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2-08-21 22:01:58 ]
인간의 힘으로는 의로워질 수 없어
율법으로 죄를 알고 예수께로 가야
사람들이 율법을 오해하는 양상이 시대에 따라 다르다. 먼저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지킴으로 의(義)가 있다’고 오해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 흘려 인류 구원을 이루신 이후 복음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지금은 복음 시대인데 율법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제 율법은 아무 소용이 없다. 율법은 끝났다’고 오해한다. 이런 오해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보낸 목적과 율법의 용무(用務)를 잘 몰라서 생긴다.
율법을 보낸 목적
유대인은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워지려고 굉장히 노력했다. 율법을 지켜 죄를 짓지 말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법(律法)은 지킨다고 구원받는 법이 아니다. 율법을 지키려 하면 할수록 인간은 육신을 지녔기에 도저히 율법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할 뿐이다.
율법은 법으로는 의로우나 인간이 지킬 수 없는 법이기에, 율법을 지키려 하면 할수록 ‘아, 나는 죄인이구나!’라고 깨닫게 된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보낸 목적은 율법을 지킴으로 인간을 의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힘으로는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려고 율법을 보내셨다.
로마서 8장 3절에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라고 기록했다.
율법이 인간을 의롭게 하고 싶어도 육신 때문에 절대 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신다. 그러므로 육신을 지닌 사람은 누구든지 율법 앞에 의로울 수 없다.
그래서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로마서 3절 후반과 4절에 기록했다.
그러면 율법의 요구는 무엇인가? 율법을 의롭게 지키라는 것이다. 그러나 육신을 입은 인간은 아무리 율법을 지키려 해도 지킬 수 없다. 못 지키니까 결국 죄요, 죗값으로 사망에 이르게 된다. 그러니 결국 율법은 ‘너는 죽어야 한다’라고 요구한다.
검사가 죄인을 신문(訊問)하여 형법 몇 조(條)를 근거로 징역 몇 년이라고 판사에게 구형(求刑)한다. 결국, 구형은 법(法)이 죄인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율법이 죄인에게 ‘율법대로 못 산 인간은 죽어야 한다’라고 요구한다. 그러면 율법의 요구를 누가 들어주는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와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죗값은 사망’이라는 율법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예수가 우리 죄를 담당하고 죽자마자 예수가 죽어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었으니 우리는 죄에서 해방된다. 그래서 로마서 8장 1~2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하고 말씀했다.
율법의 용무(用務)
유대인은 자신들이 율법을 잘 지켰으니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부했다. 그런데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요, 율법으로는 흠이 없다는 바울이 예수를 만난 후,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했다(딤전1:15).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율법 앞에 죄인인지 아닌지는 자기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율법이 그 사람을 보고 죄인인지 아닌지를 판단한다. 그런데 자기 스스로 율법 앞에 ‘나는 의롭다, 흠 없다’라고 자부할 수 있는가? 아니다. 사람에 따라 양심이 각기 다르다. 어떤 사람은 남의 밭에서 참외를 마음대로 따 먹고도 오히려 큰소리치고, 어떤 사람은 혹시 참외를 따 먹었다고 의심할까 봐 참외밭 근처에 가서는 신발 끈도 고쳐 매지 않는다.
이같이 사람에 따라 양심의 기준이 각기 다르기에, 양심이라는 법으로 자기가 의를 이루었다고 해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바울이 율법으로 자기를 볼 때 분명 의인이었지만, 예수를 만나는 순간에 죄인인 것을 발견했다.
율법은 행동으로 범한 죄는 모조리 찾아내지만, 마음으로 범한 죄는 찾아내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인간의 성품 속에서 일어나는 본죄, 육신의 소욕, 육신의 정욕, 육신의 요구까지도 다 죄라고 찾아내셨다. 이것들이 인간 속에 들어 있어도 겉으로 절제하고 안 그런 척하면 의롭게 보인다. 그러나 세상에 이런 성품적인 죄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죄를 찾아내는 율법
기독교는 죄를 다룬다. 죄를 그대로 덮어놓고 ‘앞으로 잘하라’는 식이 아니다. 죄를 다 끄집어내서 해결해 버린다. 그리고 앞으로도 죄 안 짓고 살 길이 없으니 날마다 회개하라고 한다. 기독교는 왜 이렇게 죄를 다루는가? 죗값이 사망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육체는 죽으면 그만이지만, 우리 속에 있는 영혼은 하나님의 법칙대로 죄를 해결하지 아니하면 그 죗값을 짊어지고 전부 지옥에 간다. 그러나 죄 없는 예수가 와서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셨으니 예수가 내 죄를 갚았다는 사실을 믿기만 하면, 그 사람은 천국에 가서 영원히 산다. 이것을 몰라서 안 믿고 지옥 가서야 되겠는가?
그러므로 율법은 우리를 귀찮게 하는 법이 아니다. 내가 죄인인 것을 깨닫고 알게 하는 법이다. 다시 말해 율법은 내가 죄인임을 발견케 하고, 나를 살려줄 예수에게로 찾아가게 하는 법, 나를 살려줄 예수에게로 달려가게 하는 법이다. <계속>
*윤석전 목사 ‘무보수전도자학교’강의를 요약·정리한 것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302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