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와 함께하는‘성서의 땅을 가다’(180)] 환난과 궁핍 속 ‘실상은 부요한 자’라고 칭찬받은 서머나 교회

등록날짜 [ 2020-02-26 09:33:58 ]

로마 압제와 유대교 개종자들에게 시달렸지만
순교를 당당히 받아들이는 담대한 신앙으로
‘둘째 사망의 해(害)’ 면하고 천국 소망 소유
폴리갑 교회 곳곳서 순교적 삶 읽을 수 있어



<사진설명> 서머나 항구에서 윤석전 목사와 침신대 교수들. 


<사진설명> 서머나 주변 지도. 서머나는 ‘몰약’이라는 뜻으로 요한계시록 일곱 교회 중 에베소와 함께 항구에 위치해 있다. 에베소 북쪽 80km 지점에 있다.



윤석전 목사: 서머나는 그 시대에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로마제국에 대한 충성심도 아주 대단했습니다. 도시를 지키기 위한 방편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당시 유대인은 기독교인을 심하게 핍박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 교인에게 “네 환난과 궁핍을 내가 안다”라고 하면서 “실상은 너희가 부유한 자다”라고 위로했습니다. 물질적 풍요를 누렸지만 우상숭배가 만연한 서머나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순교적 삶을 살았던 서머나 교인들의 자취를 찾아가 보겠습니다.


에게해(Aegean Sea)를 따라 형성된 항구도시 서머나는 오늘날 이즈미르(Izmir)라는 현대도시로 변모했다. 그곳에 황제 숭배를 거부하다 순교한 서머나 교회 제4대 감독 폴리갑(Polycarp, A.D.69~155)의 기념교회가 있다. 17세기에 세워진 폴리갑 기념교회 곳곳에서 서머나 교인의 순교적 삶의 흔적을 읽을 수 있다. 로마 황제 숭배를 거부했기에 서머나 교인은 핍박받았고 가난했다. 그런 반면 “실상은 부요한 자”(계2:9)라고 주님께 칭찬받은 서머나 교인은 순례자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윤석전 목사: 서머나의 지리와 역사를 소개해 주세요.


홍순화 교수: 지중해 북쪽에 터키가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에서 북쪽으로 55km 정도 올라가면 서머나 교회가 있습니다. 에베소와 서머나는 모두 항구 지역인데 서머나는 당시 그 주변 중심지였고, 관광 휴양지였습니다. 풍광이 빼어나고 기후가 좋아 그 지역 사람들이 즐기던 포도주를 생산해서 큰 번영을 누렸습니다. 소규모 도시인데도 대도시에나 세웠던 황제 신전을 세워서 황제를 숭배하면서 로마에 충성을 바쳤습니다.


윤석전 목사: 요한계시록 2장을 보면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에 “네 환난과 궁핍을 안다”(계2:9)며 위로하셨는데 당시 서머나 교회의 상황이 어떠했기에 이런 말씀을 하셨나요?


홍순화 교수: 관광도시이면서 황제 숭배를 극심하게 한 곳에서 신앙생활 하기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됩니다. 서머나 교인은 심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관광지여서 도시는 여러 가지 면에서 풍족했지만, 서머나 교인은 매우 가난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바로 지키면서 돈을 벌기란 무척 어려웠을 것입니다. 돈 버는 방법을 알아도 신앙양심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아서 서머나 교인은 가난했습니다. 감사하게도 육신은 핍박받고 생활은 가난했지만, 신앙 면에서는 어느 지역보다 훌륭했습니다. 폴리갑이 이곳에서 순교하기도 했지만, 서머나 교회는 교인만으로도 ‘순교 교회’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어려움 속에서도 모범적인 교회였습니다.


윤석전 목사: 서머나 교회가 ‘자칭 유대인’이라는 사람들에게 훼방을 받았는데, 주님은 그들을 ‘사단의 회(會)’라고 하셨습니다(계2:9). ‘사단의 회’를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세요.


박영철 교수: 당시 터키인은 기독교의 이방인이었는데 유대인과 접촉하면서 유대인이 섬기는 하나님이 좋아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경우는 교회 안에 있는 기독교 개종자보다 오히려 회당에 모인 유대교 개종자가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유대교 개종자가 교회를 비방한 내용을 살펴보면, 기독교를 유대교에서 파생한 아류나 이단으로 몰아붙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저 사람들은 밀교(密敎)나 사교(邪敎) 집단이라고 비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행위에 대해 주님은 요한을 통해 강하게 말씀하시기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계2:9)고 정확히 지적하셨습니다.


윤석전 목사: 네, 그렇게 유대인이 아닌데도 자칭 유대인이라 하면서 서머나 교회에 핍박과 고통을 가하는 역사가 있었군요. 예수님께서 서머나 교회를 특별히 크게 위로하시고 사랑하신 서신을 보면 부럽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칭찬한 서머나 교회로 다시 한번 가 보겠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를 숭배하던 서머나에서 그리스도인은 로마의 압제와 지역 내 유대교 개종자들의 증오심에 시달려야 했다. 서머나 교인에게는 하나님의 약속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믿음의 촛불은 핍박 속에서도 타올랐고 순교를 당당히 받아들이는 담대한 신앙으로 성장했다. 화형당하는 순간에도 신앙의 지조를 굽히지 않았던 폴리갑의 모습에서 서머나 교인의 신앙을 엿볼 수 있다.


윤석전 목사: 요한계시록을 보면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를 향해서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계2:10)고 말씀하셨는데 ‘10일’이라는 단어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나요?


박영철 교수: 당시 서머나 교회가 직면한 어려움은 환난과 핍박이었습니다. “너희 중에 감옥에 갇힐 사람도 있을 텐데 열흘간 있게 될 것이다”라는 주님의 예언 말씀은 히브리의 수(數) 개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히브리인에게 ‘10’이라는 수는 ‘완전하다’ ‘상당히 많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의 수 개념에 따라 이 말씀의 의미를 상고해 보자면, “너희 중에 몇 사람이 감옥에 갇히겠는데 며칠 있다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장기간 옥살이를 할 것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마 순교를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에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따라서 ‘10일’이라는 의미는 옥에 들어갔다가 금방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장기간의 고난을 뜻하는 예언의 말씀이라고 봅니다.


윤석전 목사: 또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에 말씀하시기를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계2:11)고 말씀하셨는데 ‘둘째 사망’이 무엇인지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박영철 교수: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첫째 사망이 인간의 육신이 70~80년 살다가 죽는 것을 의미한다면, 둘째 사망은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합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도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기록해 사람은 한번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인 영원한 운명을 심판하는 둘째 사망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윤석전 목사: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 하신 말씀 그대로 인류에게는 이미 영혼의 죽음이 확증돼 사망에 이르렀기에,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육신을 입고 있을 때 빨리 예수 믿어 구원받고, 부지런히 믿지 않는 사람을 전도해서 육신의 사망 후 영혼의 사망인 둘째 사망을 겪지 않게 하는 것이 우리 믿는 자의 사명입니다. 서머나 교회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요?


박영철 교수: 서머나 교회의 문제는 고통과 핍박을 당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3:12)고 말씀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도 믿음 때문에 어려움을 당할 일이 많습니다. 주님 앞에서 사단이 나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것은 ‘내가 바로 섰기 때문’이니 자신의 믿음을 지키는 자세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사단이 때로는 광명한 천사의 모습으로 유혹하고, 때로는 삼킬 자를 두루 찾는 우는 사자처럼 위협하는 양면 공격을 우리가 이해한다면, 그런 위험이 왔을 때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단단하게 서서 사단을 대적하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윤석전 목사: 요한계시록 2장 8절에서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에 말씀하실 때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이렇게 소개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박영철 교수: 주님께서 환난과 핍박을 당하는 서머나 교회를 위로하고 격려할 목적으로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특히 환난을 통과하는 중에는 ‘고통이 끝나지 않는구나’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신이 ‘모든 것을 동시에 보시면서 처음이요 끝을 만든 분’이라는 의미를 드러내고 계십니다. 즉, 자신을 ‘다시 살아나신 이’로 나타낸 것은 순교 직전의 고통을 당하는 서머나 교인에게 ‘혹 너희가 믿음 때문에 고통당한다 할지라도 내가 죽었다가 산 자이기에 너희도 부활의 소망을 가질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지고 주님 자신을 소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윤석전 목사: 우리는 서머나 교회와 같이 옥에 던져지고 죽음을 당할지라도 끝까지 믿음을 지켜서 둘째 사망의 해(害), 지옥 가는 신세를 면하고 모두 천국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터키 편 (18)

위 글은 교회신문 <664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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