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2-03-29 14:02:57 ]
십계명은 그리스도가 아니면 구원받지 못함을 나타내고
예수는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어 부활하다
모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왜 이 땅에 와서 죽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기록한 사람이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정녕 죽으리라’ 하신 대로 인간에게 멸망이 왔으니, 모세는 인간이 죄로 멸망할 대신 예수가 죽을 것을 말한다.
선악과로 말미암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발전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은 불행한 사건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불행한 사건을 인간에게 행복할 조건으로 차츰차츰 바꾸어 주셨다. 그 과정을 살펴보자.
원래 하나님과 아담은 창조자(創造者)와 피조물(被造物)의 관계였다. 창조자 앞에 피조물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마치 토기장이가 흙으로 질그릇을 만들어서 자기 마음대로 깨뜨릴 수 있듯이, 창조주 하나님 앞에 피조물인 인간도 그 같이 별 가치 없는 존재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아브라함 시대에 와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셨다. 택함받은 자는 종(從)에 불과하다. 만약 어떤 사람이 큰 기업을 운영하려고 일꾼을 택해서 쓴다고 하자. 택해서 쓴 사람은 어느 때인가 사업이 끝나면 제 길로 갈 사람이다. 그러나 만약 그 일을 사장의 아들에게 맡겼다면, 그는 그 사업을 추진하다가 자기 소유로 삼을 사람이다. 종(從)에게는 소유가 없다. 아들에게만 소유가 있다. 종은 택한 자다. 이때 주인과 종의 관계를 주종관계(主從關係)라고 한다. 즉 하나님과 인간이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였다가 아브라함 시대에 와서는 주종 관계가 됐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와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죗값을 갚으시고 구원하시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셨으니, 그때부터 하나님과 인간은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 즉 부자관계(父子關係)가 됐다. 하나님과 부자관계라니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리고 성령이 임하시면서 예수와 우리의 관계가 신랑과 신부의 관계가 됐다. 이것이 바로 아담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말미암아 발전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변천이다.
만약 창조물과 피조물의 관계 그대로 머물렀다면, 이같이 신랑과 신부 관계로 발전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아담이 선악과를 먹는 죄를 범한 것이 잘했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저지른 범죄로 말미암아 아들을 대신 죽이는 희생(犧牲)을 치르시고 인간을 이런 행복한 관계로 발전하게 해주셨다는 말이다.
우리는 모세와 요한보다 큰 자
이같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로 볼 때, 모세 같은 구약성경 속 위인들이 대단하게 보여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택해서 쓴 종에 불과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거듭나게 하셨으니 하나님 자녀의 권세를 지닌 사람들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우리를 향해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마23:9)”고 말씀했다. 이 말은 유대인이 지닌 사고에 정면으로 대치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대단한 존재인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라는 ‘아버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늘에 계신 이를 아버지라 부르니, 수준이 완전히 다른 신분이 됐다.
다시 말해, 예수 이전까지 하나님께서 쓰신 인물들이 대단한 사람 같아 보여도 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다. 우리가 비록 그들보다 못해 보여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누가복음 7장 28절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고 하셨다. 왜 그런가? 요한까지는 택해서 쓴 선지자 곧 종(從)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의 피로, 성령으로 거듭났기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이기 때문이다.
모세는 천사를 통해 하나님께 율법을 받고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끌어낸 위대한 지도자다. 이런 모세가 하나님께서 주신 영감(靈感)으로 쓴 성경 속에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대로 죽어야 할 자인 예수에 관해 말했다. 그런데 수건으로 덮듯 율법으로 가려놓았기에 유대인은 이 사실을 알래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보고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가 죽으시고 부활.승천하신 이후에 성령이 임하자마자 가려놓은 율법이라는 수건이 벗겨져서 ‘아, 과연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하고 예수가 메시아인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율법이라는 수건을 쓰고 있는 유대인은 예수를 메시아로 보지 못한다. 그들은 아직도 오해한다. 아직도 율법이라는 수건을 쓰고 있어서 예수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유대인이 예수가 메시아인 것을 믿고 있다. 그들은 말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알고, 만나고, 성령으로 체험한다. 체험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예수를 만나 체험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이처럼 모세는 예수가 죽어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이처럼 행복한 관계로 발전할 것을 희미하게나마 알았기에 예수가 죽어야 할 것을 말한 것이다. <계속>
※다음 호에는 모세에 이어 선지자들이 예수가 오는 길을 어떻게 예비하는지를 공부해보자.
위 글은 교회신문 <283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