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와 함께하는 ‘성서의 땅을 가다’(111)] 거대한 바위산 깎아 만든 고대 도시 페트라

등록날짜 [ 2018-07-12 12:15:20 ]

B.C. 300년경 나바테아 왕국 수도 페트라
‘왕의 대로’와 ‘향료의 길’ 지나는 상업 도시
구약 ‘아마샤’왕이 점령한 ‘셀라’ 지역과
바울이 전도했던 아라비아 지역으로 추정


윤석전 목사: 전 세계인이 꼭 한번 가 보고 싶어 하는 곳이 요르단 페트라입니다. 그곳에 있는 웅장한 건물들은 바위산을 파고 깎아서 만들었는데 언뜻 보기엔 층층이 세운 건물로 보일 정도로 정교합니다. 많은 사람이 불가사의로 보는 페트라로 가 보겠습니다.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서 서남쪽으로 차를 타고 150km 달리면 페트라에 도착한다. 페트라 입구로 가려면 걷거나 말 혹은 마차를 타고 시크(Siq)라는 이름의 좁고 긴 암벽 협곡을 약 3km 통과해야 한다. 페트라에 있는 건물들은 돌로 깎아서 세운 것이 아니라 원래 그 자리에 있는 거대한 바위산인 자연석을 깎고 굴을 파서 만들었다.

‘시크’를 빠져나와 처음 만나는 거대한 건물은 ‘보물창고’라는 뜻의 40m 높이 ‘알 카즈네(Al Khazneh)’다. 신전과 무덤을 겸한 장제전(葬祭殿)으로 사용됐다. 이 건물은 B.C. 300년경부터 에돔에 거주한 나바테아인(Nabataeans)이 남긴 걸작이다. 장제전 기둥은 건축 양식이 특별하다. 장제전 한가운데를 떠받치는 거대한 기둥은 바위를 옮겨서 세운 것이 아니라 원래 그 자리에 있던 바위를 파고 깎아 내서 만든 것이다. 장제전의 주인 나바테아인은 페트라에서 600여 년간 번영의 세월을 누렸다.


<사진설명> (왼쪽) 시크 협곡 길이 3km에 달하는 ‘협곡’이란 뜻의 ‘시크(Siq)’는 오랜 지진으로 지각이 변동하면서 만들어진 어둡고 좁은 협곡이다. 
(오른쪽) 알 카즈네 아랍어로 ‘보물창고’라는 뜻이다. 페트라의 가장 대표적 유적이며 높이 43m, 넓이 30m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커다란 암벽을 파서 만들었으며, 원래는 죽은 자를 위해 제사 지내는 신전인 장제전으로 사용했다.


<사진설명> 페트라 전경  페트라는 가장 낮은 곳이 해발 1000m 이상 되는 바위투성이 고지대로 나바테아 왕국의 수도다. 건축 양식은 나바테아의 특유 양식은 기본이고 헬레니즘과 로마 문화, 이집트와 앗수르의 영향까지 받아 발전시켰다.

윤석전 목사: 페트라의 특징을 소개해 주세요.

오택현 교수: 페트라(Petra)는 헬라어로 ‘바위’라는 뜻입니다. 도시 전체가 1370m 되는 거대한 바위산으로 형성돼 있습니다. 평균 해발이 1000m 이상인 고지대입니다. 페트라의 아름다움을 보려면 중앙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러려면 ‘좁은 협곡’이라는 뜻인 ‘시크(Siq) 협곡’을 약 3km 지나야 합니다.

윤석전 목사: 페트라 암석은 보통 바위와 다른가요?

정중호 교수: 모두 사암(砂巖)입니다. 사암의 특징은 비가 내리면 물이 잘 흘러내리고 빨리 건조돼서 색이 잘 변하지 않습니다. 깎고 다듬기 쉬워 정교하고 화려한 작품을 낼 수 있습니다. 또 붉은색이라는 특징이 있어 사암 지층에는 백색, 황색, 진분홍색 같은 무늬를 볼 수 있습니다. 햇볕을 쬐는 일조량과 각도에 따라 색깔이 시시각각 변해서 신비로운 모습을 보여 줍니다. 페트라는 아주 맑은 날 오전 10시쯤 가장 황홀한 색깔을 띱니다. 사막 한가운데 서 있는 웅장한 바위 건물의 정교하고 화려한 모습과 색깔이 시시각각 변하는 장면을 보면 신비롭습니다.

윤석전 목사: 페트라는 많은 사람이 가고 싶어 하는 인기 높은 장소라고 하는데 자세히 소개해 주세요.

오택현 교수: 페트라의 아름다움은 옛날부터 널리 알려져 많은 이가 가고 싶어 하는 성지입니다. 미국 어느 방송사의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페트라가 전 세계 가고 싶은 곳 8위를 차지했습니다.

윤석전 목사: 나바테아인은 페트라를 돌로 깎아 건축했는데 어떻게 그런 건축 양식을 발전시켰을까요?

정중호 교수: 요르단이 자랑하는 국보 1호 페트라는 나바테아 왕국 사람들이 모든 기술을 동원해서 만든 왕국의 수도였습니다. 페트라는 ‘왕의 대로’와 ‘향료 길’이 교차하는 교통 요지여서 건축 양식에서도 상당히 국제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습니다. 투박한 나바테아 양식이 기본이고, 헬레니즘과 로마 문화에 이집트와 앗수르의 영향까지 받았습니다. 또 그들이 만든 수로(水路)와 돌을 쌓아 만든 물 저장통을 보면 건축 기술이 상당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달걀껍질토기’라고 부르는 질그릇은 두께가 2mm 정도이니 섬세하고 정교한 기술까지 갖췄습니다.

윤석전 목사: 구약성경에는 어떻게 등장하나요?


오택현 교수: ‘페트라’는 헬라어여서 히브리어로 쓰인 구약성경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바위’는 히브리어로 ‘셀라’입니다. ‘셀라’는 구약성경에 에돔의 도시로 등장하기 때문에 신약 시대 페트라로 추정합니다. 구약성경 열왕기하 14장 7절을 보면 유다 왕이었던 ‘아마샤’가 에돔을 점령한 뒤 ‘셀라’를 점령했다고 표현합니다. 그 지역의 이름을 ‘욕드엘’이라고 고쳤는데 그때 점령한 ‘셀라’를 페트라로 봅니다. 또 이사야 42장 11절 ‘셀라의 거민들이 산꼭대기에서 즐거이 부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페트라는 바위에서 사람들이 살았기에 선지자가 그 지역을 정확히 알고 예언한 것입니다.

윤석전 목사: 다시 페트라로 가 보겠습니다.

페트라는 붉은 사암 덕분에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영국 시인 존 버곤은 페트라를 격찬했다. ‘영원한 시간의 절반만큼 오래된 장밋빛같이 붉은 도시(A rose-red city half as old as time).’ 당시 페트라에는 식수 공급 시설이 발달했다. 산에서 내려오는 물과 모세의 우물에서 흘러오는 물이 수로를 통해 도시에 공급됐다. 나바테아인은 수로가 옮겨 준 풍부한 물을 먹으며 산악 도시를 형성했다.


<사진설명> ① 페트라 유적지 지도  와디 무사(모세의 계곡)에서 알 카즈네와 왕의 무덤, 알 데이르(수도원)에 이르기까지 상세히 나와 있다.
② B.C. 85년경 나바테아 왕국 지도 나바테아인은 B.C. 300년경 에돔에 정착했고 전성기인 아레타스 4세(B.C. 9 ~ A.D. 39년) 시절 시리아 다마스쿠스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③ 페트라 수로 페트라 근처에 떨어지는 빗물과 모세의 우물에서 흘러오는 물을 저수조와 급수조에 모으고, 수로를 통해 페트라에 공급했다. 나바테아인들은 수로가 옮겨 준 풍부한 물을 마시며 산악 도시를 형성했다.


윤석전 목사: 페트라에 살던 나바테아인의 유적이 발굴됐다고 하는데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정중호 교수: 나바테아인은 서북부 지역에서 이주해온 유목민입니다. 그들은 정착해서 화려한 나바테아 왕국 문화를 이루었고, 교통 요지인 점을 활용해 무역권을 쥐고 부를 축적했습니다. 무역하기는 좋은 위치지만, 외부 적에게 쉽게 침략을 당할 수 있어 도시 방어 목적으로 바위에 굴을 뚫어 거주지를 만들고, 바위를 깎아 신전을 만들었습니다. 산악 도시의 모습을 보면, ‘모세의 강’이라 부르는 ‘와디 무사(Wadi Musa)’를 따라 신전, 무덤, 거주지를 만들어 발전시켰습니다.

윤석전 목사: 페트라가 본격적으로 번성한 시기는 언제인가요?

오택현 교수: 페트라는 나바테아인이 이곳을 발전시키면서 본격적으로 번성했습니다. 나바테아인은 B.C. 500년경 사해 남쪽 지역에서 이주해 와 에돔에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B.C. 300년 지날 무렵엔 에돔 지역을 전부 장악했습니다. 나바테아인은 B.C. 300년부터 A.D. 360년까지 세력을 형성하고 페트라를 중심으로 상업을 발전시켰습니다. 페트라는 다메섹에서 아카바만까지 이어지는 ‘왕의 대로’가 지나가고, 아라비아 남쪽에서 시작한 ‘향료 길’이 끝나는 지점이기에 나바테아인이 이곳을 대단한 상업 중심지로 발전시켰습니다.

윤석전 목사: 아라비아 남쪽은 향료 생산으로 매우 유명했는데 페트라도 향료와 관계가 있나요?

오택현 교수: 페트라에는 죽은 자를 위한 신전인 장제전(葬祭殿)과 많은 신전(神殿)이 있어서 향료가 필요했습니다. 아라비아 남쪽, 현재 예멘에서 생산하는 향의 최종 집산지로 고대에 유명했습니다. 신전에서 제사를 지낼 때 향이 필요했기에 향은 매우 비싼 값에 거래됐습니다. 향 판매 중심지가 페트라였고, 페트라를 중심으로 이집트 가자(Gaza) 지역으로 향을 옮겨가기도 했습니다. 또 메소포타미아로 가기 위해 다메섹으로 향을 옮길 때 페트라는 그 중간 집산지로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페트라는 고대 로마 시대 시리아 중부 도시 팔미라(Palmyra)가 페트라의 영광을 빼앗기까지 오랫동안 부를 축적했습니다.

윤석전 목사: 성경은 향료를 어떻게 말하고 있나요?

정중호 교수: 성전에서 향료를 많이 사용합니다. 하나님께 향 제사를 지낼 때 필요하고, 곡식을 가지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소제(素祭)에도 쓰입니다. 그 밖에 향수나 화장품에 향료가 들어가고, 장례식에도 많이 쓰입니다. 이스라엘은 향료를 수입하는 지역이기에 당연히 비쌀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동방박사들이 황금, 몰약, 유향을 선물로 드렸는데 그중 몰약과 유향이 향료입니다. 황금에 비견될 정도로 귀했습니다.

윤석전 목사: 페트라 유적이 우여곡절 끝에 발견됐다고 하는데 소개해 주세요.

정중호 교수: 현대에 들어와 페트라를 발견한 사람은 스위스 탐험가 요한 루드비히 부르크하르트(1784~1817)입니다. 1812년 시리아 쪽 다마스쿠스에서 이집트로 여행하던 그는 유목민에게 “폐허에 가깝지만, 유적이 많은 도시가 근처에 있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같은 해 8월 아랍인으로 위장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몰래 요르단으로 들어가 페트라를 발견한 후 그 모습을 책으로 출판해 유럽에 알렸습니다.

윤석전 목사: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발굴됐나요?

정중호 교수: 1929년 영국인 아그네스 콘웨이(1885~1950)와 조지 호스 필드(1882~1956)가 본격적으로 발굴했습니다. 그 후 수십 년간 발굴하고 있지만, 아직도 발굴 초기 단계입니다. 그만큼 페트라에는 발굴하고 연구할 유적이 매우 많습니다.

윤석전 목사: 에돔에 같이 살았던 이두매인과 나바테아인은 어떤 사이인가요?

오택현 교수: 이 둘은 에돔에 함께 살았지만, 엄연히 다른 민족입니다. 이두매인은 에돔족의 후예이고, 나바테아인은 아라비아인입니다. 하스몬 왕조 역사에 두 민족이 함께 살면서 경쟁했던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윤석전 목사: 페트라를 ‘셀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신구약에는 페트라가 어떻게 등장하나요?

오택현 교수: 구약성경에는 에돔 지역에 있었던 셀라로 표기돼 있습니다(왕하14:7). 이스라엘 백성이 점령했던 셀라 지역이 페트라가 아닐까 추정합니다. 신약성경에는 사도 바울이 회심한 후 아라비아에서 전도 활동을 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아라비아는 나바테아 왕국이기에 많은 학자는 사도 바울이 나바테아 왕국의 중심지 페트라에서 전도 활동을 했다고 추정합니다. 페트라는 신구약에 관련된 귀한 성지(聖地)입니다.

윤석전 목사: 오랫동안 숨어 있던 도시 페트라가 드러난 것처럼, 예수를 성인으로만 알고 구세주인 것을 모르는 수많은 세상 사람에게도 예수가 구세주로 드러나길 바랍니다.

<계속>

<윤석전 목사 탐사기행 ‘성서의 땅을 가다’는  www.ybstv.com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582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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