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20-03-22 10:49:38 ]
동·서양 아우르는 육·해상교통의 중심지
하나님 섭리 속에서 다소에서 태어났고
다메섹에서 예수 만나 새로운 삶 살아
바울 생가 터와 우물, 기념교회 남아 있어
1. 바울의 우물. 사도 바울이 먹고 자란 것으로 알려진 우물. 지금도 샘솟고 있다. 이 우물이 있기 때문에 이 집 터가 바울의 생가 터라고 이야기 한다.
2. 클레오파트라의 문. B.C. 41년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여왕이 안토니우스 장군을 만나기 위해 다소를 방문한 것을 기념하고자 세웠다.
3. 사도 바울 기념교회. 이 부근에서 사역한 사도 바울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교회.
4. 바울의 1~4차 선교 여행 지도. 다소는 바울이 태어난 곳으로 길리기아의 옛 수도다. 지중해에서 16km 떨어진 내륙지방이며 교통의 중심지이자 비옥한 땅으로 많은 사람이 모였고 경제, 산업, 학문이 발달했다.
5. 바울의 우물 앞에서 윤석전 목사와 침신대 교수들.
윤석전 목사: 이번 호부터는 바울의 흔적을 찾아 선교여행을 떠나보려고 합니다. 바울이 전도했던 지역을 따라가 보면서 그 속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신앙적 의미를 같이 생각해봅니다. 먼저 바울 출생지 다소로 가보겠습니다.
로마의 속주(屬州)인 길리기아(Cilicia)의 수도였고, 현재 안타키야(Antakiyeh, 옛 수리아 안디옥) 서북쪽 39km에 위치한 사도 바울의 고향 다소를 찾았다. 6000년 넘는 역사를 지닌 세계적 고도(古都)에 사도 바울이 태어나 성장한 생가(生家) 터와 사도 바울의 우물로 전해지는 장소가 있다. 바울의 생가 터는 평지보다 2m정도 낮다. 훼손을 막기 위해 설치해 둔 유리 차단막 안에는 위대한 사도의 행적을 그려볼 수 있는 집터 주춧돌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옆에 바울이 마셨다는 우물이 있는데, 지금도 샘솟는다. 세계만방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선택된 사도 바울의 시간은 바로 이 다소에서 시작됐다.
윤석전 목사: 바울이 태어난 다소가 어떤 곳이었는지 궁금합니다.
홍순화 교수: 다소는 지금의 터키 남동부에 있습니다. 지중해에서 16km 떨어진 내륙지방인데, 다소는 바다에서 가까워 해상교통이 좋았고, 터키 내륙지방으로 가는 길리기아 관문(關門) 가까이 있었기에 육상교통의 중심지였습니다. 다소는 매우 비옥한 평야지대여서 경제와 산업이 발달했습니다. B.C. 200년 무렵 유대인이 이 지역에 많이 정착했는데, 바울의 조상도 그때 정착했다고 추정합니다. 지역 면에서 동·서양을 아우르다 보니 학문도 매우 발달했는데, 당시는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를 능가할 정도로 학문적으로 성숙한 도시였습니다.
윤석전 목사: 바울 생가 터는 동네 한복판에 있습니다. 그곳이 바울의 생가라는 근거가 있나요?
홍순화 교수: 동네 한복판에 있는 우물을 언젠가부터 ‘바울 우물’이라 부르면서 그 집 터가 바울의 생가가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전승에 기초하기에 확실성은 떨어지지만, 바울이 이 부근에 살았던 역사는 정확하니 바울을 생각할 수 있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윤석전 목사: 바울이 다소에서 출생한 데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을텐데,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김호경 교수: 바울이 다소라는 이방인 도시에서 출생하고 성장했다는 사실은 바울의 사역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당시 유대인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누면, 하나는 팔레스틴 안에 살고 있는 ‘히브리파 유대인’이고, 하나는 팔레스틴 밖에 사는 ‘디아스포라(Diaspora) 유대인’입니다. 팔레스틴 유대인은 좀 더 유대적이고 율법을 중시하는 경향을 띤다면, 디아스포라 유대인은 헬라문화에 더 많은 영향을 받고 개방적인데 이 사람들을 ‘헬라파 유대인’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은 유대인이지만 이방 사회에서 자랐기에 헬라파 유대인에 속하고, 이는 바울이 유대인이자 이방인 사도로서 사역할 수 있는 중요한 바탕이 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바울이 다소에서 출생하고 자란 환경을 바탕으로 이방인 전도 사역의 큰 기틀을 마련하셨다 생각합니다.
윤석전 목사: 그래서 하나님이 특별한 섭리를 갖고 바울을 다소에서 출생시키셨군요. 다소로 다시 가보겠습니다.
다소에는 클레오파트라 문(門)이 있다. B.C. 41년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여왕(Cleopatra VII, B.C. 69~B.C. 30)이 안토니우스 장군(Marcus Antonius, B.C. 82~B.C. 30)을 만나기 위해 다소를 방문한 일을 기념하고자 세웠다. 다소 중앙에는 바울 기념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봉쇄된 아치에 네 개의 기둥이 장식 돼 있다. 비록 모슬렘 땅이지만 위대한 사도 바울을 기념하는 교회는 훼손되지 않았고, 그 내부에는 바울의 순교를 표현하는 상징물도 보관돼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잇기 위해 바울은 20,000km 넘는 대장정의 전도 여행을 했고, 삶의 마침표는 순교였다. 그것은 세상을 뒤흔드는 세계 복음 역사에 위대한 강 줄기가 됐다.
윤석전 목사: 바울이 다소에서 태어난 것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방인 복음 전도자로 쓰시기에 합당하도록, 이방인을 알고 공부하도록 조성한 장소가 아닌가 싶어서 상당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사역에 영향을 준 도시는 다소 외에 또 어디를 꼽을 수 있을까요?
홍순화 교수: 첫째,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다메섹(Damascus)입니다. 다메섹에 있는 예수 믿는 유대인을 핍박하러 가다가 다메섹 가까이에서 쓰러졌고 그곳에 사는 아나니아(Ananias)에게 안수받은 후 바울의 인생은 새로워졌습니다. 둘째, 안디옥(Antioch of Pisidia)입니다. 바울이 사역 방향을 안디옥으로 정하고 평안하게 목회했다면 선교사의 삶을 살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데 안디옥 교회가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했기에, 선교에 일생을 바쳤습니다. 바울은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 했으나, 환상 중에 마케도니아 사람들이 불러 유럽 땅인 마케도니아(Macedonia)로 떠나게 됩니다. 성경을 보면 네압볼리(Neapolis)에 도착해서 빌립보(Philippi)에 가서 루디아(Lydia)를 만났고, 당시 로마 도로를 따라 암비볼리(Amphipolis), 아볼로니아(Apollonia), 데살로니가(Thessalonica)로 가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지역으로 따지면 바울은 마케도니아를 잊을 수 없을 겁니다. 그로 하여금 아시아를 뛰어넘을 동기를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셋째, 바울이 순교한 당시 로마 제국의 심장 이탈리아 로마(Rome)입니다. 이 도시들이 사도 바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윤석전 목사: 바울이 순교한 사실은 확실한데, 그 시점은 성경에 기록되지 않아 성도들이 잘 모릅니다. 바울의 순교 시점이 언제였는지 궁금합니다.
김호경 교수: 우리가 바울의 순교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바울의 서신을 보면 끊임없이 순교 위험에 시달리기도 하고 바울 자신이 순교를 준비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실질적으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접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산다는 마음이 사역 내내 쫓아다닌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영접해 사도가 되는 사명을 받은 그 시점부터 이미 바울의 순교 길은 시작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윤석전 목사: 바울이 시작부터 순교 정신을 가지고 출발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바울이 시작부터 순교를 각오하고 목숨 내놓고 복음을 전한 동기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김호경 교수: 바울의 목표는 예수의 죽음과 십자가를 따라가는 것이었습니다. 빌립보서 2장 6~11절에 나오는 그리스도 찬가(讚歌)에서 예수님에 대한 바울의 이해가 잘 드러납니다. 바울 이전 초대교회에서 부르던 찬가에다 바울은 자신의 신학적 특징을 삽입해 자기가 생각하는 빌립보(Philippi) 모습을 빌립보 교인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이 찬가는 우리로 하여금 선명한 그림을 보게 하는데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수직하향선(垂直下向線)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위에서 아래로, 하늘에서 땅으로, 땅에서 가장 낮은 십자가로 마음속에 그리면서 바울 역시 그 길을 갔습니다. ‘바울의 신학’을 말할 때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신학’ 혹은 ‘십자가 신학’이라 말하는 것은 바울이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그리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바울의 삶속에 어떻게 드러났는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윤석전 목사: 다소를 비롯해 사도 바울의 흔적을 좇다보면 수많은 기념교회를 보게 됩니다. 이를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홍순화 교수: 성지순례를 잘못하면 “기념교회만 보았다”는 허탈한 말을 합니다. 우리는 다른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기념교회는 말 그대로 기념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을 기념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을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부근에서 사도 바울이 사역한 것이 사실이고, 그것을 기념해 교회를 세웠다고 생각하면, 더 많은 은혜를 받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윤석전 목사: 바울에게 고난은 어떤 의미일까요?
김호경 교수: 바울에게 고난은 분명한 사도의 증표(證票)입니다. 바울은, 사도가 됐다는 것을 자신이 받은 수많은 고난을 통해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에게 고난이 중요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 삶에도 고난이 중요합니다. 고난과 십자가를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부활과 영광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바울과 같은 삶을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윤석전 목사: 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섭리 속에 다소에서 태어났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어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나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택한 그릇으로 기꺼이 사용당했습니다. 바울은 복음 증거에 사용당하는 일에 자기 목숨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결국 순교로 자기 생애를 마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아름다운 길입니다. 우리가 바울을 쳐다만 보거나 공부만 하지 말고 바울처럼 살며 바울의 생애처럼 함께 가는 삶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의 생애가 바울과 같이 영광스러운 내일을 만들기를 기대합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668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