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보수전도자학교(100)]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의 빛이다

등록날짜 [ 2014-05-06 15:58:22 ]

우리 인간이 죽게 된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하는 빛은 율법이요, 우리 인간을 그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하는 빛은 진리 곧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시다. 그러므로 이 진리의 빛은 위대하고 영화로운 영원한 빛, 곧 영광(榮光)이다.

하나님 말씀이라는 율법과 진리의 빛이 없다면, 우리는 죄가 무엇인지,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목적이 무엇인지, 우리를 괴롭히고 멸망시키는 존재 마귀역사는 무엇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지만 하나님 말씀의 빛이 그 모든 것을 알게 한다.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율법과 진리라는 빛을 통해 죄가 무엇인지, 저주가 무엇인지, 악한 영들이 무엇인지 환히 깨달아지고, 자신 속에 상주하던 무지와 죄악이라는 어두움은 다 물러가고 말씀의 빛이 자신을 점령한다. 마귀역사와 어두움으로 저지른 죄와 인간 육체의 정욕이 굉장히 힘 있는 것 같아도, 하나님 말씀인 율법과 진리의 빛 앞에서 ‘나는 죄인이구나! 나는 죄로 죽고 멸망하게 되었구나’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그 자리에서 무릎 꿇지 않을 사람은 없다.

사형선고를 받을 만큼 무서운 죄를 저지른 죄수는 다른 죄수가 10년형이나 20년형, 혹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을 때 얼마나 부럽겠는가. 드디어 그가 3심에서 사형선고를 받는 순간, 죄지을 때 드러난 그 잔인무도하고 악독한 야수성은 완전히 무너지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만다. 죗값으로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빛이 왔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죗값은 사망’이라는 법적 판결 앞에 도무지 살아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도 모두 율법 아래서 ‘죗값은 사망’이라는 사형선고를 받았으므로 지옥 신세를 영원히 면치 못할 절망적인 죄인이었다. 하지만 예수께서 우리가 죽어야 할 대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죗값은 사망’인 그 사망을 갚아 주셨으니, 그것을 아는 것이 빛이요, 믿는 것이 구원이요 생명이며, 자기 삶으로 갖는 것이 진리다.

말씀의 빛은 우리의 중심을 비춘다
하나님 말씀의 빛은 얼마나 강력한지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환히 본다(히4:12). 그렇기에 하나님 말씀의 빛 앞에서는 우리의 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니, 숨길 길이 전혀 없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지금도 자신의 말씀의 빛으로 우리를 보고 계시고,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신 바 되신다. 눈을 만드신 이가 우리의 눈이 보는 것을 모르시겠으며, 입을 만든 이가 우리의 입으로 말하는 것을 모르시겠으며, 귀를 만드신 이가 우리의 귀로 듣는 것을 모르시겠는가. 생각과 마음을 지으신 이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모르시겠는가.

하나님은 겉과 중심을 환히 보신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언행심사를 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하나님을 어떻게 상대하려 하는지를 보고 계신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율법과 진리의 빛으로 보고 계시다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인식하는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거룩한 빛 앞에 사는 자답게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맞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한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환히 알고, 보고, 심판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말씀의 빛이 비추는 대로 움직여야
우리가 빛이신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에 ‘아멘’ 하여 믿음으로 들었다면, 그 말씀은 심비에 새겨져 심령에서 우리를 보고 계신다. 우리는 도무지 하나님 말씀이라는 거룩한 빛을 피할 길이 없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말씀의 거룩한 빛 앞에서 신앙생활 잘하고 싶어도 못 하는 이유는 하나님 말씀이 내게서 그만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스스로 배타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죽어 장사한 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를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고 외치시자 팔레스타인 땅, 43~48도에 육박하는 더위로 부패한 몸을 벌떡 일으켜 걸어 나왔다(요11:43~44). 그런데 우리는 왜 새벽예배에 나와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라는데도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가. 영혼은 새벽예배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부르짖어 기도하기를 소원하지만, 육신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롬8:12). 육신과 벌이는 이 싸움에서 이긴 자는 영적인 사람이요, 진 자는 육신의 요구대로 사는 정욕의 사람이다.

하나님 말씀이 성령의 감화와 감동이 되어 빛과 능력이 될 때만 나를 움직일 수 있으며, 그 말씀이 바로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하는 진리로서 생명이 된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 말씀의 빛을 따라 움직인다는 것은 영적으로 살아 있다는 증거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대로 움직이지 못한다면 이미 죽었다는 증거다. 죽은 사람은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고 움직이지도 않는다.

교회에서 신앙생활 잘하다가도 마귀에게 속하여 어둠에 결박당하면, 마귀가 시키는 대로 음부의 앞잡이가 되어 불평불만 하다 결국 마귀의 궤계를 좇아 교회를 떠나고 만다. 어두워서 음부의 권세자, 어두움의 주관자의 수작인 줄 전혀 모른다. 그러므로 자신에게서 불평불만이 나온다면 얼른 마귀역사인 줄 깨닫고 돌이켜야 한다.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 돌이키지 못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이미 어두움에 사로잡혔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율법과 진리의 빛이라는 법에서 떠난 사실을 모른다. 하나님 말씀의 빛으로 아무리 깨닫게 하려 해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완전히 어두움의 주관자 마귀에게 결박됐다.

육신을 위한 세상살이에는 매우 민감해서 육신의 일이 잘된다면 영적생활을 내팽개치고 미치도록 세상에 빠지지만 그 결국은 죄의 법 아래서 처절한 지옥 형벌을 받을 뿐이다. 진리와 생명인 하나님 말씀에 둔감한 사람은 살아 있다고 하나 실상은 죄의 법 아래서 이미 죽은 사람이다. 야고보 사도가 말씀했듯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 말씀이라는 생명과 진리가 그를 움직인다. 산 자라면 생존 본능대로 생명의 빛을 따라 움직인다.

하나님 말씀은 빛과 진리와 생명이기에, 또 하나님 자신이기에,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심령에 들어오는 순간, 우리는 율법의 정죄라는 절망에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공로로 해방되어 살아나야 한다. 진리이신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따라 움직여 천국까지 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또 율법과 진리의 빛에 인도받아 하나님의 진리의 나라, 빛의 나라로 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384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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