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8-01-31 14:47:25 ]
로마에 끝까지 항전한 유대인 967명
마사다 요새에서 장렬한 최후 맞아
윤석전 목사: 마사다는 제1차 유대인 항전의 최후의 격전지였습니다. 오늘날도 유대인은 자녀를 마사다에 데리고 가서 조상들이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어떤 참혹한 최후를 마쳤는지 알려주어 국가관, 신앙관을 길러 줍니다. 마사다로 가보겠습니다.
<사진설명> [마사다 전경] 마사다는 동쪽 450m, 서쪽 100m 높이 절벽 정상 평지 위에 1.4km 성벽을 둘렀다. 정상에 오르면 길이 600m, 폭 250m 평지가 나온다.
유대 광야 동쪽 끝에는 제1차 유대-로마 전쟁(A.D. 66~73) 당시 극우파 유대인의 최후 항전지 마사다가 있다. 2천 년 전, 유대인은 어떻게 세계 최강 로마군을 상대로 3년이나 저항했을까. 동쪽 450m, 서쪽 100m 절벽 정상 평지 위에 1.4km 성벽을 두른 마사다가 있다. 로마에 충성하던 헤롯왕이 A.D. 37년부터 6년간 세운 요새다. 유대인이 반란을 일으킬 때를 대비해 피신처를 마련해 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A.D. 70년 로마에 저항하는 유대 극우파가 최후 항전지로 사용했다. 마사다 정상에 오르면 대형 축구장 몇 배 크기의 평지가 나온다. 헤롯왕은 이곳에 성벽을 두르고 탑 38개를 세웠다. 거주민들은 탑 안과 성벽 방에 살았다. 왕의 요새답게 대형 사우나도 있다. 로마식 사우나인데 냉탕, 온탕, 증기탕까지 있어 과학적 설비가 현대 사우나 시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헤롯왕의 피신처 마사다는 로마에 대항하던 유대인의 최후 결전 장소로 역사 속에 남아 있다.
<사진설명> 로마군은 험난한 마사다를 점령하기 위해 급경사를 없애려고 마사다 서쪽에 경사가 완만한 토담을 쌓았다. 이때 유대인 인부를 쓰는 비열함을 보였다.
<사진설명> 헤롯 궁전 복원도 헤롯 궁전은 마사다 북쪽 끝에 있다. (왼쪽)
<사진설명> 마사다 뱀길 접근하기 어려운 길에는 10명 남짓만 올라갈 수 있다. 현재도 나라를 위해서 몸 바치고자 하는 사람은 마사다의 비극을 잊지 말자며 섭씨 40~50도에 달하는 무더운 날씨에 뱀길을 행군해 마사다에 오른다. (오른쪽)
윤석전 목사: 마사다가 어디 있는지 말씀해 주세요.
오택현 교수: 마사다는 쿰란에서 남쪽 48km 지점에 있는 천혜(天惠)의 요새입니다. 거대한 원기둥을 수직으로 잘라놓은 듯 깎아지른 험한 산세입니다. 요즘은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갑니다. 정상에 다다르면 길이 600m, 폭 250m의 평지가 나옵니다. 많은 사람이 거한 건물의 흔적이 남아 있어 최후 격전지로 적합한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윤석전 목사: 마사다는 언제 발굴됐는지요?
왕대일 교수: 유대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A.D. 37~100)는 『유대 전쟁사』에 마사다가 있다고 증언했습니다. 로마에 항쟁할 때 967명이 최후에 장엄하게 전사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는데 정확한 위치는 몰랐습니다. 1963년에 히브리대학 이가엘 야딘(Yigael Yadin)교수가 발굴해 요세푸스가 말한 최후 항쟁지가 마사다인 것을 알게 됐습니다. 11개월간 엄청나게 많은 자원봉사자가 발굴에 참여해 마침내 마사다 규모가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윤석전 목사: 헤롯왕은 왜 마사다를 완벽한 요새로 만들었나요?
오택현 교수: 헤롯왕보다 먼저 마사다를 요새화한 사람이 있습니다. 마카비 혁명을 성공한 요나단 마카비(B.C. 152~142)입니다. 당시에는 군대 진영으로만 활용했는데 후에 헤롯왕이 완벽한 요새로 만들었습니다. 헤롯왕은 건축에 재주가 많아 가이사랴 빌립보를 건축하고, 예루살렘 성전과 조상 묘인 막벨라 굴을 재건했습니다. 하지만 헤롯왕 마음속에는 유대인이 자기를 암살할지 모른다는 강박관념이 도사리고 있어 혼자서는 밖에도 못 나갈 정도였습니다. 반란이 어디서 일어나든지 한 시간 안에 도망쳐 숨을 장소인 요새를 셋이나 만들었습니다. 요단강 동쪽 마케루스(Machaerus) 요새, 베들레헴에 있는 헤로디온(Herodium), 마사다가 그곳입니다.
윤석전 목사: 마사다가 유대인의 최후 항전지 역할을 한 것에 관해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오택현 교수: 마사다는 피신할 목적으로 만들었지만, 헤롯왕 당시에는 겨울 별장으로 애용했습니다. A.D. 66년에는 유대인이 1차 반란을 일으켜 예루살렘 성전에서 로마와 최후 항전을 벌였는데 도저히 이길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예루살렘 성전이 돌 하나 남지 않고 다 무너졌고(마24:2) 유대인은 유대 광야로 쫓겨났는데 그들이 선택한 마지막 항전지가 마사다였습니다. 당시는 소수만 마사다를 지키고 있어 손쉽게 점령한 후 거기서 최후 항전을 했습니다. 로마 입장에서는 저항의 불씨가 살아남아 있으면 안 되겠기에 마사다에 최정예 군대를 파견합니다. 플라비우스 실바(Flavius Silva) 장군이 이끄는 제10군단 군사 1만 5,000명이 967명밖에 되지 않는 유대인을 물리치러 왔습니다. 로마군은 마사다를 8구역으로 나눈 후 철저히 봉쇄하고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게 포위했습니다. 그 후 3년간 마사다를 완전히 파괴하는 전략을 펼쳤습니다.
윤석전 목사: 다시 한번 마사다로 가보겠습니다.
‘요새’ 뜻인 ‘마사다’에는 창고가 29개 있었다. 그중 현재 파괴되지 않고 남아 있는 곡식 창고도 여럿 있는데 제1차 항전 당시 거기에는 옥수수와 콩이 가득 보관돼 있었다고 한다. 또 번제 제물인 비둘기 사육장도 있었다. 마사다는 헤롯왕이 5년간 쓰고도 남을 풍부한 식량과 무기를 준비해뒀기에 유대인이 오랜 기간 로마에 저항하기에는 최적의 요새였다. 유대인은 마사다 성벽 아래에 진(陣)을 친 세계 최강 로마군에게 만만찮은 상대였다. 또 유대인 반란에 불길을 타오르게 할 위험요소였다. 로마군은 마사다를 두르는 호위 벽을 만들고, 토담을 쌓아 성을 공격했다. 불화살과 돌 포탄이 마사다를 덮쳤고 마침내 철옹성 마사다는 무너졌다.
<사진설명> 로마 군대는 서쪽에 토담을 만든 후 완만한 토담에 성을 무너뜨리는 기구(공성퇴)로 성문을 부쉈다. (왼쪽)
<사진설명> 곡식창고 헤롯왕이 5년간 쓰고도 남을 풍부한 식량을 준비해둬서 마사다는 유대인이 오랜 기간 로마에 저항하기에 최적의 요새였다. 로마 사람이 마사다를 점령했을 때 곡식창고에는 옥수수와 콩이 가득 보관돼 있어서 굶주려서 죽은 것이 아니라 신앙의 자유를 위해 자결한다는 그들의 마지막 저항의식을 보여줬다. (오른쪽)
윤석전 목사: 마사다에 가서 꼭 봐야 할 유물은 무엇인가요?
왕대일 교수: 마사다에는 하나님께 예배드린 회당, 식량을 보관한 창고, 빗물을 저장한 물탱크, 목욕탕이 있습니다. 마사다는 사암(砂岩) 지역인데, 뜻밖에도 지름 40~50cm 크기의 화강암 돌덩이가 무더기로 쌓여 있었습니다. 로마 군대가 다른 지역에서 가져온 돌 폭탄이었습니다. 마사다를 함락시키려고 토성을 쌓고 공성퇴를 쏠 때 돌 폭탄을 쏴서 마사다 유대인들을 잔혹하게 쓰러뜨렸습니다. 지금은 남아 있는 화강암들을 보면서 마사다 전쟁의 쓰라림을 알 수 있습니다.
<사진설명> 돌폭탄 로마 군대는 마사다를 함락하려고 돌 폭탄을 쏴서 유대인 저항군을 쓰러뜨렸다. 직경 40~50cm 크기. (왼쪽)
<사진설명> 물탱크 빗물을 저장한 물탱크.(오른쪽)
<사진설명> 로마식 사우나 냉탕, 온탕, 증기탕까지 있어 현대 사우나 시설과 비교해도 손색없다.
윤석전 목사: 마사다 서쪽 토담의 용도는 무엇인가요?
오택현 교수: 마사다는 매우 험난합니다. 로마 사람은 마사다의 급경사를 없애려고 경사가 완만한 토담을 쌓았습니다. 그때 유대인 인부를 데려다 쓰는 야비한 방법을 사용합니다. 마사다에 남아 있는 유대인은 동족을 죽일 수 없었기에 속수무책으로 토담을 쌓는 모습을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유대인은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로마 사람은 그것을 알고 안식일에 대대적으로 공사를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토담이 완성됐고 마침내 성벽 바로 아래까지 닿았습니다.
윤석전 목사: 토담이 완성된 후 마사다 요새는 로마인에게 바로 점령됐나요?
오택현 교수: 마사다 성벽과 성문이 건재했기에 토담을 쌓은 후 바로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로마 사람은 성벽과 성문을 무너뜨리는 전문가여서 성문을 부수는 기계(공성퇴, 攻城槌)를 가지고 완만한 토담에 올라가 성문을 부쉈습니다. 유대인은 최후 저항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성퇴를 불태우려고 올리브유를 퍼붓고 횃불을 사용했지만 로마 군대는 미리 공성퇴를 물에 젖은 가죽으로 감싸 올리브유가 묻지 않게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무너지는 성벽과 성문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내 성문은 무너졌고 성벽이 파괴돼 날이 새면 로마군과 최후의 격전을 치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 군단은 3년 만에 마사다 요새에 쳐들어갔는데 싸늘한 주검만이 그들을 맞았습니다.
윤석전 목사: “로마 사람에게 죽느니 차라리 우리끼리 죽음을 같이하자”는 뜻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마사다 유물 중 꼭 알아두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왕대일 교수: 마사다 유물은 대개 눈으로 보는 현장입니다. 마사다 최후의 날을 알기 위해 꼭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대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전하는 자료입니다. 엘리아자르 벤 야이르(Eleazar Ben Yair)는 마사다 항전을 이끈 열심당(Zealot) 지도자입니다. 벤 야이르는 최후 항전을 앞두고 아마 이렇게 연설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유를 얻어 애굽에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로마 군대에 붙잡혀 노예로 사느니 영광스럽게 자유를 얻읍시다.” 마사다 현장을 방문하면 그 연설이 생생히 울려오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연설이 끝난 후 남자들은 각자 아내와 자식을 죽였고, 남자들만 남게 되자 제비뽑아 열 명을 택해 이들이 나머지 남자를 모두 죽였습니다. 또 제비를 뽑아 한 사람이 나머지 9명을 죽이고 자기는 자결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마사다 현장에서 그 비극적인 장면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윤석전 목사: 마사다가 오늘날 이스라엘에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왕대일 교수: 마사다는 성경에 등장하는 구체적인 성지는 아닙니다. 로마와 유대인의 싸움 역사를 보면 유대인은 약자고 로마는 강자입니다. 약자가 독립을 지키고 신앙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서 로마 군대와 최후까지 장렬하게 맞서 싸운 곳이 마사다입니다. 이스라엘 사관학교 학생, 군인이 될 사람 등 나라를 위해서 몸 바치고자 하는 사람은 무더운 날씨에 마사다 뱀길을 행군해 마사다에 올라 ‘마사다의 비극을 잊지 말자. 마사다에서 자유를 위해, 독립을 위해 싸웠던 조상의 얼을 잊지 말자’고 맹세합니다.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남의 얘기가 아닙니다.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 우리가 치러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합니다.
<사진설명> 이스라엘 사관학교 학생이나 군인이 될 사람은 무더운 날씨에 마사다 뱀길을 행군해 마사다에 올라 ‘마사다의 비극을 잊지 말자’고 맹세한다.
윤석전 목사: 마사다에 있던 유대인은 마지막 순간 다 불태웠는데 왜 식량창고만 남겨 뒀나요?
오택현 교수: 만약 식량 창고까지 불태웠다면 로마 사람은 유대인들이 굶어 죽었다고 선전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식량 창고를 그대로 놔둔 채 “우리는 굶주려서 죽은 것이 아니라 신앙의 자유를 위해 자결한다”는 저항의식을 보였습니다. 로마 사람은 마사다를 점령한 후에도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유대인을 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윤석전 목사: 마사다의 유대인이 자결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았나요?
왕대일 교수: 로마 군대에 종군했던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을 보면 이런 증언이 있습니다. “마사다에서 일어난 967명의 죽음을 전해준 목격자가 있었습니다. 모두 살해될 때 숨어 있던 늙은 아주머니 두 명과 어린아이 다섯 명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요세푸스에게 마사다 최후의 현장을 증언했고, 우리는 그 기록을 통해 마사다 최후의 현장을 알게 됐습니다.
윤석전 목사: 우리도 이 민족처럼 국가관, 신앙관이 투철해져서 나라를 지키고 영적 싸움에서 승리해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러 면류관을 얻기를 바랍니다.
<계속>
<윤석전 목사 탐사기행 ‘성서의 땅을 가다’는 www.ybstv.com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562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