기들이 보존한 사실에 긍지가 높습니다.


<사진설명> 유대 민족이 가나안에 진입한 후 13년 되던 해에 모세의 손자 아비슈아가 직접 쓴 원본이라고 하는 ‘사마리아 오경’. A.D. 1335년 대제사장 비느하스 벤 요셉이 사본을 발견했다고 한다. 하지만 학자들은 아마도 1335년에 사마리아 오경이 쓰여진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 세겜 박물관에 보존돼 있다.(좌) 북이스라엘 멸망과 유배  B.C. 722년 앗시리아에게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이스라엘 열 지파는 두 번에 걸쳐 앗시리아 제국으로 포로가 돼 끌려갔다.(우)

윤석전 목사: 오늘날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관계가 어떠한가요?

왕대일 교수: 요즘도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유대인이 혼혈이라며 인종적으로 자기들을 깔본다고 생각해서 사마리아인은 자격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사마리아인들은 오래전부터 친족끼리만 결혼했습니다. 혼혈에서 벗어나려고 사마리아인끼리 결혼하다 보니 우생학상 장애인이 많이 생겨서 거의 죽고 사라져 현재 700명 정도 남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의 사이는 여전히 좋지 않습니다.

윤석전 목사: 세겜 땅을 보면서 남방과 북방,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이 다툴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온 세계가 인종, 언어, 역사가 다르지만 모두 예수 안에서 하나 돼 영원한 천국에서 하나 됐으면 좋겠습니다.

<계속>

<윤석전 목사 탐사기행 ‘성서의 땅을 가다’는  www.ybstv.com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55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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