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3-11-19 10:19:12 ]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오직 예수가 필요함을 말해
예수 빠진 기독교는 인간의 영혼에 아무런 유익이 없다
성경은 어디를 읽어도 시종일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말하고 있다. 이같이 성경의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점을 알고 읽어야 어느 구절을 읽어도 거기서 예수를 만날 수 있다.
구약 전체에 나타나신 예수
성경의 주제가 예수라고 말하면 어떤 사람은 “그러면 구약성경 에스더서도 예수를 말하는가?”라고 묻는다. 에스더서는 이스라엘 민족에 관한 이야기만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당시 바사(페르시아)제국의 총리 대신 ‘하만의 궤계’로 말미암아 모조리 멸절할 위기에 처했을 때, 만약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자기 민족을 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스라엘 민족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할 수 있었겠는가? (에스더 3~7장 참조)
에스더의 신앙심으로 그 민족이 살게 되었기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인류의 구원 주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올 수 있었다.
또 어떤 사람은 “창세기 주제도 예수인가?”라고 반문한다. 창세기는 시작부터 예수가 주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지으신 목적이 아들로 말미암아 아들을 나타내게 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점은 히브리서에 잘 드러나 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1:2). 그러니 천지 창조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지으셔서 인간에게 주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과를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이 말씀에도 역시 하나님 아들의 역사가 나타나 있다. 인간이 마귀의 궤계에 속아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선악과를 먹음으로 말미암아 정녕 죽음이 왔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4~5)는 말씀 그대로, 창세전부터 아들 예수를 죽이시고 우리를 살려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시려 예정하셨다는 것이다. 이처럼 선악과 사건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진하게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선악과를 먹게 한 뱀에게 다음과 같이 저주하셨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 이 말씀에서 보듯이 여자의 후손이 예수 그리스도시니, 창세기를 읽어도 예수가 주제임을 분명히 알수 있다.
요한복음 1장 1절 역시 예수가 주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여기서 ‘태초’는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나타내신 시점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1장 14절에 보면, 태초부터 계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다. 태초부터 계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는데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전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
만약 이 같은 사실을 모르고 성경을 읽는다면, 그는 성경의 주제를 모르고 읽는 셈이다. 설교 속에 ‘예수’ 소리가 없다면 그는 성경의 주제를 모르고 설교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마태복음 5장 13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많은 사람이 이 구절을 본문으로 설교할 때 소금의 용도가 세상을 썩지 않게 하는 점에 초점을 맞춰 예수 빠진 설교를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소금’은 예수 그리스도다.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소금 맛을 내려면 예수가 병을 고치셨듯이 우리도 병을 고쳐야 하고, 예수가 귀신을 쫓아내셨듯이 우리도 쫓아내야 하고, 예수가 영혼을 구원했듯이 우리도 영혼을 구원하여 예수의 맛을 재현하라는 의미다. 왜냐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했으니, 어떤 말씀이든 다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이 같은 사실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예수 빠진 설교를 하면, 이는 큰 잘못이다. 우리가 아무리 선덕을 베풀어도 예수 빠진 선덕이 궁극적으로 인간의 영혼에 무슨 유익이 있는가. 요즈음 기독교가 이방 종교처럼 예수 없는 소금의 맛을 외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율법도 선지자도 예수를 말한다
성경은 전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구약 선지자도 결국 예수를 말했다. 선지자는 원래 여호와 하나님의 증인이다. 여호와라는 의로운 하나님께서 율법이라는 안경을 쓰고 인간을 바라볼 때, 인간은 다 죄인이다. 이처럼 인간은 누구나 율법 앞에 죄인이니 하나님 앞에 회개하라고 외치는 자가 바로 선지자다. 그렇다면 그 회개를 감당할 자는 누구인가? 바로 예수다. 그러니 선지자도 결국 예수를 증거하고 있다. 이렇게 성경은 어디를 읽어도 예수가 주제가 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잘못 알고 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362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