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2-12-11 16:50:01 ]
자기 확신에서 나오는 어떤 다짐이나
믿음을 가장한 거짓 신앙을 경계해야
이번 호부터는 ‘신앙(信仰)’과 ‘신념(信念)’을 비교하며 공부해 보자. 먼저 히브리서 11장 6절을 보면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하고 말씀한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할 때, ‘기쁘시게’라는 표현으로 보아, 우리가 겨냥할 믿음의 상대인 하나님께서는 분명 인격을 지니신 분임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상대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얼마나 믿느냐에 신앙생활의 성패가 좌우된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신앙생활 하면서도 하나님을 상대하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는 데 문제가 있다. 그렇게 해서는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또 “그가 살아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라고 했다. 신앙의 믿음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상대하는 것으로, 예배할 때도, 충성할 때도, 찬양할 때도, 예물 드릴 때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인식해야 한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겨냥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또 그렇게 해야만 상(賞)이 있다.
만약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을 찾아서 그분을 만나는 데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저 자기 혼자만의 믿음, 곧 신념에 그치고 만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면 어떤 것도 하나님과 상관이 없으며,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신념은 자기 확신을 믿음이라 여긴다
하나님을 찾아서 하나님과 관계 속에 형성된 믿음,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의 역사는 이 우주가 사라져도 하나님의 기억에 영원히 남아 천국에서 영원하다. 그래서 믿음은 영원한 것이다. 반면에 자기 혼자만의 진실, 혹은 사람과 사이의 진실은 속을 수 있다.
자기 스스로를 이끌어가는 신념은 곧 자기 확신(確信)이다. 스스로 자기가 하는 일이 옳다고 여기는 자기 믿음이다. 다시 말해, 신념은 자기 확신을 믿음으로 갖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을 매우 신뢰하지만,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자기 확신에 찬 믿음은 그 결과가 실패며, 숨을 거둔 후에 자기 영혼의 멸망을 해결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이, 많은 사람에게 호응받을 만한 최고 아이템으로 사업을 벌이니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자금 부족과 홍보 마케팅 미숙으로 사업이 망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결국 자기 신뢰가 무너져 버린 것이다. 자기 확신에 찬 신념은 자기 스스로 어느 정도의 사람인지를 모르게 만든다. 우리 인간은 바로 앞에 놓인 미래조차 모른다. 그래서 인간이 낳은 신념의 믿음에는 보장이 없다.
교회 안에도 이런 신념의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 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저지른 사람에게 “그렇게 하면 안 된다” 하고 권면해 주어도 듣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나를 버리시겠는가? 사랑이신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나를 버리지 않으시리라 믿는다”며 자기 확신에 차 있다. 자기 신뢰가 대단하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영육 간에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정했다고 그대로 따라오는 분이 절대 아니시다.
자기 확신의 신앙도 보장이 없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 것 외에 다른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확신일 뿐이다. 반면에 성경에 기록한 하나님 말씀이 믿어진다면 그것이 바로 진정한 기독교 신앙이다. 우리는 절대 자기 확신에 차 있지 말고, 신앙의 믿음을 지녀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확신, 곧 신념의 믿음으로 신앙생활 하고 있으면서도, 그만하면 되었다고 스스로 만족한다. 또 어떤 사람은 “신앙생활은 지나치게 해서도 안 되고 느슨하게 해서도 안 되니 적당히 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가르치는 분은 하나님이시요, 지침서는 성경인데, 신앙생활을 어찌 그리 자기 마음대로 정하는가?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자기 확신에 찬 사람이었다. 주인의 의향과는 상관없이 주인에게 받은 한 달란트를 땅에 잘 묻어 두었다가 그 달란트를 그대로 주인 앞으로 가지고 갔다. 그리고 자기 확신에 차서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자기 확신에 차서 그렇게 하면 칭찬받을 줄 알았다.
그러나 주인은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고 무섭게 책망했다. 이는 충격적인 사건이다. 자기 확신이 확실하고 분명한데 왜 그렇게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었을까? 신앙생활은 자기 확신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렇게 자기 확신에 찬 행동을 당장 고쳐야 한다.
자기 자신이 ‘이 정도면 됐지’라고 신앙생활의 한계를 정하거나, 아니면 ‘나의 한계는 이것뿐이니까’라고 자기 한계를 정하는 것, 둘 다 안 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찾는 이에게 상 주시는 분이니 그 사실을 믿어야 한다고 분명히 말했다. 자기 확신의 신념은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 이것은 실로 두렵고 무서운 일이다. <계속>
*윤석전 목사 ‘무보수전도자학교’강의를 요약·정리한 것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316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